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만나자 아프리카
짐바브웨와 잠비아 국경을 가로질러 인도양으로 흐르던 잠베지강은 갑자기 평원의 틈으로 자취를 감춘다. 100m가 넘는 낭떠러지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거다. 중류에 접어든 강폭은 1700m쯤, 고스란히 폭포의 폭이 된다. 세계에서 가장 길게 이어진 폭포, 빅토리아 폭포다. 이구아수 폭포에 이어 세계 3대 폭포 중 두 개를 이번 여행으로 만난다는 것에 마음이 들떴다.
건기인 점을 감안해도 폭포의 유량이나 규모가 이과수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았다. 다만 물리적인 크기로만 규정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절벽 끝에 매달리듯 피어난 보라색 잔꽃들과 그 아래로 쏟아지는 물줄기, 물보라에서 번지는 쌍무지개, 낭떠러지가 지척인 풀숲 사이를 뒹굴던 새끼 멧돼지들. 수식이나 설명이 필요 없는 절경 앞에서 어쩌다 입 밖으로 꺼내는 말은 온통 감탄이었다.
무엇보다 폭포를 이루는 절벽과 절벽 사이가 방금 갈라진 듯 좁은 것이 장관이었다. 폭포 아래 강폭은 100m가 채 되지 않는다. 낭떠러지 끝에 가까이 다가서야만 바토카(Batoka) 협곡 사이로 흐르는 물길이 보였다. 전속력으로 달려 펄쩍 뛰면 반대편에 다다를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평원이 이렇게 갈라지는 순간은 어땠을지 상상되지 않는 상상을 했다.
이 폭포의 존재를 처음 찾아낸 먼 옛날의 사람들에게 산도 계곡도 없는 초원 먼 데서 보이는 것이라곤 하얗게 피어오르는 물보라, 들리는 것은 찢어질 듯한 굉음뿐이었을 것이다. 퉁가어를 쓰는 원주민들은 폭포를 ‘모시-오아 툰야(Mosi-oa Tunya, the smoke that thunders, 천둥 치는 연기)'라고 불렀다.
다리를 건너 잠비아에도 다녀왔다. 여행 동안 간단한 월경을 제법 겪었는데도 국경 없는 나라에 사는 내겐 여전히 어색하고 두근거렸다. 잠비아로 넘어가는 다리 위에 번지점프대가 있었다. 한참 아래서 꿈틀대는 암녹색 물결이 아득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직원의 호객 행위와 함께 폭포를 구경하던 펠릭스, 마고의 부추김에 잠시 흔들렸지만 결국 엄두는 내지 못했다. 폭포의 맨얼굴은 다음날 래프팅으로 만나게 될 거라는 비장한 각오만 다지고 돌아섰다.
이튿날 새벽같이 래프팅을 하러 나섰다. 급류의 세기는 1~6등급으로 나뉘는데 바토카 협곡의 급류 레벨은 평균 4~5등급, 거칠고 사나운 최상급 난코스다. 래프팅 마니아들의 위시리스트 꼭대기를 차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했다. 우기에는 모조리 6등급이 되는 급류가 건기인 7~8월 유량이 줄어들면 몇 군데를 빼고는 5등급으로 떨어진다.
우리가 함께 타고 넘을 급류 구간은 총 19개. 그중 레벨 5는 4~5개다. 그나마 안전을 보장받는 때라지만 전날 폭포 꼭대기에서 굽어본 협곡의 검푸른 물살은 사람이 탈 수 있는 것이 아닌 듯했기에 한껏 긴장했다.
몸에 맞는 구명조끼와 헬멧을 지급받고는 까마득한 계단을 따라 절벽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 배의 가이드는 JB였다. 스페인 사람 세 명과 현지인 여자 두 명, 그리고 나와 Y, L이 한 조였다. 처음부터 어딘가 불안했다. 스페인 선원들이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 JB는 첫인상부터가 썩 친절하지 않았다.
바위 사이에 정박된 흰 고무보트 위에 올라 JB로부터 수신호의 의미와 노 젓는 법, 배가 뒤집혔을 때 취해야 할 자세 같은 걸 배웠다. 각 배가 교육을 받는 동안 카약을 탄 안전요원 십여 명이 출발선에 도열했다. 보트 수보다 안전요원이 많은 셈이었다. 저 많은 이들 중 누구라도 나를 구해주겠지 하며 맘을 달랬다. 출발은 비교적 순조로운 것 같았다. 팀 자체가 파이팅이 넘치거나 손발이 잘 맞는다는 느낌, 혹은 우리가 노를 잘 젓고 있다는 기분은 안 들었지만.
금방 첫 번째 급류를 만났다. JB가 경고한 대로 우레 같은 물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수신호에 맞춰 열심히 노를 젓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잘 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짓던 순간 배가 뒤집어졌다.
