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같은 어떤 순간들
사람에게 길들여지지 않고도 엄연히 살아있는 무언가를 만나기 어려운 일상을 산다. 기껏해야 푸드덕대는 비둘기나 아침의 참새, 저녁의 길고양이가 그 속에서 마주치는 생물의 전부지만 인간에 기대어 살아가는 그들을 야생이라 부르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법한 야생 동물들을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 아프리카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여겨지는 것은 당연했다. 인간이 닦아놓은 길가에서 스치듯 만나는 걸 넘어서, 그들의 터전 안으로 들어가 지켜볼 수 있는 기회는 20여 일의 여정 가운데서도 오로지 이틀간만 주어졌다. 에토샤 국립공원에서.
에토샤 입성 하루 전날, 먼 길을 달려 도착한 숙소는 훌륭했다. 노을이 지는 정원에서 공작새가 형형색색 찬란한 자태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원래 우리가 묵기로 돼 있는 숙소이기도 했다. 그런데 체크인을 하러 간다던 노먼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크리스 가족에게 돌아왔다. 오버부킹이 되는 바람에 다른 잠자리를 찾아봐야 한다는 거였다.
더 큰 문제는 다음 날 숙소에 대한 계획도 틀어졌다는 점이었다. 에토샤 국립공원 안의 숙소에 묵어야 입장 시간 이후에도 공원을 둘러볼 수 있고, 그래야만 표범, 치타, 사자 같은 야행성 육식동물들이 활동하는 모습을 관찰하기가 수월하다. 에토샤 안의 숙소가 잘못된 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일이었다.
처음도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숙소 문제는 첫날부터 우리를 따라다닌 불씨였다. 오렌지강에서도 원래 숙소에 들렀다 체크인을 하지 못하고 다른 곳을 찾았고, 소서스블레이에서도 그랬는데 바로 전날 밤에도 그랬다. 다른 곳을 찾는 것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듬성듬성 멀찍이 박혀있는 사막 위의 다른 숙소를 찾아 최소 1시간은 다시 달려야 한다는 거였으니까.
계획과 달리 보낸 밤은 차곡차곡 날카롭게 쌓여 마침내 크리스 가족들의 마음을 무너뜨렸다. 매년 7~8월은 서남아프리카 여행의 최고 성수기여서 자꾸 오버부킹 문제가 발생한다며 노먼이 양해를 구했지만 아무도 납득할 수 없었다. 모두가 화를 냈다. 아프리카 대륙 최대 여행사의 인기 상품을 적지 않은 돈을 주고 예약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식구들은 허탈하고 황당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제각기 여행사에 항의 메일을 보냈다. 나는 대학 졸업 이래 가장 길고 공적인 영작을 했다. 영어에 화를 담아 글을 쓴 건 태어나서 처음인 듯했다. 대체 숙소로 출발하는 크리스 분위기는 침울하고 날 서 있기가 이를 데 없었다. 어둠 속을 달리는 무거운 침묵을 깬 건 엘렌이었다.
“우리 음악이라도 좀 들을까?”
그녀의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올드팝이 흘러나왔다. 엘렌은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목소리를 얹었다. 퀸에서부터 데스파시토, 강남스타일까지. 모두 목이 쉬도록 노래를 불렀다. 미친 것 같았지만 기분을 푸는데 큰 도움이 됐다. 그 누구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광란의 노래를 통해 다 함께 마음을 고쳐먹었음이 분명했다. 어긋난 밤들로 낮까지, 또 남은 여행까지 망쳐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을 테다. 단지 귀한 기회가 조금 더 귀해졌을 뿐이다. 그래서 더욱 우리는 단 한순간도 허투루 보낼 수 없는 치열한 여행자가 됐을 뿐이다.
동 틀 무렵 에토샤 국립공원에 들어섰다. 이 국립공원의 이름은 전체 면적의 삼분의 일 가까이를 차지하는 에토샤 염호, 에토샤 판(Etosha pan) 이름을 따라 정해졌다. 호수는 한 해 대부분의 시간 동안 광활한 염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에토샤는 ‘아무것도 없는 땅, 마른 물의 땅’을 뜻한다.
마법은 12월 우기와 함께 시작된다. 황무지가 찰나의 초원이 되고, 소금사막은 얕은 호수로 변한다. 그 짧은 시간이 드넓은 호수를 사라지게 할 만큼 뜨겁고 건조하며 척박한 이 지대를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은 동물이 모여드는 야생 동물의 천국으로 만든다.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 동물들을 포함해 100여 종이 넘는 포유류, 350종의 조류가 에토샤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매년 20만 명의 사람들이 에토샤를 찾는다.
