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R과 이태원에 가서 점심을 먹고 pace gallery 전시를 봤다. 사실 그 주 내내 너무 무리했던 터라 집에서 쉬고 싶었다. 하지만 보고 싶었던 전시가 그날이 마지막이라,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섰다.
R은 유당불내증이 있다. 첫 데이트 때는 귀여운 헬로키티 케이스에 약을 챙겨와서 밥 먹는 도중에 꺼내 먹더니,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점심 메뉴 고르는 데 꽤 오래 걸렸다. 샐러드에도 치즈를 빼야 하고, 샌드위치에도 뭘 넣고 뺄지를 확인해야 했고… 내가 먹고 싶은 라구파스타나 부라타 치즈 들어간 메뉴는 어림도 없었다.
그는 이런 자신의 디스어드밴티지를 전혀 미안해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당연히 맞춰줘야 한다는 듯한 태도였다. '아니, 나는 부라타 치즈 먹고 싶다고! 나도 내가 먹고 싶은 걸, 그냥 먹고 싶다고!' 물론 1인 1메뉴 시켜서 각자 먹을 수도 있었지만, 그에겐 그런 옵션은 아예 없는 것처럼 보였다. 뭐든 같이 시켜서 나눠 먹어야 한다는 당연한 룰처럼.
이미 그 순간부터 기분이 상했다. (물론 치즈를 못 먹은 것도 있다, 인정한다 ㅋㅋ) 그런데 갤러리에서도 그는 계속 내 옆에 딱 붙어 다녔다. 작품은 안 보이고 숨이 막혔다.
그때 알아차렸다.
아, 나 혼자 있고 싶다. 조용하게, 시선 없이, 나 혼자 관람하고 싶다.
나는 22살부터 오랜 시간 한 사람과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그 관계 안에서만 놀고, 함께 보내고, 연락하며 살아왔다. 두세 명이 같이 밥을 먹고 노는 경험도, 특히 남녀가 섞여 함께 어울리는 시간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혼 후에도 나는 익숙한 방식대로 누군가 한 사람에게 기대고, 독점적 관계를 찾았다. 그가 사라진 자리를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새로운 distraction을 만들고 싶었던 거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고, 예뻐해지는 걸 통해 ‘나 괜찮아, 나 잘 살고 있어’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복수심도 있었다. ‘당신 떠나도 나는 이렇게 잘 살아. 인기 많아. 아무렇지 않아’ 같은 마음.
하지만 그런 감정으로 데이트를 하고 나면, 매번 거대한 이별의 감각이 밀려왔다. 공허함, 눈물, 방향 잃은 마음이 줄줄이 뒤따랐다.
‘왜 당신이 내 옆에 없는 거지? 지금 나는 뭐하고 있는 거지?’
‘그럼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헤어진 건 서로의 선택이라는 것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분명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다른 사람은 만나기 싫고, 그렇다고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사랑을 못할까봐 무섭기도 하고. 복합적인 감정들이 쉼 없이 얽히고설켜 있었다.
그러다 그날 저녁, 확실해졌다.
나는 누군가와 1:1로 exclusive한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
그리고 누군가가 애인처럼 굴거나, 보호하려는 제스처를 취하거나, ‘우린 이런 사이야’라고 말하는 게 정말 싫다.
내 삶에 누가 들어오는 게 이렇게까지 싫었나? 나도 놀랐다.
숨막히고, 뭔가가 끈적하게 들러붙는 느낌. 자꾸만 도망가고 싶었다.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는, 기르고 있던 젤 네일이 발라져있는 손톱을 또각또각 잘라냈다. 예쁘게 손질했던 손톱이 아깝기도 했지만,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그건 내게 하나의 의식이었다.
무의식적으로 관계를 정리하고, 내 마음에 솔직해지는 리추얼.
나는 다시 짧은 손톱을 가진, 내 욕망에 정직한 희연이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데이트 대신, 우르르 몰려서 n빵하며 노는 친구들과의 만남에 집중하려 한다. 지금의 나에겐 그게 훨씬 재미있고, 가볍고, 좋다.
아, 물론 적극적인 ‘혼자 있기’도 계속 진행 중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