우리 배는 그 뒤로도 두 번 더, 그러니까 총 세 번을 완전히 뒤집어졌다. 이례적이었다. 평생 이 강을 탔던 가이드들과 함께하기 때문에 많아야 두 번 전복되거나 어쩌다 한두 명이 제각기 빠지는 정도랬다. 스페인 사람들을 포함해 배에 탄 사람 절반이 노를 제대로 젓지 않은 탓이다. 체구가 작은 나와 Y, L만 성실하게 노질을 하니 배가 뒤집힐 수밖에.
물밑은 아수라장이었다. 간신히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이라고는 소용돌이치는 검은 물. 손을 뻗어도 수면에 닿지 않았다. 숨부터 쉬어야겠다는 본능으로, 또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누구라도 알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사력을 다해 손을 뻗으며 위로 향했다. 다행히 첫 번째 전복 때는 배 밖으로 빠지는 바람에 금방 수면 위로 머리를 뺄 수 있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달랐다. 가까스로 수면에 다다랐다고 생각했는데 턱 막히는 육중한 선체. 눈을 뜨면 세상이 온통 까맸다. 더 이상 뱉을 숨이 없어 이렇게 죽는구나 싶을 때 겨우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면 이내 거센 파도가 덮쳐와 다시 나를 물아래로 처박았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의 급류였다. 고개를 내밀고 일단 뒤로 누워 떠내려가야 한다는 것 따위의 이론을 실천할만한 의식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두 번째 빠졌을 때는 배 밑에서 헤매다 진이 빠져 떠내려가는 나를 카약맨이 건져다 인근의 다른 배에 실어주었다. 세 번째에는 뒤집힌 배 밖으로 못 나오고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나를 L이 붙잡아 살렸다. 머리를 물 바깥으로 못 꺼내는 것만이 위기는 아니었다. 몸을 가누기 힘든 급류와 사투를 벌이면서 체력이 급속도로 방전되고 있었다. 한 번 더 빠지면 손 뻗을 힘조차 없어 정말 죽을 것 같았다.
모두가 익사 가능성을 확인한 덕인지 전복과 입수가 더는 없었다. 다른 배들로부터 The swimmer라는 별칭을 얻으며 공식 오합지졸 팀이 됐지만 4시간에 걸쳐 19개의 급류를 완주할 수 있었다. 입수의 고통을 겪지 않고 급류를 타고 넘는 기분은 더없이 짜릿하고 상쾌했다. 이 맛이구나 싶어 입맛을 다실만큼.
지금까지 했던 래프팅은, 놀이공원의 급류 타기 기구는 얼마나 농담 같은가. 잠베지강 래프팅은 장비를 들고 다시 절벽 위로 기어오르는 마무리까지도 진정한 익스트림이었고,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한 뒤 저녁까지 죽은 듯 잠만 잔 것도, 자고 난 뒤에는 호흡 한 번에 재채기 한 번을 하며 눈물 콧물 전부 쏟은 것까지도 익스트림이었다. 극한의 정수를 맛봤다는 생각에 훈장을 단 듯한 기분이 들었다.
Y, L과 나 사이에는 서로의 목숨을 지탱한 것에서 비롯된 전우애가 생겼다. 우리는 KFC를 아프리카 땅에서의 마지막 저녁으로 먹으며 몇 번을 말했다.
“우리 오늘 (엣취) 두 번째 삶을 얻은 거야. (엣취) 이 래프팅을 (훌쩍) 해낸 우리가 못할 일은 (엣취) 세상에 없다!(킁)”
2012년 나는 만 나이 스물둘 인생에 없다시피 한 최대 위기를 발굴해 자기소개서와 면접 답변으로 내놓곤 하던 언론고시생이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론 최대 위기가 실제로 나타났고 부단히 경신됐다. 그리고 마침내 2017년 8월 22일, 인생 최대이자 최악의 위기를 획득해냈다. 인생에 어떤 파도가 몰아치더라도 이보다는 숨 쉴만하고 덜 무섭고 가뿐할 것이다. 그 파도를 무사히 타고 넘었을 때의 쾌감과 완주 뒤의 희열을 떠올리자 남은 삶에 대한 자신감이 낮에 마신 강물이 배 채웠듯 마음을 채워주었다.
까마득했던 21일간의 트럭킹이 마무리된 건 래프팅을 하기 전날 밤이었다. 크리스 식구들은 호텔 안의 뷔페식 레스토랑에서 최후의 만찬을 했다. 직원들이 전통 악기를 연주하거나 민요를 부르는 운치 있는 곳이었다. 얼룩말, 쿠두, 스프링복, 악어 고기 같은 한국에선 만날 수 없는 음식들을 마지막으로 실컷, 천천히 먹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국적도 나이도 직업도 다른 스무 명의 완전한 타인들이 서로를 가족이라 부르며 함께 5900km를 여행했다. 그 길을 따라 쌓인 정을 뭐라 부르면 좋을까. 빈트후크에서 이미 한차례 사람들을 떠나보냈는데도 헤어짐은 언제나처럼 어려웠다. 어쩌면 다시 못 만날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 매겨진 기념 티를 각자 하나씩 손에 쥐고 작별 인사를 나눴다. 크리스가 지나온 길과 머무른 곳의 이름이 표기된 지도, 각 나라의 국기와 크리스 이름이 박힌 반팔 티셔츠였다. 만남과 헤어짐의 인사가 같은 우리말은 새삼 가슴에 사무쳤다. 내게 한국어를 배운 친구들이 웃으며 말했다. 안녕, 안녕, 하고.
