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reath in Mar 03. 2019

케이프타운: 겨울 아프리카를 만나다

완전히 새로운 대륙, 새로운 마음

20170801~20170803: Cape Town, South Africa


모든 것은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퇴사도 그랬고, 남미 여행도 그랬다. ‘퇴사하고 남미 여행’이란 게 어느 정도 숙성된 고민 끝에 나온 낭만이었던 데 비해 아프리카 여행만큼은 정말 충동적으로 결정했다. 2017년 6월 6일 오전 백석 교보문고에 아프리카 여행 책이 단 한 권도 남아있지 않으니 오기가 생긴다는 이유로.


결정을 내리고 보니 그럴싸한 선택 같았다. 아프리카를 언젠가 가야 한다면 남미에서 건너가는 편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파울루에서 케이프타운으로 넘어가는 비행기 티켓 값도 쌌다. 표를 사긴 했는데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한 마음으로 검색을 해 보니 나오는 게 ‘트럭킹’이라는 거였다. 개조한 차량을 타고 구간을 골라 돌아보는 일종의 패키지여행상품이라고 했다. ‘패키지’라니 마뜩잖았지만 현충일이 끝나기 전에 ‘퇴사 계획’을 마무리해야 했다. 자유여행 정보를 찾을 시간은 부족했고, 일정 맞는 트럭킹은 딱 한 자리가 남아있었다. 신의 계시 같았다.


구름 짙게 낀 워터프론트. 노란 프레임 안으로 테이블마운틴이 보여야 한다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유럽 같아서 감흥은 없는 곳이었다. 20170801, 케이프타운, 남아공


춥고 습한 아프리카


그런 이유로 아프리카 여행은 트럭킹 투어의 베이스캠프인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서 시작됐다. 아프리카라는 대륙은 완전히 처음이었다. 아프리카 여행이라니 괜히 여러 가지가 어려울 것 같고 쉬어가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케이프타운에서는 맛있는 거 먹고 그저 쉬다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제는 화창한 날씨였다. 그러나 케이프타운의 하늘에선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화들짝 놀랄 만큼의 천둥번개까지 요란하게 쳐댔다. 한기에 오들오들 몸이 떨렸다. 한겨울의 아프리카란 이런 거구나 싶었다. 아프리카라는 대륙과 영 어울리지 않았지만 오랜만의 비라서, 또 비가 와서 추운 아프리카라니 어쩐지 엉뚱해서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시내 광장에서 열리던 장터. 여기서 코끼리 바지 샀는데 바가지썼다. 여기 파는 물건은 아프리카 전역에서 팔고, 여기가 제일 비쌌다. 20170802, 케이프타운, 남아공


비는 계획에 작은 차질을 주었다. 일단 케이프타운 시내라면 그 어디에서도 보인다던 테이블마운틴이 짙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케이프타운에서 출발해 희망봉까지 쭉 돌아보는 펜인술라 일일투어도 날씨 문제로 엎어졌다. 다행히 시티투어 반나절 코스를 찾을 수 있었다. 반나절인데도 가격이 일일투어와 다르지 않았고 여러 코스가 빠져있었지만, 그렇게라도 희망봉은 봐야겠다는 생각에 투어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는 나와 백금발이 아름다운 LA 출신 아주머니밖에 없었다. 친절하고 상냥한 가이드와 기품 있는 아주머니 덕에 개인 투어처럼 편하고 화기애애하게 다닐 수 있었다. 묵직한 구름이 드리웠다 걷혔다 하는 해변은 장엄했고,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비에 젖은 길을 다니는 바분들을 봤고, 비둘기처럼 무리 지어 있는 펭귄도 봤다. 갑옷처럼 안개를 두른 희망봉은 또 그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계획대로 된 것이 없었으나, 그냥 그대로 참 좋아서 감사했다.


서퍼들의 천국이라는 해변. 왜 전 세계의 부호들이 여기 집을 두는지 알 것 같은 경치였다. 유유자적하던 무섭고 큰 새들. 안개에 가려진 등대. 20170802, 케이프타운, 남아공


지금, 여기, 같이


사실 아프리카에 대한 준비를 거의 하나도 하지 못했다. 남미 여행에 심취해서 상대적으로 무심하기도 했고, 패키지 투어라니까 안일해졌다. 그러다 나미비아에 가려면 비자가 필요하다는 걸 뒤늦게 알고 버둥거리느라 고생을 좀 했다. 그제야 아프리카 여행 오픈채팅방에도 들어갔다.


