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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리 Oct 23. 2021

아빠는 우리를 버린걸까...


장례식을 치르기 전에 엄마와 막내는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자살’의 흔적이 아빠 목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지만, 경찰은 절차대로 그 시각에 함께 있던 가족들을 조사해야 했고, 엄마와 막내는 순순히 응했다. 일단 아빠의 죽음을 목도하고 엄마와 막내는 목놓아 울었겠지만, 그 뒤로 수습하는 절차를 밟으면서 평정심을 찾아야만 했다.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두 사람은 침착하게 장례 절차를 큰 집 어른들과 논의 중이었다.

 

차마 엄마에게 괜찮은지 물어볼 수 없었다. 일단 나부터 참담한 마음을 어찌 수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평소 나보다 다섯 살 어린 막내는 늘 철부지 같이 느껴지곤 했었다. 아빠가 몸져누울 때마다 싫은 소리를 아빠 면전에서 종종 내뱉었지만, 엄마와 누나들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은 못 하는 아이였다.  장례식을 준비할 때, 막내는 앞서서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줬다.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하는 막내를 보면서 고마운 마음이 들면서도 아빠의 마지막 모습을 먼저 발견한 것이 그였다는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장례식 중, 잠시 짬이 났을 때 여동생과 우리 셋만 모이는 기회가 있었다.


  “너 괜찮아? 네가 충격받은 건 아닐지 계속 걱정이야.”

  

  “, ..”

  

  “많이 놀랐지?”

  

  “그냥... 근데 누나, 그거 알아?”

  

  “뭘...?”

  

  아빠는 우리를 버린 거야.  그렇게 생각해.”

  

  “...............


아빠의 마지막 순간을 본 막내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가 우리를 버린 것이라고.


아빠가 우울증으로 앓아누워있을 때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아빠가 우리 가족을 진짜 사랑하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책임감 없이 누워서 죽겠다는 소리만 할 수는 없는 거라고. 아빠가 너무 이기적이라고만 생각했다. 당신이 선택한 그것 앞에서 잠시만 우리를 생각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어찌 나라고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그날은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었고, 하나뿐인  손녀가 4번째 맞는 어린이날이었다. 그리고 열흘 후에는 곧 둘째 손녀가 태어날 예정이었다. 그리고 당신이 벌여놓은 일을 수습하느라 엄마와 두 자식이 번갈아 편의점을 지키느라 사투 중이었다. 그런 가족들을 생각하셨다면 과연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원망과 미움의 마음이 먼저 들었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것을 막내가 먼저 말한 것뿐이었다.


아빠는 우리를 버렸어.”


이 말이 한동안 내 가슴을 계속 짓눌렀고, 우리는 이 사실을 진실인 양 받아들이고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아빠한테 버림받았다는 것, 아빠가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이 알려지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장례식을 치르면서 엄마와 동생들에게 아빠의 사망 원인을 자살이 아닌 ‘심장 마비’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어쩌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었겠지만, 아빠의 친한 친구들이나 친지들이 아닌 이상 다른 조문객들에게는 그렇게 말해도 의심받지 않았다. 무엇보다 조문하러 올 신랑 회사 동료들, 친구들, 그리고 내 대학 동기와 친구들, 교회 지체들에게 솔직하게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아빠의 사망 원인을 그렇게 알고 있는 지인들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글로 아빠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다시 자문했던 것 같다. “정말로 아빠는 우리를 버린 것일까?”라고 말이다. 그 뒤로 아빠가 앓았던 우울증에 관한 책과 영상도 많이 찾아서 탐독하고 사례들을 살펴봤다. 많은 정신과 의사들은 한 목소리로 우울증은 개인의 의지 문제로 치부할 병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는 아빠가 겪고 있는 우울증을  ‘질병’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저 아빠가 당신에게 주어진 삶에 책임을 지고 의지를 일깨워 다시 일어나야만 한다고 바랐던 것이다. 아빠를 죽음까지 내몰았던 ‘우울증’이 불치병 수준의 질병으로 알았다면 아빠가 급성으로 다시 우울증이 재발했을 때 가족들은 아빠를 홀로 방치할 것이 아니라 어떡하든 이끌고 병원에 입원을 시켰어야 했다.


당시 우울증 재발로 다시 불면증을 앓았던 아빠는 수면제만 처방받으며 병원 진료를 받았지만, 본인 자신도 입원 진료가 필요한 만큼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아빠는 스스로 그 어떤 것도 판단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편의점 일로 아빠와 여러차례 통화를 하고 찾아가서 대화를 나눌 때도 아빠는 정확히 문제 인식을 하지 못했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빠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을 때 남은 가족들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했을지는 그 누구도 함부로 판단할 수 없지 않을까.


다만 딸인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빠의 마지막이 아닌, 아빠가 그런 선택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던 당신의 삶을 정확히 아는 것이었다. 글을 쓰면서도 아빠를 전적으로 이해했거나 그가 겪었을 감정을 온전히 공감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렇게 살아온 아빠의 삶을 누군가 한 명은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이 그의 생(生)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아빠와의 추억을 기억하고 기록하면서 확실 한 가지는  깨달을 수 있었다. 아빠는 우리 가족을 사랑했고, 그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우리네 아버지 시대에 주어진 가혹한 현실 앞에 그는 어떡하든 잘살아 보고자 발버둥 쳤다.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했고,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그의 정신으로 파고든 무서운 질병을 피할 수 없었다. 그것마저도 그가 스스로 이겨냈어야 했다고 항변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것이 아닐까. 지금은 알고 있다. 아빠가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빠가 마지막에 그러한 선택을 했다고 해서 아빠의 삶이 송두리째 의미가 사라진, 허무했던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최선을 다했고, 충분히 우리를 사랑하셨다.



커버 사진: © mvds,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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