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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eath in Mar 17. 2019

세더버그: 또 다른 여정의 시작

크리스 가족이 꾸려졌다

20170803: Cederberg, South Africa


새 여행이 시작되는 날. 딱 세 시간을 잤다. 길을 나서는 나의 어깨와 양 팔에는 곧 터질 것 같은 백팩과 더플백, 라지 사이즈 롱샴 숄더백, 커다란 비닐봉지, 작은 크로스백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목에는 그 모든 가방 어디에도 끝내 욱여넣지 못한 목베개가 걸렸다. 숙소에서부터 트럭킹이 시작되는 여행사까지 동도 트지 않은 케이프타운 골목을 걸어가는 10분은 꼭 지옥의 행군 같았다. 여행사를 코앞에 두고 만난 H는 내 짐을 보고 기겁을 했다.


크리스의 사람들,

The Chrisaders


북적이는 여행사 사무실 안에 동양인은 H와 나 둘 뿐이었다. H의 존재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직원이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전해줬다. 한창 성수기여서 롯지에 묵는 사람들과 캠퍼들이 다른 차를 타고 이동한다는 거였다. 중간중간 계속 만날 거고, 롯지와 캠핑장이 같이 있는 날이 더 많으니까 걱정 말라고 했지만 간신히 찾은 동행과 생이별이라니 착잡했다. 캠핑을 하고 싶었지만 자리가 없어서 가격이 훨씬 비싼 롯지를 택한 것이었기에 서운함이 더 컸다. 그렇게 나는 크리스(Chris), H는 오티스(Ottis)에 몸을 싣게 됐다.


우리의 크리스 베이비. 장을 본 물건을 정리하는 에일린과 타케이, 노먼. 사실 크리스는 트럭도 버스도 아닌 형태의 차다. 20170803, 케이프타운, 남아공


등록을 하고 모닝커피를 마시는 동안 서서히 동이 텄다. 크리스 앞으로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노부부들이 있었고, 젊은 연인이 있었다. 혼자 온 건 정녕 나뿐인가 싶어 한껏 긴장이 됐다. 하루 이틀도, 일주일도 아니고 20일이나 함께해야 할 낯선 사람들과의 첫 만남이 마냥 편할리는 없었다. 그때 초록색 눈에 풍성한 곱슬머리를 한 여자애가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안녕! 너구나 한국인이! 너무 반가워. 명단에 한국인 있는 걸 보고 신이 나서 달려왔어! 나는 프란체스카라고 해.”


그녀는 피렌체에서 의대에 다니는 이탈리안, K-Pop과 드라마에 죽고 못 사는 소녀 팬이었다. 페루 리마 거리에 걸려 있던 방탄소년단 포스터, 볼리비아 코파카바나에서 연예인이라도 본 것처럼 사진을 찍어달라고 조르던 사람들의 얼굴이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한류 덕분에 아프리카 여행의 짝꿍이 생기다니.


혼자 온 여행자는 나와 프란체스카,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잠비아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왔다는 영국인 소녀 카야까지 셋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삼삼오오 함께였다. 암스테르담 출신인 안케와 존 커플은 결혼을 앞두고 여행을 왔다. 역시 암스테르담에서 온 앨런. 싱어송라이터라는 그녀가 가족이라고 소개한 일행은 전 남자친구의 어머니인 리아, 전 남자친구의 여동생인 웬디였다. 인상 좋은 부부 리지와 루, 평생지기라는 마고와 펠리스는 모두 새하얀 백발이 멋진 호주 사람들이었고, 바바라와 조세프는 밀라노에서 온 노부부였다. 여기에 운전을 맡아 줄 보츠와나 청년 티케이, 짐바브웨 출신 가이드 노먼, 남아공 출신 인턴 가이드인 에일린까지 총 열일곱 명이 크리스와 같이 갈 가족들이었다.



5627km, 20일 동안의 약속


가장 먼저 할 일은 케이프타운 외곽의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보는 거였다. 티케이, 노먼, 에일린이 열일곱 식구가 당분간 먹을 식량을 준비하는 동안 우리는 제각기 긴 여행의 심심함을 달래줄 간식과 미처 챙기지 못한 생필품을 샀다. 식량으로 가득 찬 크리스가 다시 도로 위에 올랐다. 첫 번째 목적지는 웨스턴 케이프 인근의 와이너리였다. 고즈넉한 와이너리에서 풍미가 좋은 치즈와 와인을 여섯 종씩 맛봤다. 긴장은 완전히 풀렸다. 아침 일찍 장을 함께 보고 점심 식사도 하기 전에 와인을 함께 마시니까 낯설던 일행들이 한결 편하게 느껴졌다.