케이프타운으로 가는 날을 하루 앞두고 다시 걱정이 늘어나 오픈채팅방에 노파심을 한껏 자랑하는데, 나와 같은 회사에서 같은 일정으로 트럭킹을 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H였다. 갑자기 한줄기 구원의 빛이 내리쬐는 것 같았다. 너무 반가워서 숙소에 누워있다가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막상 20여 일을 생판 모르는 외국인들과 헤어지지도 못하고 내내 함께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니 왠지 외로울 것 같아 초조했었다. H의 존재는 큰 위안이 됐다. 이미 케이프타운에 있다는 그의 조언 덕분에 브라질을 떠나기 전에 채비도 할 수 있었다.


길고양이처럼 도처에 즐비하던 바분. 갈라파고스에서 너무 많이 봐소 심드렁했던 물개. 참새나 비둘기라도 되는 것처럼 노닐던 펭귄들. 20170802, 케이프타운, 남아공


비가 그치고 해가 구름 뒤로 넘어간 저녁, 워터프런트에서 H를 처음 만났다. 빡빡 깎은 머리가 조금은 무서웠지만 눈빛은 소처럼 선했다. H는 신념이 확고하고 어른스러운 친구였다. 서로의 지난 여행과 지난 삶에 대해 두런두런 얘기하는 동안 비바람에 얼어붙은 몸이 녹았다. 마음도 편안해졌다. 여행에도 일가견이 있는 듯해 든든했다. 살면서 어쩌면 결코 마주치지 못했을 수도 있는 사람과, 같은 때에 같은 곳을 여행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친구가 되는 것은 매번 경이롭게 느껴진다. 그날 저녁도 그랬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캐리어에 한가득 있던 짐을 더플백으로 줄여 담는 대대적인 작업을 했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 족히 네 시간을 낑낑거렸다. 그런 나를 보고 옆 침대를 쓰던 호주 할머니는 말했다.

“가벼워지는 일이 참 어렵지? 시간이 지나면 오늘 네가 여기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조차 기억나지 않을 것들인데 말이야.”


실제로 그랬다. 그날 밤 캐리어와 함께 뭘 버렸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놓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것들이 삶으로부터 빠져나간 뒤에도 나는 언제나 걱정보다 더 멀쩡하다. 언제 그게 필요했었는지, 왜 그렇게 애달파했는지도 가물가물해질 정도로 사실 별 게 아닌 것들이 태반이다. 희미한 그 어떤 것들을 버려낸 만큼, 몸도 마음도 조금 가뿐해진 상태로 나의 아프리카 여행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케이프타운을 떠나는 마지막 날 새벽에야 얼굴을 보여주던 테이블마운틴. 정말 문지른 원목 테이블마냥 반듯해서 신기했다. 20170803, 케이프타운, 남아공



#소소한 여행 팁

1. 이용한 트럭킹 회사는 Nomad Africa. 트럭킹 업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체계적인 곳이라는 후기를 어디에선가 봤다. (https://nomadtours.co.za/)

2. 하지만 사실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8월 한 달짜리 코스를 찾고 있었는데 8월 내에 출발하는 트럭킹 자리는 노매드와 또 다른 여행사 두 곳을 합쳐 딱 두어 자리뿐이었다. 6월 6일 기준이다.

3. 트럭킹은 우선 코스를 고르고 나면 숙박 형태를 캠핑(텐트에서 잠)과 롯지(나름의 숙소에서 잠) 중에서 고를 수 있는데, 내가 예약할 당시엔 캠핑은 매진, 롯지도 딱 한 자리 남은 상황이었다. 나중에 같은 일정, 같은 코스 캠핑을 예약한 Y와 L에게 물어보니 4월에 문을 닫고 예약했다고 하더라.

4. 펜인술라 투어는 숙소에서 알선해주는 곳을 가는 게 가장 손쉬운 방법인 것 같다. 시내를 돌아보고 싶다면 매일 같은 시간 출발하는 빨간 시티 투어 버스를 타는 것도 방법이다.


이전 18화 상파울루: 다시 떠나기 위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