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셀리 Sep 08. 2021

불편했던 편의점

알바비 없던 알바시절..

2004년 아르바이트 시급은 2840원, 현재는 8720원. 17년 사이에 많이 오른 것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그 시급도 받지 못하고 종종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바로 아빠의 편의점에서.


최근 밀리의 서재에서 밀리의 픽으로 추천해준 <불편한 편의점>을 읽으면서 진짜 불편함이 들었다. 아무리 소설 속이라지만 그 안에서 그려지는 훈훈한 편의점 스토리는 실제로 내가 기억하는 편의점 일상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불편한 편의점>에서는 학교를 은퇴한 선생님이 편의점을 차리면서 가족 같은 알바생들과 따뜻한 정을 나누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서울역에서 잃어버린 지갑을 찾아준 노숙자 청년과의 인연으로 그가 그 편의점 야간 알바를 하면서 편의점에 들르는 많은 손님들크고 작은 변화를 맞게 된다. 훈훈하고 따뜻했다. 눈물이 날만큼 마음이 찌릿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짜 편의점 점정 딸이었던 나에게 이야기 속 편의점은 완벽한 판타지였다.


오랫동안 농협을 다니던 아빠는 예상치 못한 이른 명퇴를 하고 서울로 올라와 자영업을 시작하셨다. 여러 업종을 거쳐 최종적으로 아빠는 편의점을 차렸다.

<불편한 편의점> 출처: 나무 옆 의자

편의점 매출 할은 어 위치하고  있에 달려있다. 그 누구도 '오늘은 편의점을 가야겠다'하는 다짐으로 편의점을 가지 않는다. 그저 가는 길에 편의점이 있으면 살 것이 생각나거나 먹고 싶은 것이 있어서 즉흥적으로 들. 이 알았기에 아빠도 편의점을 하기로 마음먹고, 점장 교육을 받으면서 서울과 경기도 여러 곳을 다니면서 자리 몫이 좋은 곳을 찾았다. 그렇게 애써서 골라 찾은 곳이 광명역과 철산역 사이였다. 그 주변에도 이미 2 군대의 경쟁 업체 편의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주변에 편의점이 하나도 없는 곳은 드나드는 사람도 없다는 뜻이기에 아빠가 괜찮다고 여긴 곳은 어디든 이미 경쟁업체가 있었다. 결국 그곳을 최종선택했다.  최대한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규모 최소한으로 했다. 아빠 편의점은 내가 지금껏 봤던 편의점 중에 가장 작다. 정말 딱 있어야 할 것만 있었다.  아빠가 최소로 줄이고자 했던 비용이 바로 인건비였다. 편의점은 매출을 늘리기 위해서 호객 행위를 직접 할 수는 없다.  오는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기본, 아르바이트생을 최소로 하는 몸빵 전략으로 맞선 것이다.




낮에는 주로 엄마가 근무를 하고, 오후부터 밤늦게까지는 아빠가 근무를 했다. 그리고 야간 알바생만 구해서 돌아가는 시스템을 만들고자 하셨다. 그런데 세상일이 내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일에 통하는 진리다.  <불편한 편의점>에 나오는 야간 알바생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야간 알바생들은 수시로 연락이 두절된 채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 아빠는 오후 5시부터 시작한 일을 다음 날 아침 7시까지, 엄마 교대하기 전까지 12시간 넘게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런데 항시 대기조를 해도 부족한 판에 엄마는 난데없이 자신은 다른 일을 하겠다고 선언을 했다. 편의점에서 일을 해봤자 엄마 몫으로 확실하게 떨어지는 것이 없고, 시시건건 아빠 부치고 갈등만 늘어갔다. 그쯤, 막내 이모는 엄마에게 일당으로 주는 일을 제안했고, 엄마는 뒤도 안 돌아보고 아빠에게 편의점은 알아서 운영해보라고 하고 가신 것이다. 아빠는 낮 근무까지 자신이 혼자 해보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아빠는 종종 나에게 SOS를 했다.  




당시 아빠 눈에 나는 놀고먹는 대학생이었다. 대학 2학년쯤부터 시간표 짜기 신공을 부려서 학교를 매일 가지 않고 일주일에 3일에서 4일만 가도 학점을 채울 수 있게 다니곤 했다. 아빠도 대략 나의 시간표를 아셨기에 기가 막히게 공강 시간이나 학교에 가지 않는 날 부탁을 했다. 그러나 대학생들이 겉으론 한가해 보여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은 대학생들 스스로는 알고 있다. 나도 짜놓은 스케줄이 다 있었다. 대학에서 좋은 학점을 따기 위해서는 고등학교 중간고사를 준비하는 열으로 매일 공부를 해도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던 때였다. 아빠는 편의점을 지키면서 공부를 하라고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낮에 편의점은 손님이 많지 않았지만 끊이지 않고 계속 들어와서 담배를 사거나 군것질 거리를 사 가곤 했다. 가만히 집중해서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그 당시 나는 대치동에서 영어 과외를 하고 있었다. 과외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꾸준히 하면서 용돈벌이를 하고 있었지만 대치동 과외는 처음이었다. 역시 소문대로 과외비 수준이 달랐다. 그 엄마는 원래 지방에서 사는 분인데 딸의 학업을 위해 둘이서만 대치동 은마 아파트로 왔다고 하셨다. 오로지 딸의 학업을 위해 대치동에 입성한 어머니의 기대치를 만족시키기 위해 애쓴 수고비로 그만큼의 과외비를 받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내 공부보다 더 열심히 준비하곤 했다. 힘은 들었지만 매달 과외비 받는 날에 통장에 찍히는 금액을 보면 다시 힘이 번쩍 났다.  

