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두 번째 끝에서
얼룩덜룩한 염색머리, 평생을 통틀어 가장 새까만 피부, 잠옷보다 낡은 정체불명의 의상, 닳을 대로 닳은 백팩과 더플백. 2017년 8월 27일 늦은 오후, 인천 국제공항 화장실 거울 속의 내가 새삼 낯설었다. 한국에 돌아오니 더욱 스스로가 한국인 같지 않았다. 엄마 아빠가 나를 못 알아보면 어쩌나 싶을 정도였는데 입국장 밖의 엄마가 나를 보자마자 달려와 와락 끌어안았다. 엄마의 가녀린 품에서 귀국을 실감했다.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활짝 웃었다.
“우리 딸 놀더니 살쪄서 얼굴 좋아졌다!”
한동안 눈을 뜨면 내방 침대 위라는 게 어색했다. 갈 곳이 없다는 것과 정해진 게 없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백수의 시간은 뚜렷한 단위 없이 무섭게 흘렀다. 보고 듣고 느끼고 배운 것이 벅차도록 많기에 시간에 바래버릴 기억이 어느 때보다 두려웠다. 처음으로 여행기란 것을 쓰기 시작했다.
프롤로그를 완성한 것은 2017년 9월 10일. 여행을 쓰는 것이 여행을 하는 것보다 어려웠다. 마감 없는 글쓰기는 나와의 약속이어서 스스로에게 내린 형벌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되새김질을 통해 다시 한번 여행하는 듯한 감상에 젖을 수 있어 행복했다. 나의 퇴사여행은 여행기를 다 쓰고 나서야 완성되었다. 돌아오는데 2년이 걸린 셈이다.
마지막으로 언론사 필기시험에 합격했을 때, 그러니까 전 직장 입사 시험을 쳤을 때 주어진 논술 주제는 '걷기 열풍을 문화인류학적으로 분석하시오'였다. 나는 사람들이 돌아오기 위해 걷는 데 열중한다는 내용으로 글을 썼다.
여행도 그렇다. 떠나는 것은 제자리로 잘 돌아오기 위함이다. 본래 있던 곳이나, 같은 곳이라기보다는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오는 것. 그 과정에선 몸과 마음의 속도가 달라 생기는 시차를 자주 앓게 된다. 몸은 떠났는데 마음이 안 떠나기도 하고 마음은 저만치 떠났는데 몸이 떠나지 못하기도 한다. 몸은 돌아왔으나 마음이 돌아오지 않거나 마음만 먼저 돌아가 몸이 달기도 한다.
그 시차로 인해 여행할 때마다 낯선 곳에 나의 일부를 두고 오는 모양이다. 조각난 내가 세상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어서 돌아와도 다 온 것 같지 않다. 온전한 나 자신은 여기 없는 느낌이다. 두고 온 나를 찾아 자꾸 밖으로 돌면서 스스로를 다시 흩뿌리고 그만큼의 자신을 찾기 위해 영영 떠나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론 도처에서 나의 일부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기에, 지금 여기 이 순간의 내가 아무리 주저앉고 넘어져 부서진 대도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진 않고 살아간다는 생각도 든다.
어떤 공간과 시간, 사람이 맞닿는 특별한 순간에 생의 한 페이지가 접힌다. 그렇게 접힌 모서리들은 영혼에 각인되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 흔적을 연료 삶아 무료하게 흘러가는 일상을 버티고 또 다음 꿈을 꾼다. 여행이 삶의 동력이 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진정한 여행을 마치면 접힌 영혼의 모서리가 수두룩하다. 덕분에 곳을 빌려 때와 나를 살짝, 혹은 완전히 바꿀 수도 있다. 이 여행이 그랬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고 오롯하게 끝이 났을 때 남은 흔적이 깊고 진했다. 여행이 남긴 선물이다.
여행기를 완성하는 동안 새 직업을 갖게 됐다. 독립을 했고 삼십대가 됐다. 사랑과 이별을 하고 새 취미를 얻고 무엇인가를 배웠다. 나라 밖으로의 여행만 두 번 더했다. 감히 예측하거나 상상하기 힘들 만큼 삶은 성실하게도 나아간다. 축복이다.
나는 누구인지와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지금의 삶이 최선인지에 대해 여전히 확신은 하기 어렵다. 아직 흔들리고 가끔 두렵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전부 내려놓고 돌아서서 제자리를 찾고자 떠났던 이 여행을 계기로, 걸어갈 때 길이 되는 삶의 궁극적인 방향만큼은 어느 때보다 선명해졌다. 나의 불안은 자유롭고 아름답다.
여행 중에 우리는 발전하고 바뀌고 다른 사람이 된다.
- 레몽 드파르동 <방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