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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eath in Aug 17. 2019

오카방고/초베: 소멸하는 강, 작은 낙원

오직 나의 순간

20170816~20170820:

Maun~Okavango Delta~Nata~Chobe National Park, Botswana  


티케이가 들떠 있었다. 5000km 넘는 여행길, 낯선 이들과 사막을 달리다가 태어난 땅을 밟는다는 마음이 얼마나 기쁠지 짐작됐다. 티케이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민주주의와 법치가 가장 만개한 고국, 보츠와나를 한참 자랑했다. 영국 보호령이었던 보츠와나가 독립국가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마어마한 매장량을 자랑하는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했단다. 정부와 지도자들은 다이아몬드를 판 돈으로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았다. 대신 무상교육과 의료보험제도, 국가 인프라를 착착 마련했다. 보츠와나는 정치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단단한 나라가 됐다.


고국에 대한 열띤 설명을 하던 티케이를 비롯한 노매드 직원들과는 마운에서 잠시 헤어졌다. 오카방고 델타로는 티케이나 노먼, 크리스 없이 우리들끼리 경비행기를 타고 간다. 티케이는 보츠와나식 인사말을 알려주고는 코딱지만 한 공항을 떠났다.

“여자는 두멜라 마, 남자는 두멜라 라 하고 인사해. 오카방고 델타에서 반갑게 인사해봐!”


하늘 위에서 본 오카방고 델타와 우리가 탄 비행기, 나의 숙소 뷰. 20170816, 오카방고델타, 보츠와나


작은 천국으로의 소풍


난생처음 타보는 경비행기, 작은 창 밖의 세상은 온통 그림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마른땅 위에 뻗친 암녹색의 물길은 꼭 살아 움직이며 꿈틀대는 것 같았다. 역동적인 소멸이었다. 오카방고 델타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내륙 삼각주다. 앙골라 고원에서부터 반년 가까이 흐른 강물이 바다로 나아가지 못하고 200만 헥타르가 넘는 면적에 걸쳐 땅으로 스며든다. 사라짐을 타고난 오카방고 강의 운명은 슬픈 것일까. 결코 그렇지만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백만 년 전처럼 인도양으로 내달리진 못하지만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생명수로써 칼라하리 사막의 오아시스 역할을 다하고 있으니까.


넋 놓고 바깥을 내려다보는 사이 비행기는 벌판에 가까운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부터 우리가 사흘간 머무를 곳은 모피리 캠프까지는 배를 타고 들어갔다. 모피리(Mopiri)는 현지어로 ‘섬’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오두막 모양을 한 숙소 내부는 백수가 이런 데서 자도 되나 싶은 죄책감이 들만큼 아름답고 쾌적했다. 유리 덧문을 열자 테라스 앞에 우거진 수풀과 흐르는 강이 펼쳐졌다. 화들짝 놀란 원숭이가 나무 위로 달아났다. 캠프 직원들은 밤엔 가끔 표범이 출몰하니까 밤엔 문을 닫으라고 당부했다.


낮의 오카방고 강 모습. 하늘에서 보던 검은 빛깔은 가까이 보니 푸르고 투명했다. 20170816, 오카방고델타, 보츠와나


서너 시간의 자유가 주어졌다. 발코니에 베개를 끌어안고 기대앉아 밀크티를 홀짝이며 밀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여행에서 잠시 벗어나 즐기는 온전한 휴식이 꿀처럼 달았다. 깜빡 졸다 고개를 들자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는 태양이 있었다. 인기척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자연의 소리만 남기고는 음소거시킬 만큼 충분한 오두막 간의 거리 덕분이었다.


폭풍처럼 밀려드는 무위의 한가운데서 카이로스를, 나만의 특별한 순간들을 생각했다. 놓쳐버린 것들과, 지나가는 것들과, 멀리서 다가오는 것들.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선택과 우연, 섭리가 모여 나를 이 작은 천국으로 이끌었다. 전율이 일었다. 다시 오지 않을 공간과 시간이었다. 내일을 알 수 없음에 두렵기보다는 지금이 귀하고 감사했다. 후회는 없을 거라는 확신과 함께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벅찬 감정으로 가득한 찰나를 아끼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표현할 재간이 없다는 것만이 안타까웠다.


오카방고 강의 타는 듯할 노을. 20170816, 오카방고 델타, 보츠와나


물길 위에서


노을을 보기 위해 작은 배를 타고 나섰다. 강은 생각보다 컸고 구불구불한 물길은 계통 없이 어지러웠다. 바닥이 보일만큼 아주 얕다가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어둡게 깊었다. 그런데도 키를 잡은 선장은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좁은 강의 구석구석까지 용케 길을 찾아냈다. 생명을 마주할 때마다 말없이 배가 섰다. 넓은 강의 한편에선 하마 가족이 목욕을 했고 어떤 지류에 들어서자 희귀한 모양의 새들이 푸드덕댔다. 잠자는 악어나 새끼 도마뱀, 살랑거리는 연꽃이 있었다. 강변을 따라 도열한 갈대들은 바람에 기대어 내내 서걱거렸다.


