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reath in Aug 27. 2019

마드리드: 한여름 밤의 꿈

집으로 가는 길

20170824~20170826: Madrid, Spain


아프리카에서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는 티켓을 조회해보니 환승을 적어도 세 번은 해야 했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부터 나는 알고 있었다. 여독을 한 아름 끌어안고 바로 귀국해버리면 여러 의미로 한참을 꿈에서 깨어나기 힘들 것이란 점을. 연착륙이 필요했다. 제법 쌓인 마일리지도 한번 청산해야겠다 싶었다. 한국에 가면 얼마나 긴 시간 동안 백수가 될지 알 수가 없고 어쩌면 유효기간 내에 여행을 하지 못할 터였다. 인천까지의 직항 항공편을 마일리지로 살 수 있는 아직 가보지 못한 도시, 마드리드에서 마음을 준비하기로 했다.


골목의 어느 자전거, 난민에 대한 환영, 그림이 따로 없는 플랫폼과 왕궁의 위용. 20170824~20170825, 마드리드, 스페인

빈 몸빈 마음,

찬 도시


리빙스턴에서 요하네스버그, 카이로를 거쳐 마드리드까지. 비행기 안에서, 공항에서, 또 비행기에서 쪽잠을 자고 하루를 온종일 쓰고서야 도착했다. 케이프타운 시장에서 바가지 쓰고 산  깊고 파란 빛깔이 예쁜 코끼리 바지를 입은 채였다. 마드리드 공항은 너무 크고 차분하며 깨끗해서 나의 새파란 바지와 시커멓게 그을린 발, 닳을 대로 닳은 쪼리가 다른 세상의 것처럼 어색했다. 우버를 부르니 도착한 남색 벤츠에 타면서는 더욱 그랬다.


숙소에 가서 짐을 풀어 보니 시내에서 입을 만한 게 없었다. 묵은 곳에 영역 표시를 하듯 매일 무엇인가를 덜고 버린 덕에 가진 것이라곤 최소한의 필수품들 뿐이었다. 그 사이 짐은 백팩 하나와 더플백 하나로 여유롭고 단출하게 줄었다. 숙소 옆의 자라에 들러 마드리드에서, 또 서울에서 입을 만한 옷을 산 뒤 갈아입었다.


일단 걷기 시작했다. 일상이 묻은 표정으로 바쁘게 스쳐 지나는 사람들, 뜨거운 태양에 원색을 한껏 뽐내는 정갈한 건물들. 횡단보도를 매끄럽게 가로지르는 자동차들과 이따금씩 들려오는 정겨운 스페인어. 모든 것이 반가웠고 마치 어디론가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남미를 여행하며 한 달 동안 익혔으나 또 한 달만큼 떨어져 있었던 익숙하고 그리운 언어의 한복판으로, 번잡한 도시의 심장으로 돌아온 거였다.


쨍 해서 좋았던 건물들과 맛좋은 올리브들. 20170825, 마드리드, 스페인


7년 만의 스페인,

그때와 지금


나에게 첫 스페인은 7년 하고도 한 달 전의 바르셀로나였다. 빽빽하게 세운 일정에 맞춰 친구들과 거리를 쏘다니다가 가끔 지친 몸을 카페에 널브러뜨리고 어설픈 시에스타를 즐겼던 날들. 바르셀로나의 7월은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아찔하게 뜨거웠다.


그때의 우리는 그 땅의 태양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교환학생이 끝나고 한국에서 맞을 4학년이 두려웠다. 막 시작됐거나 끝난 풋사랑을 앓느라 조금은 아팠다. 하지만 함께였기에 늘 왁자지껄 두근거렸고, 각자의 속도로 영글어가고 있다는 감각만은 선명했다.


