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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eath in Mar 24. 2019

오렌지강/피시리버캐니언: 황량함의 색채

오렌지도 물고기도 없이

20170804~20170805: Gariep(Orange) River – Fish River Canyon, Namibia


달이 휘영청 밝은 어스름, 먼 곳에서 해가 차츰 떠올랐다. 티케이는 크리스에 시동을 걸었다. 온종일 달려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벗어나고 나미비아로 들어가는 날이었다. 지겨울 만하면 멈춰 서서 바람을 쐬거나 점심을 만들어 먹고, 수다를 떨다가 자다 깨다를 반복하니 시간이 금방 흘렀다.


세더버그의 여명, 부쉬부쉬중인 크리스 식구들, 나미비아의 국가 나무인 알로에 디코토마. 20170804, 나미비아


한밤의 사투


시간은 늦지 않았으나 이미 해가 진 뒤에야 숙소에 도착했다. 그저 크리스 안에 앉아서 달려오기만 했을 뿐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바깥은 황량한 사막이어서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산책을 단념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캐티야, 프란체스카와 모닥불에 둘러앉아 영국, 이탈리아, 한국의 교육 제도와 사회 문제에 대한 격론을 벌였는데도 잘 시간은 쉬이 찾아오지 않았다.


마침내 단잠을 청하기 위해 숙소로 돌아와 불을 켰을 때, 뭔가 잘못됐다는 걸 단번에 알았다. 하얀 벽면 곳곳에 모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잠시 의욕과 정신을 모두 잃을 뻔했다. 젊은 나이에 퇴사하고 여행 왔다가 아프리카를 제대로 보기도 전에 말라리아에 걸려 죽는 인생은 너무나도 가엾지 않겠는가. 여행에 필요한 예방접종은 다 맞았고 나미비아는 말라리아 위험 지역도 아니었지만 거장의 점묘화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저기 포진한 모기떼는 안전해 보이지가 않았다.


마음을 다잡고 사냥을 시작했다. 작은 책자 하나를 들고 눈에 보이는 대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벽과 바닥과 천장의 경계, 가구와 창문과 소품들 위에 이르기까지. 내가 지나간 곳마다 모기들의 시체가 우수수 떨어졌다. 2시간 반 정도를 모기 잡는 데만 열중했다. 그토록 단순하고 섬세한 일에 오랜 시간 몰두한 적이 전에 없었다. 책자가 너덜너덜해져서 도구를 몇 번 바꿨다. 그때마다 피가 묻지 않았나 살펴봤는데 다행히 핏자국은 없었다. 아직 한 번도 물리지 않았다는 얘기다. 안도감이 들었고, 굶은 채로 맞아 죽은 모기들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더 이상 몸을 움직일 기운이 없게 되었을 때 샤워를 했다. 온몸에 모기기피제를 들이부은 뒤에야 침낭을 갑옷 삼아 잠을 청했다. 사는 동안 죽인 모든 것보다 그날 밤에 죽인 모기들이 더 많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대학살의 밤이었다. 이날 이후로는 아프리카 여행이 끝날 때까지 모기가 보여도 더 이상 죽이지 않았다.


오렌지강의 카누들. 존과 얀케 커플. 내 시야에서 보이는 뱃머리. 수영하기엔 추운 날씨인데다 물도 안 깨끗한데 네덜란드 애들이 훌렁훌렁 벗더니 입수했다. 20170805, 나미비아


격렬한 평화


아침이 됐지만 사냥에 시달린 육체의 피로는 가시지 않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반나절 내내 오렌지강에서 카누를 타야 할 위기였다. 카누는 처음이라 긴장이 많이 됐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내게 노 젓는 재능은 없었다. 손끝부터 양 팔과 어깨, 옆구리에 이르기까지 온몸이 쑤셨다. 나는 분명 배 위에서 노를 저었는데 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강물로 흠뻑 젖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 시간쯤 지나자 어정쩡하게나마 노젓기에 익숙해졌다. 다른 배들과 경쟁을 하거나 물을 튀기며 장난을 칠 만큼 여유가 생겼다. 그제야 주변을 돌아볼 겨를도 생겼다. 오렌지강에서 카누를 탄다고 하길래 주변에 오렌지 나무라도 있나 했는데 그런 건 아니었다. 네덜란드 왕실 이름을 따라 명명된 거라고 했다. 별로 깨끗한 강도 아니었다. 사방이 온통 황폐한데 강이 이토록 유유히 흐르고 있다는 것만이 놀라웠다.


아침저녁의 추위가 다른 세상의 일로 느껴질 만큼 볕은 강렬했다.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찰랑이는 물 위로 신기하게 생긴 새들이 날아다녔다. 내내 물결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평온하다가 이따금씩 나타나는 급류 아닌 급류도 신기했다. 엘렌과 캐티야는 오래된 팝송들을 멋들어지게 불렀다.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오직 그녀들의 청아한 목소리와 찰박찰박 노에 와 닿는 강물만이 소리를 냈다. 몸이 부서질 것 같았지만, 마음에는 더없는 평화가 찾아왔다.


지나온 길의 풍경들과, 지도 위의 색. 20170804~05, 나미비아


예쁘면 슬퍼


엊그제 세더버그를 출발할 때만 해도 길의 양 옆에서 초록색 풀이 나풀거렸는데 한낮에는 황토가 흩날리는 벌판을 달렸다. 크리스의 양 옆에선 어느덧 새빨간 흙이 저무는 태양을 받아 타오르고 있었다. 황량함의 색채도 제각각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창밖의 풍경이 그렇게라도 변하지 않았더라면 영원의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었을 거다. 역설적이게도 구글 지도에는 종일 달려온 여러 빛깔의 허허벌판이 모두 녹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일몰을 보기 위해 도착한 곳은 피시리버캐니언. 세계에서 2번째로 크고, 아프리카에서는 제일 큰 협곡이라고 했다. 노을이 스며든 협곡의 바위들이 빨갛게 이글거렸다. 딛고 선 벼랑 아래는 까마득했다. 계곡 사이를 내려다보니 물줄기의 흔적이 희미했다. 오렌지강에는 오렌지가 없었고 피시리버캐니언에는 물고기도 강도 없었다. 어쩐지 공허하고 쓸쓸했다.


협곡 위의 노을을 만끽하다. 20170805, 나미비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해가 계곡 저편으로 달아나듯 저물었다. 지형 때문에 마치 다른 행성에서 지는 태양을 보는 것 같았다. 해는 자취를 감추며 지평선에 핑크색 흔적을 남겼다. 아직 밝은 하늘 한편으론 달이 얼굴을 드러냈다.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눈물 탓일까 괜히 서글퍼졌다.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누군가 쌓아 둔 돌무더기가 즐비했다. 나도 거기 어떤 소원 하나를 보탰다. 광활한 자연을 굽어보는 나의 신에게 들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일몰의 잔상마저 숨막히게 아름다운 곳. 20170805, 나미비아


# 소소한 여행 팁

1. 래시가드를 가져가지 않은 걸 이때까지 후회하지 않았는데 오렌지강 카약킹 할 때 처음으로 후회했다. 수영복만 입자니 추운 데다 화상을 입을 것 같아 긴팔 옷을 입었더니 엄청 찝찝했다.

2. 모기퇴치제는 뿌리거나 바르는 것 말고도 콘센트에 꼽아 쓰는 걸 챙기면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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