크리스 가족들은 각자에게 남은 여정과 귀국 후의 계획 같은 것들, 아주 현실적이거나 퍽 꿈같은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나눴다. 나는 일단 새 직업을 구할 생각이라고, 일상으로 돌아가더라도 여행을 멈추진 않을 거라고, 그러다 언젠가는 시를 쓰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한 사람 한 사람 포옹하며 서로의 내일을 축복하는 동안 꾹 참았던 눈물은 마지막으로 나를 껴안아준 펠릭스 때문에 결국 흘러내렸다. 내일모레 서른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내내 나를 어른이 되지 않은 손녀처럼 대하던 그녀가 나직이 속삭인 말이다.
“수민, 나는 시를 참 좋아해. 모든 시가 아름답지. 너에게는 많은 가능성이 있어. 우리가 여행을 통해 본 것들을 쓰렴. 우선 쓰기 시작해. 다 잘 될 거야. 넌 할 수 있어.”
정해진 내일 없이 길을 떠나는 내겐 최고의 찬사이자 격려였다. 그녀 목소리로 전해진 낱말 하나하나, 그 순간과 공기는 내 영혼 어딘가에서 영영 살아남을 것이었다.
래프팅을 하고 난 다음날에는 Y, L과도, 아프리카 대륙과도 헤어졌다. 우리의 이별은 비교적 불현듯 찾아왔다. 다 같이 잠비아 리빙스턴 공항으로 택시를 타고 갔는데 두 사람의 비행기가 리빙스턴이 아닌 빅토리아 폭포 공항에서 출발한다는 걸 수속을 밟다가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한국서 보자는 외마디 외침을 남기고 혼비백산하며 공항을 떠났다. 의젓하고 유쾌한 둘 때문에 끝까지 많은 추억을 쌓았다. 빈트후크에서 헤어진 H를 포함해 우리 넷이 자주, 오래 보게 될 것임을 알았다. 이 대륙으로 언젠간 내가 반드시 다시 돌아오리라는 강한 확신과 함께. 여행이 정말 끝에 다다랐다는 것만이 실감 나지 않아서 꿈을 꾸는 듯했다.
# 소소한 여행 팁
1. 짐바브웨 국경은 혼돈 그 자체였다. 국경이라고는 하는데 여권과 본인 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이렇게 저렇게 기다리니 비자가 나왔다. 그저 비자 비용을 받아 챙기는 데 급급할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혼란의 정도에 비해 대기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2. 잠비아 쪽도 둘러보고 싶다면 보츠와나-짐바브웨 국경에서 카자 유니 비자를 받아야 한다. 50달러를 내면 여권에 붙여준다. 이 비자가 있어야 잠비아와 짐바브웨를 횟수 제한 없이 오갈 수 있다. 사실상 빅토리아 폭포를 위한 관광용 멀티 비자인 셈이다. 카자 비자를 받더라도 짐바브웨-잠비아 국경에서 여권 검사를 하고 번호표 같은 것을 받는다. 돌아올 때 이걸 보여줘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3. 빅토리아 폭포, 잠베지 강에서 할 수 있는 액티비티는 급류 래프팅 말고도 정말 많다. 잠베지강 선셋 크루즈, 번지점프, 헬리콥터 비행, 악마의 수영장이라 불리는 폭포 꼭대기에서 수영하기. 악마의 수영장은 잠비아 쪽 리빙스턴 섬 통해 접근해야 한다고 했는데, 우리가 간 날은 외국에서 귀빈이 오는 바람에 경호상의 이유로 경로가 막혔다.
4. 래프팅 할 때 꼭.. 꼭 래시가드 입자. 타 죽는 줄 알았다. 모자, 선글라스, 액세서리 전부 잃어버릴 확률이 높으니 빼놓고 가자. 물안경을 쓰고 타면 빠졌을 때 유용할 것 같긴 한데, 배 타면서 주변 경치 볼 때 차질 생기니까 별로일 수도 있겠다.
5. 래프팅 풀데이, 하프데이 나눠져 있다고 들었는데 기억 가물거리지만 우리 갔을 땐 19개 타고나서 점심 먹는 하나밖에 없었다. 어차피 나머지 5개는 그레이드 높은 급류 아니라서 재미도 없다고 했다.
6. 첫날밤까지만 노매드 사전 예약 숙소에 포함돼있고, 이튿날 잘 곳은 직접 골라야 한다. 미리 예약해두자. (노매드에 요청해서 잡아달라고 하는 옵션도 있다)
7. 래프팅 촬영본은 무려 50달러. 게다가 모든 배의 사진과 영상이 들어있어서 추려내는데 한참 시간이 든다. 우리는 죽다 살았기에 훈장 삼아서 돈 모아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