두 번째 스페인에서 나는 8월 끄트머리에서 한풀 꺾인 더위 같았다. 사흘 중 해가 있는 동안 그저 마드리드라는 도시를 거닐었다. 휴대폰도 표지판도 거의 보지 않았다. 걸음 닿는 대로 걷다가 그대로 공원을 산책하거나 프라도 미술관에서 더위를 쫓았다. 다리가 아프면 지하철을 타고 플랫폼과 오고 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지루해지면 인파가 쏟아지는 곳에 내려서 왕궁과 광장들을 둘러봤다.


말하거나 부지런하거나 바쁘거나 깔깔거릴 필요나 기회가 없이 혼자였다. 뭔가를 하는 것 같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시간을 보냈다. 확실하게 멈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한동안은 내 삶이 이보다도 더 고여 있는 것처럼 느껴질지 몰랐다. 귀국할 마음의 채비에는 완성이라는 것이 없어 공허했다.


광장과 거리. 남미가 제국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스페인에서 새삼 다시 생각한다. 20170825, 마드리드



을 꾸고, 깨어날 시간


다만 여행의 마지막 밤은 7년 전의 시간과 사람을 빌어 완성했다. 2010년, 벨기에 루벤에서 옆 방에 살던 마누엘이 마드리드에 도착했다는 내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보고 연락을 해온 덕분이다.

“수민!!!!!!!!!!!!!!!! 마드리드에 왔는데 나한테 연락을 안 할 수가 있어!!!???? 진심이야????”


마드리드에 있는 이들에게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 멋쩍은 마음이 들어 단념했었다. 우리들 사이에 7년의 간극을 메울 만한 이야깃거리가 없을 것 같았다. 그때와는 달라져버린 서로를 보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저녁이 시작되는 마드리드의 어느 횡단보도에서 마누를 본 순간, 내가 바보 같은 걱정을 했다는 걸 알았다. 마누가 특유의 간드러진 목소리로 내 이름을 외치며 달려오는데 7년 전의 일상이 어제와 같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마누의 아파트 앞 단골 바에서 한참을 떠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 석사과정 마지막 학기를 밟던  마누는 무사히 학위를 따고 그사이 직장을 두 번 바꿨다. 도전을 택했던 순간들에 후회가 없으며, 지금도 늘 그랬듯 일은 힘들기도 재밌기도 하다고 했다. 그동안 살아왔던 얘기와 요즘 하는 고민들을 나누다 보니 밤은 금방 무르익었다.


프라도 미술관과 거리, 오페라 지하철 역. 20170824~20170825, 마드리드, 스페인


이제야 스페인의 진짜 저녁이 시작됐다며 호들갑을 떨던 마누는 하우스메이트들을 전부 불러냈다. 옛 이웃의 이웃들과 함께 그들의 동네 맛집에서 저녁을 먹고, 그들이 자주 가는 클럽에서 귀가 얼얼하도록 음악을 들으며 바보 같은 춤을 췄다. 예상하지 못했던 선택들이 서로 맞닿아 여행의 끝이 더없이 풍성하고 시끌벅적했다.


마누를 만난 순간으로부터 정확히 24시간 뒤, 나는 마일리지를 탕진해 끊은 국적기 프레스티지석에 어색하게 기대어 있었다. 다시 쪽빛 코끼리 바지를 입고, 도처에서 들려오는 모국어와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얼굴들에 얼떨떨해 하면서. 기나긴 비행, 한숨 푹 자고서 기내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니 하루 뒤의 고국이었다. 70일이 찰나 같았다. 한 여름밤의 꿈이라 해도 좋았다. 달고 귀했다. 깨어나고 싶지 않을 만큼.


So quick bright things come to confusion.
- William Shakespeare,
<Midsummer Night’s Dream> 1.1.149


배불러 남기는게 슬퍼 두고두고 생각났던 산히네스의 츄러스. 공원의 유리 정원. 흐린 날의 마드리드와 안녕. 20170825~20170826, 마드리드, 스페인



이전 28화 빅토리아 폭포: 급류 밖의 세상으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