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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eath in Aug 06. 2019

빈트후크/간지: 매번 서툰 작별

별빛 아래 리듬으로 안녕

20170814~20170815: Windhoek, Namibia ~ Ghanzi, Botswana


창밖으로 아스라이 도시의 윤곽이 드러났다. 나미비아의 수도 빈트후크, 바람 부는 모퉁이라는 이름의 이 도시에는 이별이 예정돼 있었다. 특히 자매처럼 몰려다니던 프란체스카와 캐티야가 모두 여기서 여행을 마친다. 나는 다시 혼자 아닌 혼자가 될 참이었다.


흩어지는 가족


크리스가 멈춰 섰다. 나미비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라는 크리스찬스 교회 앞이다. 작고 나이 많은 교회 안에 잠시 들렀다가 국회의사당과 의회 공원, 독일인의 식민 지배에 맞섰던 나미비아 사람들의 이야기가 묻어 있는 기념관 몇 군데를 돌아봤다. 이 머나먼 낯선 땅의 역사에도 비극이 있었고, 투쟁이 있었고 희생과 쟁취가 있었다. 마침 다음 날이 광복절이라 더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스바코프문트에서도 빈트후크 시내에서도 독일식 건물들이 아기자기하니 귀엽다고 생각했던 게 문득 부끄러워졌다.


독일풍의 건물들과 동떨어진 채 탁한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독특한 자태를 자랑하는 현대식 건물은 북한이 빈트후크에 지은 일곱 채의 건물 중 하나인 독립 박물관이었다. 북한이 핵 개발에 나미비아의 우라늄을 사용했기 때문에 두 나라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크리스 식구들 중에 한국인인 나만 유일하게 입국 비자가 필요했던 것도, 남아공에서 나미비아로 넘어오는 국경에서 유독 심사에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나미비아가 북한과 가까운 나라여서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북한이 지어준 독립박물관. 그리고 맨 끝의 사진은 국회의사당. 20170814, 빈트후크, 나미비아

박물관 안은 한산했다. 대충 둘러봤음을 감안하더라도 이렇다 할 볼거리가 없었다. 그나마 꼭대기층 전망대에서 해지는 도시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게 묘미랬는데 컨디션도 기분도 영 내키지 않아 혼자 일찍 밑으로 내려왔다. 로비 앞 의자에는 루가 혼자 앉아있었다.

“오늘 별로 기운이 없어 보이네. 애들이랑 헤어질 생각에 속상하구나?”


왜 종일 축축 쳐졌는지 루 덕분에 알았다. 나는 벌써 저녁의 이별을 서운해하고 있었다. 독일식 건물과 북한식 건물이 서있는 아프리카의 수도라니, 찬찬히 봤더라면 좋을 이질적이고 특이한 도시인데 그러지 못했다. 헤어짐에 대한 생각이 만연한 터라 거리를 걸으면서도, 박물관을 살펴보면서도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별이 마냥 낭만적이지는 못했다. 숙소 문제로 항의와 환불 요청이 쇄도하자 케이프타운의 여행사 본사 직원이 빈트후크로 날아왔다. 면담을 통해 보상 방식을 공지한다며 식당 안의 세미나실까지 잡았다. 식사가 시작되기 전에 공지된 보상 방침이 마뜩잖아서 모두들 불쾌한 상태로 만찬을 시작했다. 좋은 기억만을 불러와 곱씹기도 부족한 시간에 손해와 보상, 판례 같은 이야기를 해야 했다.


정작 에토샤 편에선 사진이 넘쳐서 쓰지 않았던, 크리스 가족(The Chrisaders) 완전체 단체 사진과 크리스 모습. 20170813, 에토샤, 나미비아


부수지 못한 벽과 넘지 못한 ,

남은 후회


저녁 식사를 끝으로 프란체스카, 캐티야, 엘런, 웬디, 리아, 조제프와 마리아가 크리스를 떠났다. 인턴이었던 노마드 직원 에일린도 퇴사를 하겠다며 우리를 떠났다. 크리스가 첫 발을 뗄 때만 해도 이별의 순간은 까마득하기만 했는데 매일 같은 듯 다른 사막의 풍경을 달리고 또 달리다 보니 보름이 금방이었다. 서로의 나라에 온다면 꼭 만나자고, 지나만 가더라도 반드시 얼굴을 보자고, 그럴 게 아니라 나 있는 곳으로 정말 놀러 오라고. 여러 번 포옹을 하고 살짝씩 눈물을 보이며 우리는 헤어졌다.


초반부 어느 날 앙케가 찍은 크리스 가족들 모습. 아직 남아공이었던 때로 기억한다. 2017


가끔은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서로 붙어서 왁자지껄했던 소녀들과의 작별이 너무 서운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만나자며 주문처럼 중얼거리는 약속이 얼마나 연약하며 세상에 재회 없는 헤어짐이 얼마나 많은지, 나는 이미 알기 때문이었다. 보름을 동고동락하고도 어쩌면 영영 헤어지는 순간이 이렇게 찾아올 줄 알았으면서 왜 때론 혼자를 원하며 거리를 두려고 했을까.


가장 후회되는 것은 우습게도 핑크색으로 염색을 하지 않은 일이었다. 프란체스카와 캐티야와 나는 스바코프문트에서 핑크색 염색약을 샀었다. 캐티야는 단발머리 아랫단 절반을 전부 물들이기로 했고, 프란체스카는 풍성한 머리칼 안쪽의 몇 가닥을 염색하기로 했다.

“언니! 어디 하고 싶어?”


