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나는 영어선생이다) 체육선생이 다가오더니 나에게 물었다. "샘, 결혼했어요?"라고.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뭐, 지금은 혼인상태가 아니니까 아니라고 대답했는데, 내 번호를 물어보며 밥을 먹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과감하네 싶어서 그냥 줬다.
현재의 나는 총각남자를 만나는 게 좀 부담스럽다. 그건 내가 지금 진지한 연애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누군가에게 내 삶의 일정 부분을 할애하는 것이 두렵다. 누굴 좋아하는 것도, 누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모두 겁이 난다. 총각이라면 결혼에 대한 기대와 환상이 있을 텐데, 나는 그런 기대를 가진 사람과는 시작하고 싶지 않다. 서로의 시간을, 특히 상대방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저녁은 먹을 수 있지!' 싶어서 체육선생과 밥을 먹었다. 나랑 동갑이고, 결혼 생각은 없단다. 동거 경험도 있고, 제법 진한 연애를 했던 것 같더라. 나에 대해서도 집요하게 묻기에 첫 데이트부터 이야기했다. 이혼했다고.... 그리고 그 이후 이 동네로 직장을 옮겨온 거라고. 아이가 없는 이유를 묻기에, 유산한 경험까지 말했다. 말하는 게 쉽진 않았지만 다 얘기했다. 그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경험이니까. 이혼과 유산을 빼면, 사실 어떤 대화도 진짜로 시작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런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묘하게 언행에서 전남편이 겹쳐 보였다. 하긴, 전남편도 체대생 스타일이었지..... 거의 아마추어 크로스핏 선수였으니까. 운동하는 쪽 계열은 생각하는 것도 비슷한가보다. 자기 생각이 맞다고 우기는 것, 감정은 어느 지점까지만 보고 그 이상은 보지 않으려는 것에서 말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감정이입하며 말하자, "오바한다. 예민하게 군다. 과하다. 세상 모르네."라는 식으로 말하는데, 이것조차 전남편과 똑같았다.
이혼까지 하고도 상대방에게 이런 말을 또 듣고 있다니, 황당하고 짜증이 났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하며, 전남편 투사를 해가며 속으로 화를 팡팡 냈다. 이런 데이트를 하고 나니 확실해졌다. 나는 저런 세계를 떠났고, 앞으로도 더 떠나야 한다. 야생적이고 단순하며 자수성가형의 남자. 그런 남자는 나의 예민함과 친절함을 받아줄 수 없다. 이걸 누가 알아줄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예민한 사람' 취급을 받을 필요도 없다.
나는 SNL이나 직장인들 같은 예능을 보며 웃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조용하고 어둑한 곳에서 미술 전시를 보는 것과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를 좋아한다. 나는 철학과 문학, 도서관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번 일로 내가 누구인지, 어떤 세계에 속하는 사람인지 더 또렷이 알게 됐다. 즉, 나는 소수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이 여린 감수성을 갖고 상대방에게 억지로 맞추거나, 이해받으려 애쓰지 않을 것이다. 좋아하지도 않는 프로그램을 함께 보며 옆에 앉아있던 시절은 끝났다. 그런 식으로 나는 나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살 것이다. 나의 이런 소수성과 감정은 귀하다. 소중하게 다뤄줘야 한다.
다행이다. 과거의 습과 중력은 너무도 강력하고 진해서, 전남편 같은 남자에게 다시 빠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경계 신호를 알아차렸고, 그 세계를 떠나온 나와 안 돌아가겠다고 선언하는 나를 확인했다. 이제는 쥐어짜야 눈물이 나는 시기가 왔다. 이 또한 답답하긴 매한가지지만, 나는 지금도 강을 건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