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차례 크게 앓고 지나갔더니, 내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 보인다. (물론 1년전의 내 상태가 워낙에 유리관 안에 쌓여있기도 했다.)
먼저, 해가 지고 어두운 데 혼자 돌아다니는 내가 보인다. 얼마나 전업주부 혹은 엄마의 목소리에 쌓여있었는지 밤 8시만 넘어도 밖에 안나가던 나였다. 해가 어둑어둑해지면 무슨 신데렐라마냥 집으로 귀가했던 나다.(그러고보니 이것도 여성을 향한 집단무의식인가보다. 신데렐라. 밤 12시. 어두움 등)
그런데 어제는 반납해야 할 책이 있어서 밤 9시에 혼자 나갔다. 비도 맞고 싶길래 우산 안쓰고 우비만 입고 책을 싸안고 다녀왔다. 왕복 30분거리를 혼자 걷고오니 좋더라.. 생각 정리도 되구. 모르는 동네지만 전혀 모르지 않는 길을 음악을 들으며 비를 맞는데, 참 자유롭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거 말고도 친구들이랑 밤 늦게까지 놀고 11시-12시에도 씩씩하게 혼자 걸어서 집에 가곤한다. 그때는 또 '빨리 집으로 들어가야해'라는 어떤 조급함에 휩쌓이지만, 예전같지 않다. '밤에 밖에 있는 나는 위험해.. 그러니 누가 나를 데리러왔으면, 보호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1도 없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흔들리지 않는 내가 보인다. 작년의 글을 보니, 나와 연락이 조금만 안되어도 집으로 찾아와 난동을 부리는 엄마(+아빠)가 있더라. 이런 부모를 둬서 미칠것 같다라며 토로하는 내가 있고.... 하지만 이제 나는 엄마 아빠가 난동을 부려도 ㅋㅋㅋㅋ '뭐 때문에 서운하다, 너 주려고 찾아왔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건 엄마, 아빠의 욕망. 더이상 이들과 이들의 욕망이 내 삶에 침투하도록 두지 않는다.
물론,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무더위에 건강 잘 챙기셔라라면서 안부전화를 드리면, '할머니에게 전화해라. 보고싶어하신다'라고 패턴화 된 반응을 보이는 아부지가 있다. ㅋㅋㅋㅋㅋㅋㅋ 이제 나는 거기에 싫다고 한다. 그건 아빠가 원하는거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할 말은 한다. 다만 이제 더 이상 내가 받아야 될 사랑이 할머니에게 갖다면서 억울해하진 않는다. 나에게 줄 사랑은 내가 잘 인지하며 보듬어 주고있다.
마지막으로 이제 더 이상 여기저기 '내 고통을 알아주세요. 나는 유산을 두 번이나하고, 최근엔 평생의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랑 이혼한 여자에요. 그렇게 내 고통이 커요' 라면서 알아주길 토로하지 않는다. 심지어 섹스파트너에게도 ㅋㅋㅋㅋ 이런 이야기를 하던 나였는데, 이 친구와 정리하면서 저런 '말하고자 하는 충동'도 수습이 된 것 같다. 혹은 '상처있는 여자'로 보이려는 전략을 그만 쓰고 싶은 것 일수도... 이만하면 됐다.
내 서사, 내 고통은 내가 잘 간직하며 살면 될 것 같다. 그런 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내가 겪은 모든 일들이 내 정체성을 이루는 것도 맞다. 하지만 이걸 '알아주길 하는 마음'에서 말하고 다니는 것은, 막 흘러 넘친 것은 이제 어느정도 잡힌 듯하다.
이런 지점들을 보면, 정말 많이 온 것 같다. 지난 1년간 여러 성장의 변곡점들이 있었는데, 울면서도 모든 할 일을 해내는 나_ 밥 잘 먹고, 한약도 지어먹는 나_ 필요한 도움을 적절한 사람에게 요청하는 나_ 봐야할 것을 보고 넘어가는 나 모두가 합쳐진 나들이 있었다. 그리고 홀로서려는, 홀로 설 수 있는 내가 있다. 그런 내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