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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리 Oct 12. 2023

삶이 글을 넘어서는 순간

육아란 시행착오 끝에

참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또 뿜어내고 말았다.


아침마다 글을 쓰며 나를 돌아보고 어제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길 바란다. 그럼에도 아이들과 일상을 살다 보면 시시때때로 변하는 감정들의 공격에 속절없이 넘어진다. 언젠가 이어령 선생님이 작고하시기 전에 했던 인터뷰에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큰딸 이민아 목사님에 관한 이야기는 워낙 유명해서 알고 있으나 다른 자녀들에 관한 이야기는 공개되지 않아서 사회자가 조심스레 다른 가족에 관해 물었을 때다. 그때 이어령 선생님은 “자녀는 가장 가까운 타인으로 대하려고 노력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가장 가까운 타인, 내 뱃속에서 열 달을 품고 힘겹게 출산했지만, 그 아이는 고유의 존재로 나와는 다른 타인이다. 그럼에도 아이와 열 달을 탯줄로 한 몸을 이뤄 내가 먹는 것을 그대로 받아먹고, 내가 생각하고 말하는 대로 태중에서 반응했을 아이에 대한 소유욕은 엄마에게 솟아남이 당연하다. 엄마가 누릴 수 있는 당연한 권리라고 주장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런 마음에 아이를 향해 통제력을 발휘해서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당당하게 이끌어가는 것이 엄마들의 특권이자 책임 아니겠는가.  


나 또한 누구보다 강력한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인지라 그 대열에 가장 앞장설 수 있다. 그러나 아이보다 앞서 나의 통제력을 발휘했을 때 기대에 못 미쳐 실망이 더 커지고 그와 비례해서 아이를 더 강력하게 통제하고 싶은 욕구가 솟아오른다. 나 자신조차 내 의지를 관철하여 지속하는 것이 힘들 진대, 아이를 그렇게 이끌고자 하는 것은 상대를 무력하게 만들어 의지를 상실한 나의 꼭두각시로 만들고자 함과 다름없다. 이 얼마나 위험한가. 그럼에도 엄마들은 멈추는 것이 쉽지 않다. 통제를 멈추고 아이를 타인으로 대했을 때, 그 자유를 허락받은 아이들이 어떻게 자랄 것인가 두렵기 때문이다. 경계만을 정해주고 그 울타리 안에서 자유롭게 고유의 존재를 형성해 가길 바라지만 우리의 시선과 욕망은 아이를 옴짝달싹 못 하도록 내 품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경계를 넓히고 좁히는 일을 수도 없이 반복하는 것이 육아의 시행착오가 아닐지 싶다. 다만 지금 엄마로서 좌표가 어디인지 볼 수 있는 메타인지를 갖고 있다면 아이를 나와 가장 친밀한 타인으로 대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



매일 아침마다 글을 쓰면서 아이에게 긋고 있는 선이 어디쯤인지 확인한다. 분명 드넓고 광활한 대지 위에 선을 그어줬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좁아져 아이 방보다 작게 선을 긋고 그 안에서 공부하는 것만이 아이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인 양 대하고 있음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때는 서둘러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금 펜스를 넓은 대지로 가지고 나와야 한다.


날마다 글을 쓰면서 아이에게 무한히 뻗고자 하는 나의 통제력을 인지하고 그것을 절제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발버둥 친다. 그럼에도 나는 날마다 실패를 반복한다.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내 뜻대로 하지 않은 그 무엇을 향해 날 샌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글의 한계를 이토록 처절하게 절감할 때가 있을까. 글이 내 삶을 넘어설 수 없다는 절망에 매일 글 쓰는 일이 무력해지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다. 차라리 글을 쓰지 않았다면 자책하는 마음이라도 덜고 아이에게 마음껏 나의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도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이 꼭 제 발등을 찍은 것만 같다.




진정 글은 삶을 넘어설 수 없을까.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어쩌면 내 몫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을 넘고 있는 중에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스스로 깨달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쓰는 글이 나의 삶으로 조금씩 치환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은 아이들을 통해서다. 나의 말과 행동이 거울처럼 아이들을 통해 비칠 때가 있다. 거울 속 내 모습은 인정하기 싫은 초췌하고 부끄러운 모습일 때가 있지만, 때로는 거울 속 내 모습을 가만히 어루만져 주고 싶을 만큼 귀하고 고마울 때가 있다. 아이들을 통해 나의 삶을 보게 된다. 두 아이는 엄마인 나를 자랑스럽다 하고 따라 하고 싶은 롤모델이라 말해주기도 한다.


큰아이의 편지 중…
둘째 아이의 편지 중…



가장 찬란한 꿈을 꿨던 20대, 간절하게 꿈꾸던 것이 있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활자로 써놓으니 민망하기 이를 데 없는 워딩이지만 당시에 난 진정한 믿음과 열정으로 그렇게 꿈꿨다.


40대가 된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기는커녕 내 마음 하나도 제대로 바꾸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무시로 깨닫는다. 비록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인물은 되지 못했지만, 나의 눈빛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가슴으로 품어줄 때 완전한 평온함을 얻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 두 아이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한 사람. 엄마란 이름으로 강력한 힘을 지닌 사람이 됐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잘은 모르지만 분명 두 아이의 세상에서 엄마로서 나는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두 아이가 살아갈 세계가 엄마인 나로 인해 살아봄 직한 근사한 곳이라고 느끼게 해 줄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조금은 동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글이 삶을 넘어서기 힘들지만, 분명 넘어서는 순간도 존재한다. 그 순간을 꿈꾸며 엄마지만 포기하지 않고 글을 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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