한참 강가를 구경하니 해가 수평선 쪽으로 제법 내려앉았다. 배가 슬슬 속도를 높이더니 눈을 뜨기 힘들 만큼의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정해진 일몰 명소가 있어 꼭 거기까지 가야 성이 풀린단다. 선장은 신이 나서 뱃머리를 이리저리 돌렸고 리즈가 휘파람을 불며 흥을 돋웠다. 마주 불어오는 강바람에 가슴이 뻥 뚫렸다. 배 꽁무니에 따라붙은 물결은 지는 해를 받으며 찬란하게 부서졌다. 배가 강의 한가운데에 멈춰 섰을 땐 눈앞이 온통 붉었다. 세상을 태워버릴 기세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윤슬은 그 색을 오롯이 받아 잔잔하게 빛났다. 어떤 카메라로도 다 담을 수 없었다.


강에서 만난 생명들. 람사르 습지보호구역이자 유네스코(UNESCO)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곳의 위엄. 그리고 모코로의 느릿한 평화. 20170817, 오카방고 델타, 보츠와나


이튿날에는 일찍부터 강의 구석구석을 다시 돌아봤다. 악어를 만났고 하마도 잔뜩 봤다. 잠깐 내려서 걸으며 코끼리의 흔적을 찾거나 바오밥 나무를 구경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모코로라는 전통 배를 타고 찬찬히 잔잔한 강 곳곳을 거니는 기분이 좋았다. 찬 아침 공기가 따스한 햇살에 녹으면서 까무룩 잠에 들기도 했다. 땅으로 사라지는 강에서 보낸 매 순간은 내게 그렇게 특별한 평화로 남았다.



코끼리와 함께 거닐다


꿈같던 오카방고 델타에서의 소풍이 끝나고 크리스 가족은 초베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초베 국립공원은 지구 상의 여느 코끼리보다도 몸집이 큰 종류의 코끼리들이 지구 상에서 가장 커다란 무리를 지어 사는, 코끼리들의 낙원이다. 그 커다란 덩치들이 12만여 마리나 모여 산다니.


길을 건너는 코끼리와 게임드라이브로 만난 공원 안의 생물들. 20170818, 초베 국립공원, 보츠와나


믿기지 않던 마음은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서부터 경탄으로 바뀌었다. 크리스 앞에서 코끼리 떼가 길을 건너고 있었다. 도로를 우르르 건너는 코끼리 떼라니. 다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본격적으로 게임 드라이브를 위한 차량에 옮겨 타고 국립공원 입구를 지나자마자 손에 뻗으면 닿을만한 거리에서 코끼리 떼를 계속 만났다. 코끼리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숨죽인 지프차 앞을 느릿느릿 건너가는 코끼리들의 코와 꼬리가 리듬감 있게 움직였다.


게임 드라이브가 끝난 뒤에는 유람선을 타고 초베강의 노을을 즐기며 계속 동물들을 보았다. 초베강을 낀 국립공원은 확실히 메마른 에토샤와 또 다른 풍경을 선사했다. 얼룩말, 기린, 악어, 하마와 물새를 잔뜩 봤지만 역시 주인공은 코끼리였다. 특히 붉게 타오르는 저녁 해를 등지고 선 코끼리들의 그림자는 그림 같았다. 아프리카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이 장면이 아닐까 싶었다.


한국에선 볼 수 없을 만큼 새빨간 노을. 오카방고에서부터 거듭 감탄사를 늘어놓는 나를 보고 마고는 말했다.

“아프리카의 노을이 새빨간 건 사막의 모래먼지 때문일 거야. 입자가 많을수록 붉은빛의 산란이 두드러지기 때문에…..(블라블라 블라)”

마고에게 전공을 물었더니 물리학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이과 망했으면’이라는 표현의 유쾌함을 영어로 전해볼까 하다가 그만두고 히죽 웃었다. 마고도 덩달아 미소 지었다. 주름살 고운 그녀 얼굴이 선홍빛 노을로 물들어 빛나고 있었다. 저무는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선셋 크루즈를 타며 만난 하마, 악어, 그리고 노을을 등진 코끼리들. 20170819, 초베 국립공원, 보츠와나



# 소소한 여행 팁

1.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나미비아를 거치며 쭉 쓰던 남아공 ‘랜드’와의 작별이다. 보츠와나에선 랜드 대신 비라는 뜻의 자국 화폐 ‘풀라(pula)’를 쓴다. 비가 워낙 귀한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풀라는 축복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고 했다.

2. 오카방고 델타로 갈 때는 짐을 다 들고 가지 못한다. 현지 규정 때문에 백팩에 단출하게 짐을 챙겨 가야 한다.

3. 마운의 마트에서 간식거리를 사 가지고 오카방고로 들어가면 좋겠다. 긴 밤을 달랠 만한 먹고 마실거리를 캠프에서 직접 사 먹기엔 너무 비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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