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per date night

by Tess

지난 금요일, 같이 일하는 원어민이 소개해 준 영국남자와 두 번째 데이트를 했다. 첫 데이트때는 상대방이 너무 긴장한 티를 내서 나도 덩달아 어쩔 줄을 몰랐다. 하지만 계속 연락을 해서 그런가? 두 번째는 나도 설렜고 그도 준비해 온 티가 많이 나서 정말 좋았다!!! 베트남에서 만난 동갑친구, 이혼변호사 언니가 해 준 대전공무원과의 소개팅, 껄떡대는 남사친 이후에 만난 제대로 된 남자와 데이트랄까?! 그 동안 해 온 bad date들을 보상받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먼저, R은 서촌에 자기가 잘 아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있다면서, 괜찮다면 같이 가자며 연락을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엔 금요일 저녁으로 식당을 예약했다며 준비된 모습을 보였다. 약속 당일! 지하철 역에서 만나기로 해 기다리고 있는데, 꽃다발을 들고오는 것이 아닌가! 두둥>< 내가 첫 데이트때 핑크색 니트를 입은 것을 알고는 분홍색 꽃을 넣었다고 하면서... 여기서부터 'what a gentleman!' 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사려깊은 배려는 정말 오랜만에 받아본다.


함께 간 식당은 경복궁역의 '고치비'라는 곳이었는데, 진짜 맛있더라! 자기가 대학원을 다닌 교수님과 왔던 곳이라면서 능숙하게 메뉴추천을 하고 주문하는데... 이것조차 감동이었다. 동시에 전남편과의 관계에서 '누나역할'을 하던 내가 보였다. 어디가고 싶냐고 물어보는 것도 나, 식당을 알아보는 것도 나, 식당에 가서도 주문을 하는 것도 나였다. 하지만 R 옆에서 나는 데이트 상대이자 한 명의 여성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되는...? 그런 대접받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아! 심지어 당연한듯이 저녁값을 자기가 내는데.. 뭐랄까? 거의 더치페이를 하던가, 아니면 얻어먹어도 마음이 불편하던 동갑남자와 사귀거나 살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이 모든 것이 다 새롭고 색다른 경험들이다.


저녁을 먹은 우리는 그 근처의 와인바에 갔는데, 이것도 R이 다 검색해서 알아서 데리고 갔다. 난 그냥 가만히 있었움 ㅋㅋㅋㅋㅋ 심지어 외국인인데도 나보다 더 잘알더라. 나는 태어나서 '경복궁역'이란 곳도 처음가본데다가 금요일 밤 10시에 밖에 나와있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 정도로 내가 남자와의 데이트 경험이 전무하단 게 보였다. 하지만 이게 뭔가 아쉽다거나, '아휴.. 그것도 못해보고'란 판단이 올라오진 않았다. '이제부터 하면되지! 너무 신난다><'라는 마음이었다.

와인바에서도 신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라 좋았다. 그도 한 여자와 14년 정도를 만나고, 2년 전 쯤에 결혼생활을 정리했던지라 나와 와닿는 지점이 많았다. 인생의 어떤 지점을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점. 사회학을 전공한 사람이라 내가 이야기하는 철학자들을 아는 점. 책읽기를 좋아하는 점 등등이 모두 닮았더라.

나는 신나서, 내가 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빠지게 되었는지.. 얼마나 되찾고 싶어하는지 혹은 회복하고 싶어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 이런 욕구와 욕망이 들뢰즈 공부와 프랑스어 공부 그리고 세계철학사 세미나로 이끈 것도... 그는 내 말을 참 잘 들어줬다^ ^ 이것도 '공부 왜 하냐... 이런 너 때문에 내가 너무 불행하다. 공부 관둬라'라면서 박해하던 전남편과 겹쳐서... 씁쓸함과 동시에 어떤 자유, 해방감을 동시에 느꼈다.


금요일 비가 내리는 서촌의 분위기는 정말 다른 세상에 온 것 같더라. 이런 세계가 있는 지 몰랐다. 식당들과 카페 그리고 빈티지 샵, 재즈바 등등 이렇게 구경할 게 많고 예쁜 가게들이 많은지 전혀 몰랐다. Alice in wonderland 에 온 것 같았달까? 이런 순간을 R과 보낼 수 있어서 기뻤다. 밤 11시 30분쯤 전철을 타고 집에 오는데.. 이렇게 젊은 사람이 많다니! 이런 사람들이 다 전철을 타고 있다니! 하는 것도 놀라운 지점이었다. ㅋㅋㅋㅋ 나는 정말 아이 혹은 할매처럼 살고 있었나보다 ㅠㅠ


금요일의 데이트는 내가 얼마나 '연결성'에 목말라했었는지를 보게 해준 경험이다. 나를 보고, 나의 말에 귀 기울여주고, 서로의 이야기에 깊게 공감하면서... 사람에 대한 연결성이 채워지니, 스킨쉽이 하나도 없어도 충만함이 차오르더라! 결국 나는 나를 봐주는.. 나를 이해해주는.. 이런 복잡한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남자 사람을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데이트가 참 완벽했다><


아! 전남편과의 비교말고도 내 안에서 뭔가 달라진 것을 발견했다. 시선이 나에게로 들어왔달까? 예전엔 꽃을 선물받으면 '남들이 나를 대접받는 여자로 생각하겠지?'하면서 좋아했다. 즉, 남들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보는지가 중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R이 나를 위해 준비했구나. 그 진심이 너무 예뻐보인다' 하면서 꽃다발이란 선물이 좋았다.

또 내가 키 크고 대머리인 백인과 다녀도 스스로 아무 신경을 쓰지 않더라. 저런 백인 옆에 나 정도면 제법 눈에 띄는 조합인데 ㅋㅋㅋㅋ 나는 정말 아무 신경을 안썼다. 서로를 탐색하는 것에 더 집중했달까? 이런 순간, 나는 내가 '어른의 관계맺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그런 시선에서 멀어져서, 그 순간의 내 욕망과 상대방과 어떤 시간을 만들어나갈지에 집중하는 것! 그걸 내가 하고 있어서 과거의 내가 있던 세계에서 참 많이 멀어졌다는 걸 느꼈다. '안희연 멀리왔구나! 이 정도로 컸구나!'하면서 좀 으쓱했달까?

R과 깊은 대화가 가능했던 것도 내가 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떠어떠한 걸 겪었고 경험해왔고, 아직 어떤 부분은 과정중에 있다'라고 언어화 할 수 있기 때문에... R과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드디어 나는 부모와 전남편, 사회 등의 큰 중력에서 벗어나 나만의 인력과 척력을 가진 우주를 만들어내고 있다. 애쓴 나에게 박수를!!!


제대로 된 데이트를 보낸 밤. 덕분에 많이 설렜다. 울음 속에서도 피어나는 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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