기대에 부푼 눈동자들이 반짝이는데, 나는 어디도 고르지 못했다. 나한테 안 어울리는 색이라는 핑계에, 머릿결이 너무 상해서 안된다는 핑계 하나를 허겁지겁 덧대면서. 평생 핑크색으로 머리를 물들일 일이 또 있을까.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순간, 자유롭게 여행하는 순간, 틀에 박히지 않은 순간에조차 나는 어떤 선 하나를 넘어서지 못했던 것 같다. 헤어지는 밤이 돼서야 그런 내가 미웠다.


맨 왼쪽부터 산족의 전통 가옥을 재현해 놓은 오두막과, 캠퍼들이 묵을 오두막, 롯지를 신청한 사람들이 묵을 방. 20170815, 간지, 보츠와나


노래이야기가 있는 밤


친구들 없는 하루가 시작됐다. 크리스가 그제야 진짜 황야를 달리는 것 같았다. 대체로 정적이 가득했다. 떠난 사람들의 빈자리를 메운 정적이었다. 나미비아 국경을 벗어나 보츠와나에 들어선 우리는 점심을 먹은 뒤부턴 멈춰 서지 않고 칼라하리 사막의 중심을 향해 내내 달리기만 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때쯤 숙소에 도착했다. 한없이 고요한 곳이었다. 오두막에 짐을 풀고 하릴없이 주변을 거닐며 캠핑을 하는 Y, L을 태우고 올 오티스를 기다렸다. H도 프란체스카와 캐티야처럼 빈트후크에서 일행을 떠나 홀로 모잠비크로 갔으니 헛헛한 내 마음을 Y와 L은 알아주겠거니 싶었다. H와도 제대로 작별의 인사를 못했다. 적어도 우린 같은 나라에 사니까 다음을 향한 기약이 보다 단단할 터였다. 위안이 됐다.


조촐해진 식구들과 함께하는 첫 저녁엔 루의 생일 파티가 열렸다. 티케와 음바시가 특별히 공수해온 고기들이 불 위에서 노릇노릇 익었다. 두 사람은 여느 생일파티 때처럼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그네들의 언어로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이렇게 많은 해를 산 뒤에, 손주가 무럭무럭 자라는 나이에 아프리카 사막의 별을 바라보며 맞는 생일은 어떤 기분일까. 평생을 놓고 봐도 아주 특별한 생일을 우리들과 보낼 수 있어서 아주 기쁘다고 루는 말했다. 백발의 벽안 신사가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모두의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마코로코토~~밖에 모르겠는 전통 생일 축하 노래와 생일 케이크. 20170815, 간지, 보츠와나


진짜 무대는 밤이 더 깊어서야 시작됐다. 산(San)족이 펼치는 전통 공연이었다. 부시먼이라고도 불리는 산족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로 꼽히는 원주민이다. 이미 나미비아에서 프란스를 만나긴 했지만 그가 서양식 셔츠와 바지, 신발을 신고 있었던 반면 이곳의 산족은 가죽으로 된 속옷을 빼고는 헐벗은 모습이었다. 왜소한 손에는 투박하게 다듬어진 창 같은 무기가 들려있었다. 다큐멘터리 속에서나 볼 법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도 관광객들에 대한 경계심이나 호기심이 거의 없어 보였다. 익숙한듯했다.


터벅터벅 구경 다니다 보니 산족 청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저녁식사를 채비하기 전의 크리스 모습도 한 장. 20170815, 간지, 보츠와나

온통 새까만 사막의 밤을 밝히는 건 모래사장 한가운데의 모닥불뿐. 그 주변에 둘러앉은 반라의 산족들이 박수를 치고 몸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젖먹이 아이를 품에 안은 엄마들도 있었고, 그들의 부모로 보이는 노인들이 있었으며 갓 소년 티를 벗은 청년들이 있었다. 그들이 입을 모아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리는 화음과 박자로 이어가는 노래가 점점 고조되면서 한 편의 뮤지컬이 시작됐다. 관찰과 사냥, 추격과 성취로 이어지는 드라마라는 걸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데도 알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된 가사와 대사가 몹시 진중했다. 연기는 더욱 생생했다.


오들오들 떨리는 사막의 밤이 아주 오래된 이야기 아닌 이야기로 차츰 달구어지고 있었다. 이별의 외로움이 냉기와 함께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곁에 앉은 Y와 L의 맑은 눈동자를 곁눈질로 훔쳐보면서 여럿이 떠난 뒤의 첫 하루가 적적했다는 얘기를 꺼낼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지나갈 기분일 테니까. 여행은 이 하루처럼 전에 겪지 못한 것들로 어김없이 또 정신없이 채워지고, 시간 역시 돌아볼 새 없이 계속 흘러갈 것이었다. 언제나처럼.


열정적으로 무대를 하는 산족 청년들. 20170815, 간지, 보츠와나
산족의 무대를 잠시 본다면 이런 느낌. 20170815, 간지, 보츠와나



#소소한 여행 팁

1. 이날 숙소처럼 샤워실이 야외, 말 그대로 야외에 있는 경우가 있다. 천막이 있는 공동 샤워실도 야외에 해당하겠지만 거긴 괜찮다. 천장이 있으니까. 이 숙소처럼 벽은 있되 천장이 없는 샤워실 겸 화장실이 딸린 방에 묵게 된다면, 해가 지기 전에 샤워를 하는 게 좋다. 밤이 되면 너무 추운 것도 있지만, 불을 켜 두니 자꾸 벌레가 꼬여서 벌레 쫓으랴 샤워하랴 이래저래 괴로웠다.

2. 천장 없는 샤워실이라고 터무니없이 낙후된 건 아니다. 엄청 좋은 숙소인데 별 보면서 샤워하라고 로맨틱하게 뚫려있는 곳들이 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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