와이너리에서 이것저것 맛보기 직전. 특히 치즈들이 너무 맛있어서 하마터면 잔뜩 살뻔했다. 점심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길가의 나무 그늘에서 자리잡은 식구들. 20170803


와이너리를 벗어나 조금 달리자 금세 창의 양쪽 바깥은 자연으로 가득해졌다. 가는 동안 노먼이 앞으로 크리스 가족이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선 노먼은 우리가 식사 준비와 뒷정리를 함께하는 ‘크리스 가족(Chris Family)’이며,  크리스는 다 같이 소중히 돌봐야 할 ‘우리 아가(our baby)’라고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말했다. 절대 크리스를 ‘트럭’이나 ‘차’로 부르지 말라고도 했다. 또 휴게소 하나 없는 비포장도로를 온종일 달리는 일이 잦으니 화장실이 가고 싶을 땐 주문을 외워야 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길가에 풀숲이 보인다면 부쉬 부쉬(bush bush), 바위들이 보인다면 롸키 롸키(rocky rocky)! 처음엔 수줍겠지만 곧 익숙해질 거라고 노먼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저기서 키득키득 웃음이 터졌다.  


세더버그로 가는 길. 창밖의 초록이 여기가 아프리카임을 잠시 잊게 했다. 20170803, 케이프타운, 남아공


몇 시간을 달리다 선 우리는 야생의 도로 한쪽에 차를 세우고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고, 멋쩍게 첫 부쉬부쉬를 했다. 달리는 길은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이동욱, 지창욱, 박보검 등 내 고국의 미남 배우들과 그들의 작품에 대해 프란체스카와 열띤 토론을 벌였다. 프란체스카는 보석 같은 눈을 반짝이며 나도 안 본 한국 드라마에 대해 재잘재잘 쉼 없이 이야기했고, 이따금씩 서툰 한국어로 제법 그럴싸한 문장을 구사했다. 수다를 떠는 동안 시간은 뚝딱뚝딱 흘러 첫날밤을 묵을 세더버그의 오렌지 농장에 도착했다.


캠핑장과 숙소가 함께 있는 곳이라더니 입구에 들어서자 바로 오티스가 보였다. 오티스에는 H 말고도 한국인이 더 있었다. Y와 L이었다. 수년 전 유럽 여행을 같이 했던 인연으로 또 함께 여행을 왔다고 했다. 둘의 선한 눈매가 꼭 남매처럼 닮아 귀여웠다. 그 먼 땅에서 우리는 모국어가 같아서, 또 얼추 또래라는 이유로 금방 가까워졌다. 그리고 여행 내내 서로 큰 의지가 되었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중간중간 H, Y, L을 만날 때마다 이산가족 상봉하듯 반가운 마음을 나는 어쩌지 못했다.


우리는 오렌지 농장을 돌아보고 뷔페식 저녁으로 배를 채웠다. 세더버그 지역의 자랑이라는 루이보스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동안 밤은 새카맣게 깊어져 갔다. 이 사람들과 함께 달릴 20일이 행복하고 특별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오렌지 농장 한가운데서 보내는 남아공에서의 마지막 밤이었고, 아주 충만한 첫날의 끝이었다.


세더버그 숙소의 오렌지나무와 오렌지밭. 산책하기 좋은 길이었다. 20170803, 세더버그, 남아공




#소소한 여행팁

1. 케이프타운 마트에서 5리터들이 물 여러 개를 사고, 개인용 물병이 없다면 하나 사자. 이 큰 물병이 당분간 계속 먹을 식수가 된다.

2. 과자도 충분히 사자. 입이 너무너무 심심해진다.

3. 트럭킹 차량 안에는 작은 냉장고가 있긴 한데, 공용 식량들을 위한 것이다. 냉장이 필요한 간식은 피하는 게 좋다. 물통은 뒷문 쪽의 개인 사물함에 보관하게 된다.

4. 와이너리에서 당분간 저녁 시간을 즐길 만한 와인을 사는 것을 추천한다. 매번 레스토랑에 가는 것도 아닐뿐더러 밤이 길고 심심하다. 당시엔 거기까지 생각을 못해서 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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