 


그런데 아빠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는 것은 나에게 그 어떤 수고비도 돌아오지 않았다. 차마  아빠에게 먼저 알바비를 달라고도 못하는 나는 영락없는 첫째 딸이었다. 그저 편의점에서 일하면서 과자나 커피를 맘껏 먹는 것으로 스스로 보상을 하곤 했다. 그런데 하루는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지하철을 타고 가는 길에 아빠 한데 전화가 왔다. "지금 빨리 편의점으로 와, 야간 알바생 오늘 못 온다고 해서 아빠가 야간 해야 되니깐 네가 낮에 좀 봐." 거의 명령조였다. 딸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무슨 계획이 있는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당장 오란 식이었다. 거기에서부터 마음이 상했다. "안돼요. 나 친구랑 약속 있단 말이야. 다른 사람 구해봐요." 했지만 아빠는 소리를 지르며 "내가 부를 사람이 있으면 너한테 전화를 했겠냐!!" 하면서 당장 오라고 덧붙인후 바로 전화를 끊었다. 결국 친구와 약속을 취소하고 나는 또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에 도착했을 때 아빠는 "왔냐." 한마디뿐이었다. "인수인계 잘하고 시작해라."고 하시곤 집으로 들어가셨다. 혼자 남아서 인수인계를 하면서 동전 별로, 지폐별로 포스기에 찍힌 금액이 맞는지 일일 세면서 확인하는데 담배를 사러 손님이 들어왔다. "에쎄 한 갑"이라고 반말로 말했고, 난 인수인계 중에 포스 기를 건들면 다시 처음부터 금액을 맞춰야 하는지라 "잠시만요. 손님"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빨리 줘. 급하다고!!!" 하며 소리를  질렀다. 쫄린 마음에 일단 담배부터 먼저 주고 손님을 보내고 인수인계를 마무리했다. 그러고 났는데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다. '대체 난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란 생각이 절로 들면서 이 시간에 과외를 했으면 내가 얼마를 벌 수 있는지 계산을 해보기 시작했다. 영수증 종이 뒤에다가 내가 받는 과외비를 적고 시간당 얼마인지 계산했다. 시간당 3만원이 넘었다. 그리고 한 달에 내가 평균적으로 편의점에서 일하는 시간을 계산해서 급으로 환산했다. 그랬더니 못해도 족히 한 달에 100만 원은 받을 수 있는 금액이 나왔다. 그렇게 비싼 이 몸을 아빠는 공짜로 부려먹고 있다는 생각에 더 화가 났다.


교대하기로 한 시간에 아빠가 왔다. 나는 계산한 종이를 보여주면서 소리 높여 말했다. "내가 이 시간에 과외를 했으 이렇게 벌 수 있는데, 아빠는 나를  왜 자꾸 부르는 거야! 그냥 알바를 쓰란 말이에요. 알바는 한 시간에 2800원주면 되잖아!! 나는 비싼 몸이거든!"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아빠에게 막 따져 들었다. 아빠는 내내 듣고만 계셨다. 내가 건네준 종이를 뚫어지듯 쳐다만 보고 말이다.


"아빠도 너 부르기 전에 다른 사람들 다 연락해보고 하는 거야. 그랬는데도 결국 부탁할 사람이  딸밖에 없으니깐... 미안하다. 앞으로 안 부르려고 노력 하마. 그리고 앞으로는 너 일할 때 알바비 가져가. 동생들은 알아서 포스기에서 빼가길래, 너도 그럴 줄 알았지.." 나는 아빠 말을 뒤로한 채 문을 박차고 바로 나왔다. 그런데 그만 유리문으로 계산대 앞에 서 있는 아빠를 보고야 말았다. 아빠는 고개를 떨군 채  축 처진 어깨 아래에 내가 떨궈놓은 그 종이를 여전히 보고 있었다.  

 


나도 두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 후, 아빠에게 내 가치를 돈으로 따져서 우겼던 그때가  생각났다. 대체 난 그때 아빠에게 무슨 짓을 했던 것일까. 감히 아빠 앞에서 말이다. 아빠가 내게 준 것들은 단 한 번도 돈으로 바꿔 생각하지 않고 그리 당연하게 누려왔으면서 말이다. 돈으로 차마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들의 소중함을 당연히 누리고 있을 때는 깨닫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인가 보다.


그때 일을  죄송했다고 말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이제야 죄송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죄송했어요. 아빠.... 그때는 그 편의점이 얼마나 싫었는지 몰라. 아빠가 얼마나 아등바등 지키려고 했는지, 그 고생을  뻔히 알면서도 회피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절하게 고생한 것 누구를 위한 것인지 왜  더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철부지 대학생이었던 를 이제라 꾸짖어봅니다. 죄송해요. 아빠. 죄송해요... 그리고 그토록 애써줘서 참 감사했어요. 너무 고생하고 애쓰셨어요. 이제는 부디 편안하시길요..."


매거진의 이전글 소공녀 세라 말고, 요술 공주 '세리'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브런치 시작하기

카카오계정으로 간편하게 가입하고
좋은 글과 작가를 만나보세요

카카오계정으로 시작하기
페이스북·트위터로 가입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