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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피 Dec 08. 2020

집 계약 날, 방 4개를 다시 봤다

[집구하기편 #4] 이틀 만에 방 21개를 보면 생기는 일

방이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 입주 날만 기다린 나는 금요일 오후 1시 즈음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보위 공유 오피스텔을 찾았다. 보증금과 월세를 알리페이로 내야 하니 지인분께 현금을 드리고 알리페이로 이체받아 잔액도 두둑하게 채워갔다.

이제 내 집이다!!

1층 카운터에 입주 계약을 하러 왔다고 말하니 여권부터 달란다. 컴퓨터로 작업하던 직원분이 말한다.


“이메일 주소와 긴급 연락처 이름 및 중국 국내전화번호 주세요. 친구여도 됩니다.”


그리고는 나보고 보위 앱을 열어 ‘계약(合同)’ 메뉴를 보란다. 음? 그런데 비어있다.


“아, 지난번에 예약할 때 다른 휴대폰 번호 써서 그런가 봐요. 다시 로그인해볼게요.”


그런데 로그인하려니 해당 핸드폰 번호로 발송된 인증 번호를 넣어야 한다.


“제가 지난번 번호랑 연결된 핸드폰을 호텔에 두고 와서요. 혹시 시스템에서 입주 핸드폰 번호를 변경할 수 있나요?”


직원분은 한 번 해보겠다며 이리저리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본다.


“음, 변경이 안 되네요. 계약은 저녁에 와서 해도 되니까 일단 방부터 들어가시죠. 출입문 비밀번호는 위챗으로 보냈어요.”


그러면서 입주 선물이라며 입주 키트와 에어컨 리모컨, 엘리베이터 카드를 준다. 랄랄라, 드디어 내 공간이 생기는구나.


그렇게 문을 벌컥.

역시나 이 공간감...!

그런데, 이건 뭐지? 분명 측면 공사장이랑 조금 먼 호수를 택했는데. 순간 차가운 방바닥을 딛고 있는 발바닥이 더 차가워지는 느낌.


캐리어는 현관문에 두고 창문으로 얼른 달려갔다.

내 눈에는 왜 유유자적 초록 하천과 빨간 지붕 주택만 보였던가

아불싸, 이게 뭔가. 방 앞이 공사장이었나? 난 이걸 왜 지난번에 못 봤지? 그렇게 방 안에서는 공사 소리가 명랑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창문을 닫아도, 두꺼운 커튼을 닫아도 야속하게 소리가 내 귀를 파고든다.


망연자실. 공사 구역은 3군데. 이러면 청소 도구 가지고 온 게 의미가 없잖아.


이틀 만에 방 21개를 보면 사람 판단력이 이렇게 흐려지나? 아니면 내 뇌가 원래 이렇게 흐리멍텅한가. 방 구조가 너무 맘에 들어 앞뒤 따지지 않고 예약금을 건 것이 패착이었다. 일부러 호텔까지 20분을 걸어가 저 현장을 다 지나갔는데도 신이 난 내 머리는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1층으로 내려가 직원에게 물어보니 작년 여름부터 지하철 공사를 시작했고, 본인들은 이미 익숙하단다. 그럴 수밖에. 1층 카운터는 북쪽으로 문이 나있어서 잘 안 들리거든. 남향 방이 문제인 거다. 보통 아침 10시부터 시작해서 저녁 6시에 끝난다는데, 문제는 주말도 그렇다는 점. 그리고 언제 공사가 끝날지 직원들도 모른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공사 소리가 생각보다 심한데, 혹시 입주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줄 수 있나요?”

“얼마나 시간이 필요해요?”

“다음 주 수요일까지 될까요?”

“우리도 방 비워두는 비용이 있어서 월요일까지요.”

“네, 감사합니다.”


눈치 보이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허허. 다시 방에 올라가서 캐리어를 모두 끌고 내려왔다. 입주 키트는 열어보지도 않고 신발장 위에 올려두었다. 일단 내가 바로 해야 할 건 집 다시 찾기. 워아이워지아(我爱我家) 중개인분에게 지금 나와있는 매물을 다시 소개해달라고 연락했다. 그전에 본 러후 공유 오피스텔에도 빈 방 있냐고 메시지를 남겼다.


