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이란 시험

관계로부터의 독립

by Tess

최근에 소개팅을 했다. ㅋㅋㅋㅋㅋㅋ 그것도 내 이혼을 도와준 변호사 언니의 소개로! 이 언니는 내가 스물아홉에 결혼할 때는 증인으로, 이혼할 때는 재산분할로, 이제는 소개팅까지 시켜주는 풀코스 동행자다. 언니 남편의 친구라길래 ‘그래, 밥은 먹어보자’는 마음으로 만났는데… 이 사람이 일으킨 폭풍이 제법 크다. 에너지가 쪽쪽 빨리고, 전에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고민이라 마음이 무거운거다.


나는 아직 전남편과의 관계가 심리적으로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고, 그런데 누군가의 대쉬가 들어오니까 정신이 없다. 더구나, 15년간 한 사람만 만났던 내가 ‘이 사람을 만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박하고 신선했다. 이런 분야에 너무도 모르고, 취약한 나를 본다.


요약하자면, 끝났다. 그는 대전에서 근무하는 제법 고위직 공무원이고, 아이가 있다. 나는 그냥 새로운 사람이랑 밥도 먹고 데이트도 해보자는 가벼운 마음이었는데, 그는 꼭 결혼을 할 거란다. 여기서부터 이미 쎄했지만, 대화만 잘 통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 두 번을 더 만났다. 심지어 내가 KTX 타고 대전까지 내려갔다.


하지만 접점이 하나도 없다. 문학과 철학을 좋아하고, 시선을 피해 해외여행을 가고, 전시나 공연 같은 문화를 즐기며 언제든 떠나고 싶은 내가 있고, 다른 한편엔 명예욕이 있고, 고대를 나온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며, 공무원이라는 위치에 만족해 살아가는 그가 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다.


처음부터 말했었다. 나는 결혼 생각이 없고, 내 취향에 따라 살고 싶고, 나를 따스하게 지켜봐줄 사람이면 좋겠다고. 하지만 그는 계속 “나는 꼭 결혼할 거예요. 전 결혼이 너무 불행했기에, 다음엔 꼭 다시 할 거예요.”라고 말한다. 부담스럽다. 아니 아저씨… 우리 두 번밖에 안 만났어요…

"저는요, 정말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과 15년을 함께 살았고, 뜨겁고 차갑게 지지고 볶았고, 그 결과 남자와 사랑과 결혼생활에 대한 모든 환상이 사라졌어요. 그래서 결혼을 원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데도 그는 내가 가진 조건이 마음에 들었는지 자꾸 보자고 했다. 30대 후반, 일찍 퇴근하는 직장, 야무지게 취미생활 하는 모습, 아이 없음. 조건이 좋아보였던 거겠지. 나는 누군가가 나를 좋다고 하니까, 그리고 세상엔 다 맞는 건 없으니까, 어느 정도는 참고 만나야 하나 싶어서 통화도 하고, 만나도 봤다. 어른스러운 관계는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또 누군가 나를 ‘여자’로 봐주는 느낌도 좋았다. 누군가가 나에게 호감을 표시한다는 것도, 다시 시장에 나온 내가 어느 정도 ‘먹히는 느낌’이 드는 것도. ‘전남편아, 봐라. 나 이렇게 대접받는다. 좋은 차 타고, 비싼 밥 먹는다’는 복수심도 있었다. 거기에 세상의 시선과 기준이 겹쳐서 불안감도 들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지도 몰라. 더 늙기 전에…’ 그런 조급함과 불안에, 내가 잡아먹혔다.


그렇게 폭풍 같던 2주를 보내고 나니 정신이 들었다. 나는 욕망이 가득한 남자와는 함께할 수 없다는 것, 아버지에 대한 투사가 일어나서 설렘처럼 느껴졌지만 사실은 두려움이었다는 것, 그게 보인다. 높은 위치에 있고, 자기 자랑이 자연스럽고, 일에만 빠져 사는 사람. 그런 사람 옆에서 얼마나 외로운지, 나는 엄마를 통해 평생에 걸쳐 뼈저리게 배웠다. 그리고 그런 엄마 밑에서 자란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도. (그게 나니까.)


2주 동안, 참 많은 것이 올라왔다. 그의 전 아내가 미인대회 출신의 재벌집 딸이었다는데, 신부수업만 받다가 결혼해서 우울증이 심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부모의 욕망에 잡아먹힌 자식’이 겪는 말로를 목격한 느낌이었다. 와, 너무 다행이다. 내가 40이 되기 전에 칼을 빼들고, 이혼하겠다, 독립하겠다 마음먹고 실행해서 정말 다행이다.


그 아저씨는 조건을 보고 결혼했지만 10년간 불행했고, 이제 또 다른 사람을 찾고 있었다. 비슷한 여자를. 그러다 나 같은 사람을 만난 거다. ㅋㅋㅋㅋㅋ 이 모습을 보며, 나는 오히려 전남편을 응원했다. “잘했어! 나 버리고 간 거 잘했어. 각자 자기 몫 챙겨서 떠난 거, 정말 잘한 일이야. 우리는 각자 있어야 할 곳에서 살아야 해.” 그런 마음이 들었다.


이번 소개팅은, 과거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선택한 일이었다. 22살, 아무것도 없고 불안했던 내가 만났던 사람과 결혼해서, 그대로 살아온 지난 시간. 38살이 된 지금, ‘이제 나이에 맞는 사람과 연애를 해봐야겠지’라는 생각으로 조건만 보고 만났는데, 안되더라. 나는 이게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좋은 차 타고, 비싼 밥 먹고, 사람 좋은 척하는 누군가 옆에 있어도 마음이 불편하면 안 되는 거였다. 만나면서 손이 시리고, 소화가 안되고, 대화는 겉돌고, 통화는 매일 오고… 이건 설렘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아빠한테 전화 올 때처럼 떨리는 느낌. 이걸 알아차리자, 이미 끝났다는 것이 보인다.


그 아저씨는 토요일에 내 동네로 오겠다고 했다. 나는 이혼 후 혼자 사는 집에 친구도 부르고, 남자들도 불러서 놀았지만 (아무 일도 없었음) 이상하게 이 아저씨만큼은 절대 안 왔으면 좋겠다. 아예 우리 동네로도. 내 공간, 내 영역에 들이고 싶지 않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은 나에게 무의식적으로 아버지였다.


그에게 거절의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그런데 그게 무서워서 아직 못 보내고 있다. 이것도 아버지 투사겠지. 내게 아버지는 거대한 존재였고, 그에게 거절을 한다는 건 공포에 맞설 만큼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까. 그럼에도, 할 것이다. 해낼 것이다.


오늘 밤은 과감한 용기가 필요하다. 괜찮을 것이다. 괜찮다. 나는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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