그 수많은 동물들 가운데 얼마만큼을 육안으로 접할 수 있을지는 운의 몫, 신의 뜻에 달렸다. 게임 드라이브에 참여하는 차량들, 그러니까 우리 크리스는 정해진 길을 따라가야만 하고 게임 드라이브 중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트럭 밖으로 발을 디딜 수 없다. 큰 소리를 내서도 안 된다. 엄격한 규칙이다. 비장한 마음으로 출발한 크리스 식구들은 창문에 옹기종기 매달려 살아 움직이는 무언가가 나타나기만을 숨죽여 기다렸다. 크리스는 아주 천천히, 시간은 그만큼 빠르게 달렸다.
전쟁 같은 기다림 때문에 하마터면 놓칠 뻔했지만 분명 차창 밖은 생명 없이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에 눈과 머리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우기의 기억을 간직하듯 제법 우거진 관목들은 그동안의 나미비아와는 다른 풍광을 선사했다. 사바나 들판이 어디 있었냐는 듯 나타난 마른 호수는 눈부시도록 새하얬다.
가장 먼저 마주친 건 한창 식사 중인 코끼리였다. 코끼리는 긴 코를 움직여 관목을 비틀어 꺾은 뒤 입으로 가져가 우걱우걱 씹었다. 커다란 귀가 이따금씩 펄럭였고, 꼬리는 기분 좋게 흔들리고 있었다. 느리고 육중하며 우아한 야생의 식사. 손 뻗으면 닿을 만한 곳에 코끼리가 서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유유자적 일상을 만끽하는 동물들을 보고 있으니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 물을 마시는 수십여 마리의 구두와 스프링복, 유유자적 들판을 거니는 기린과 얼룩말 가족들, 하이에나들과 임팔라, 누와 타조를 잇따라 만났다. 쿠두는 나이를 뿔에 새긴다고 했다. 나이테와 같이 시간을 머금은 뿔이 아주 근사해 보였다. 땡볕 아래 얼룩말은 서로 포옹하듯 목을 기댄 채로 한참 서 있었다. 두 마리의 얼룩과 근육질의 몸뚱이가 퍼즐처럼 아름답게 들어맞았다. 동물의 왕국의 한가운데 서있다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라이온 킹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무엇보다 지구가 인간들의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명징하게 다가왔다.
국립공원 안에서 잠을 자지 못하는 바람에 야간 드라이브를 하지 못했으나, 간신히 사자도 만날 수 있었다. 낮잠을 자는 사자였다. 쌔근쌔근 들썩이는 베이지색 배가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두 번째 날 일몰 시간제한에 맞춰 공원을 빠져나가기 직전에는 표범과도 마주쳤다. 해가 저무는 개와 늑대의 시간, 나무 뒤를 사뿐사뿐 걸어서 덤불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표범의 몸은 주변과 어우러져 눈에 쉽게 띄지 않았고 아주 날렵했다. 발견해낸 것 자체가 기적과도 같았다. 우리는 소리를 낼 수 없어서 모든 안면 근육을 사용해 내적 환호를 질렀다.
상황을 바꾸는 것도 기적을 만드는 것도 순간이다. 한밤의 정적을 깨던 음악처럼, 사막을 호수로 만드는 빗줄기처럼, 작별 직전에 슬쩍 나타나 준 야생 표범처럼. 늘 계획대로 흘러갈 필요도, 매일 젖어 있을 이유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미처 두 눈으로 보지 못한 코뿔소를 다시 보러 오는 날까지, 그 특별한 순간까지 코뿔소들이 지구 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살아 버틸 수 있기만을 바랐다.
# 소소한 여행 팁
1.7~8월이 성수기인 것은 건기이기 때문이다. 물이 고인 곳의 면적이 줄어들고, 동물들은 그 물 고인 곳으로만 몰려든다. 그래서 한 군데서 동물을 잔뜩 만나기가 좋다.
2. 에토샤 공원 안의 숙소를 무조건 사수해야 한다. 공원 안의 숙소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일몰 시간까지 공원을 빠져나가야 한다. 내가 방문했던 기간 기준 오후 5시였다.
3. 에토샤 국립공원 프로그램북을 사는 게 좋다. 공원 안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동물들이 총천연색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4. 70여 일의 여행을 통틀어 DSLR이 없다는 것을 후회한 순간은 딱 두 번, 우유니 사막의 밤과 에토샤의 낮이었다. 좋은 렌즈 가진 크리스 식구들이 줌 당겨 찍으니 내셔널 지오그래픽 같은 동물 사진들이 나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