다행히 중개인분이 바로 메시지를 봤고, 지금 바로 보러 갈 수 있다며 30분 후에 만나자고 했다. 나도 바로 오케이하고 디디추싱을 불렀다.


그런데 그 날따라 재수가 옴 붙었는지 디디추싱이 정말 안 잡힌다. 무거운 캐리어 2개를 끌고 큰길까지 나왔는데도 안 잡힌다. 내 계정에 뭔가 문제가 생겼나 보다. 디디추싱은 포기하고 일반 택시를 잡으려는데도 너무 안 잡힌다. 그렇게 40분 동안 발을 동동 구른 후에야 택시를 잡아 약속 장소로 갈 수 있었다. 중개인분에게는 거듭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1. 건물 E

1) 스물두 번째 방

가격: 적당

위치: 좋음

공과금: 적당

주변에서 추천해준 단지(小区)에 오늘 나온 남향 매물이 있다고 해서 제일 먼저 보러 갔다.

동남향 50m2

근데 아무리 그래도 인테리어 이건 좀 아니지 않니. 벌건 TV장에 시야를 가리는 침대 기둥까지. 남향 방이니까 웬만하면 해야지라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방을 보니 여기 살면 너무 우울할 것 같다. 면적 50m2라는데 53m2인 보위 오피스텔에 비해 실평수는 엄청 적어 보인다.


2) 스물세 번째 방

세탁기 위치가 왜 이러니. 북향이라 할 생각도 없었지만 인테리어도 애매하다. 중국은 방 인테리어를 주인이 하다 보니 같은 건물도 방마다 정말 느낌이 다르다. 내 돈 주고 가구를 새로 산다 해도 기존 가구를 버리지 말라며 허락해주지 않는 주인이 대다수.

북향 50m2


2. 건물 F

가격: 적당

위치: 매우 좋음

공과금: 안 물어봄

주변에서 추천해준 또 다른 단지인데 북향밖에 매물이 없지만 보러 갔다.


3) 스물네 번째 방

그런데, 와 너무 좁은 느낌. 옷 수납할 데가 없다. 침대가 벽이랑 딱 붙어 거의 한 몸 수준. 남향 방은 면적이 더 크다는데 남향 매물은 정말 잘 안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공과금도 안 물어보고 뒤돌아 나왔다.

북향 39m2


아, 이제 어쩌나... 한순간 길거리에 내 앉은 느낌.


중개인분이 단지 워아이워지아 사무실에 잠깐 들리자고 해서 사무실로 향했다. 러후 공유 오피스텔에서도 연락이 왔는데, 다음 주 목요일 즈음에 남향 방이 나올 수도 있단다. 영상도 같이 보내줬는데 여전히 좁은 느낌. 뭐 어쩌겠나. 방이 없으면 여기라도 가야지. 그렇지만 미정이다 보니 안심이 안 된다.


중개인분이 사무실 컴퓨터로 사진 하나를 보여준다. 넓은 방을 원하면 이런 방도 있는데 가보겠느냐고. 대신 북향이고 위치가 좀 멀다. 그래도 찬물, 더운물 가릴 때냐. 방은 봐야지.

일단 크기는 괜찮아 보인다


3. 건물 G

가격: 안 물어봄

위치: 나쁨

공과금: 안 물어봄


4) 스물다섯 번째 방

방문을 열자마자 여긴 아니라는 느낌이 왔다. 북향이라 그런지 싸한 느낌부터 들고 공간 활용을 잘해서 63m2가 아니라 중간이 텅 비어서 63m2인거다. 침대 매트리스도 푹 꺼진 게 영 맘에 안 든다. 가격, 공과금 물어봐서 뭐하니. 그냥 문 닫고 나왔다.

북향 63m2


중개인분에게 내가 원래 입주하려던 방 영상을 보여주며, 이런 느낌의 방은 없냐고 물어봤다.

“공유 오피스텔이니 구조가 모두 똑같아서 그런 방이 있는 거예요. 일반 오피스텔에선 그런 방 못 찾을 거예요.”

“그렇군요. 첫 번째 방 할지 말지 내일까지 말씀드릴게요.”

“주말이라 방 보러 오는 사람이 많아 금방 빠질 거예요. 내일 10시에 또 고객분이 오시니 아침 일찍 이야기해줘요.”

“네, 감사합니다.”


하아... 내가 눈이 높은 건가. 난 정말 보통 눈의 사람인데. 타지 생활에서 편히 쉴 곳은 집뿐이니 맘에 드는 방을 원할 뿐인데. 캐리어 2개를 다시 낑낑대며 호텔로 들고 갔다.


휴우. 한숨이 절로 나오는데 그래도 내가 할 일이 또 있지. 원래 입주하려던 보위 오피스텔에 가서 평일 공사가 몇 시에 끝나는지 보기. 맘에 드는 방이 안 나오면 방음 커튼을 달 든 해서 참고 살까도 싶어서. 첫날 방 볼 때는 소리 안 났단 말이야. 흑흑.


5시 반이 넘어 다시 보위 오피스텔로 향했다.


“미안하지만 방에서 공사 소리 들어봐도 될까요?”

“오케이.”


이제는 얼굴 보기도 민망한 카운터 직원들에게 물어보고 방으로 올라갔다. 얼마나 진상이라 생각하겠어. 한국인 이름 먹칠은 내가 다했다 정말.


어두컴컴한 방문을 여는데, 참 서럽다. 판단을 잘못 한 내 탓인 걸 어쩌겠어.

아늑해보였던 방이 차갑다

오늘 공사는 끝났는지 고요하다. 평일이야 어차피 6시 이후에 들어올 테니 큰 상관없겠지만 관건은 주말. 내일 토요일이니까 또다시 와봐야지.


혹시 여기 살 수도 있다는 마음에 방을 점검했다. 냉장고가 냉동실이 따로 없어서 막상 살 때 불편할 거 같다. 드레스룸은 마감이 엉망이다. 글루건으로 다시 붙여야 할 판. 서랍은 손잡이가 있었다 없어진 흔적이 있다? 방충망도 고장. 주방 서랍 문도 나사가 헐거워서 다시 조여야 한다. 처음 방 볼 때는 이런 게 눈에 안 들어올 만큼 너무 방이 맘에 들었나 보다. 차갑게 식은 마음에 이제 디테일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진짜 살거면 고치면 되긴 하지만. 허허.

중국 1위 부동산 회사 드레스룸 마감이 이 정도면 다른 데는 어떨까?

알고 보니 내가 고른 층은 심지어 최상층. 옥상 정원에 바로 올라갈 수 있어 편하다고만 생각했지 꼭대기층은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더울 거란 생각을 못했다. 지난주에 남아 있었던 남향 다른 층은 이미 나갔단다. 그래도 방이 계속 나가는 건 살만 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 라고 스스로 희망고문을 했다.


근처 쇼핑몰이 있어 밥이나 먹을 겸 들어갔다가 마트까지 둘러봤다.

허마밖에 몰랐던 나에게 디몰(多点)이라는 이름이 새겨졌다. 키오스크 결제하려면 무조건 앱 다운받아야 함

길 건너편에 이렇게 큰 마트라니. 진짜 공사장 소리만 빼면 다 최적인데!!!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니 벌써 저녁 7시 반. 보위 건물을 쳐다봤다. 모두 남향 방 불빛인데 꽤 많이 켜져 있다. 이 동네는 퇴근이 늦으니까 이 정도면 입주객이 많은 건데. 진짜 살만하니 다들 지내고 있는 거 아닐까? 진짜 싫으면 보증금 포기하고 나가지 않았을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

괜시리 불빛에 희망을 가져 본다


마음을 다잡고 호텔로 돌아가 다시 리엔지아(链家) 앱에서 폭풍 검색을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단지 매물로 각각 오전 11시 반, 오후 1시에 약속을 잡았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주 핸드폰에서 예약 걸 때 사용한 번호와 다른 번호를 사용하고 있어서 계약 전에 공사장 소리를 미리 알아차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계약 이후에 취소하면 월세 1개월치 보증금은 그냥 날리는 거니까. 통신사 영업점과 커뮤니케이션 오류가 생겨 그 날 세컨드 핸드폰 번호가 먼저 나온 것이 정말 천만다행.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쓰린 마음을 안고 잠을 청했다.


[집구하기편 #1] 랜선 매물 탐방
[집구하기편 #2] 현장 1일 차​ - 일반 오피스텔
[집구하기편 #3] 현장 2일 차 - 공유 오피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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