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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 만한 간호사 Jan 28. 2022

불효자, 보호자, 간호사.

Anecdote

1.

웬일인지 아홉 시부 터 눈이 떠졌다. 배가 고파 주섬주섬 일어나 라면을 끓이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 평소라면 받지 않았을 텐데 잠이 덜 깨서인지 그냥 덜컥 받아버렸다.

-혹시 강 OO 씨, 보호자 되시나요?

익숙한 톤이었다. 병원에서 셀 수 없이 내가 전화로 건네던 낮은 목소리 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보호자는 아니지만, 아들입니다.

나는 방어적으로 대답했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젠지 기억이 흔들렸다.


-에.. 그.. 강 OO 씨가 돌아가셨습니다. 오늘 새벽에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아빠 얘기만 들으면, 나는 무척 냉소적으로 변해서 곧네 침착하게 그럼 곧 가겠다고 말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확인하고 파트장님께 전화해 오늘은 출근하지 못하게 됐다고 알렸다. 그러고는 자리에 앉아 불어터진 라면을 먹었다.


2.

시흥시에 도착했다. 아빠와 살던 곳, 그리고 우리가 떠난 뒤에 아빠가 혼자 살던 곳.

그곳은 여전히 어수선하고, 어두운 곳이었다. 내 어릴 때 보던 풍경처럼.

아버지는 자택에서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래서 가까운 병원의 영안실로 옮겨져 있어서 나는 곧장 그곳으로 갔다. 직원이 ‘얼굴을 보시겠냐.’고 물었다. 동생과 나는 괜찮다고 했다. 살아있는 얼굴로 기억하고 싶어서, 10년이나 못 본 얼굴이 너무 병들고 늙어있으면 괜히 마음만 아플 것 같아서. 그럼 장례식은 하실 거냐고 물었다. 우리는 그것도 괜찮다고 했다. 올 사람이 없는 장례식장이 너무 쓸쓸하기만 할까 봐, 그렇다고 나도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은 아빠를 이제 와서 내 주위 사람들에게 인사드리러 오라고 하기에도 염치가 없었으니까.


중환자실 간호사로 일하며 병원에서 많은 죽음을 배웅했다. 중환자실에서 치료받고 돌아가시는 환자들은 눕는 차를 타고 영안실이나 장례식장으로 간다. 그 뒤에는 어떻게 되는지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직접 겪고 있으니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뿐이었다.

식을 치르지 않기로 해서 어디로 안치해야 할지, 또 생전의 기록들과 서류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아보는 도중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발견한 사람을 만났다.


- 저는 형님이랑 가까이 살면서 돌봐드리던 같은 교회 식구예요. 형님이 하도 아들 자랑을 많이 하셔서 궁금했는데 이렇게 뵙게 되네요. 혹시 장례는 하시기로 하셨나요? 교회 분들이 오신다고 하셔서.. 아, 놀라셨죠. 아버지는 몇 년 전부터 교회에 열심히 나오셨어요. 그렇게나 기독교 싫어하시던 분이었는데. 몸이 약해진 뒤로는 제가 휠체어 끌고 주일마다 교회에 데려가고, 교회 사람들이 집에도 자주 와서 먹을 것도 챙겨드리고 그랬어요. 큰 아드님은 알고 계시죠? 형님이 루게릭병 앓고 계셨던 거..


3.

그래. 나는 알고 있었다. 더는 이름이 등본에 같이 실리지 않더라도, 그 사이 연락처가 몇 번이나 바뀌어도 아버지의 소식은 어떻게든 나에게 닿았다. 그래서 모르는 전화를 쉽게 받지 않게 된 것도 그래서였다. 3년 전쯤, 뜬금없이 고려대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대뜸 아버지가 루게릭인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냥, 그러냐고 했다. 알겠다고. 하필 무슨 그런 병이냐. 아빠는. 진짜 멀리서도 사람 속을 불편하게 만든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술을 진탕 마셨다. 잊어버리려고. 아마 아빠도 이래서 술을 그렇게 마셨나. 취한 정신에 생각하다가, 애써 덮어놓았다.


정왕동 사무소에서는 꾸준하게 연락이 왔다. 아버지를 담당하는 사회복지사인데 한번 얼굴 뵈러 오는 게 좋지 않겠냐고, 보호자라고 뭐 해야 되는 것도 아니니 그냥 인사만이라도 하라고. 나는 자꾸만 정기적으로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저 무례함이 무척 불쾌했다. 알겠다고. 준비가 되면 갈 테니 더는 연락 안 주셔도 된다고. 결국,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거다. 아빠를 볼 준비도 안 되었지만, 정작 이렇게 보낼 준비도 안 되어 있었으니까.


4.

결국, 장례는 치러졌다. 보호자는 우리가 아니라 그 교인분이었으니, 그분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교회에서 생각보다 많은 분이 와서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면서 자리를 채워주셨다. 동생과 내가 결근한 탓에 회사에서도 소식을 들은 동료들이 와서 아버지에게 인사를 했다. 그 장면이 몹시 죄스러웠다. 남의 아버지를 보러도 이렇게 시간 내서 올 수 있는 걸, 나는 단 한 번도 그러지 못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배웅받을 줄 알았다면 아버지는 좀 덜 쓸쓸했을까.


많은 전화를 받고, 위로를 받으면서도 정작 크게 실감이 나질 않다가 문득 세상이 가라앉는 것 같은 공허함이 밀려왔다가. 묘한 기분이었다. 사람들의 힘내라는 말이 힘없이 눈앞에 떨어져 눈 위에 소복이 쌓여있었다.


다음 날, 동생과 나는 아버지를 보기로 했다. 엄마가 그래도 마지막 모습은 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설득한 탓에, 내키지 않았지만 우리는 관 앞에 서 있었다. 무거운 관 뚜껑을 열자 환자의 모습이 있었다. 어릴 때 기억하던 훤칠하고 장난기 넘치던 얼굴은 없고, 삐쩍 마르고 야윈 머리도 새하얀 할아버지가 누워있었다. 우리의 공백 동안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하지 않아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슬펐다. 하지만 울지 않으려 애썼다. 여태 해온 불효자 역할에는 그게 더 이치에 맞는 것 같아서. 이제 와서 울 자격도 없었으니까.


5.

화장을 하고, 공설묘지에 아버지를 안치했다.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아버지는 혼자 살고 계셨고, 보호자도 없으니 그 집을 정리하고 반납해야 했다. 그 일이 가장 걱정이었다. 아빠가 혼자 살던 원룸. 거기 들어가면 그간 그가 지낸 모습이 속속들이 그려질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그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자꾸만 눈앞에 훤히 그려지는 고단하고 병든 삶의 잔상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지만 동생이 ‘형. 그래도 우리가 이거라도 해야 돼.’ 하는 모습에 애써 괜찮은 척했다.


이주민 단지의 허름한 빌라 1층, 어둑한 복도를 지나 집에 들어갔다.

좁은 화장실에는 싸구려 세면용품들이, 냉장고에는 누가 정리해준 것처럼 햇반, 라면, 휴지 등이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꿉꿉한 방에는 아무것도 깔려 있지 않은 작은 매트리스 하나와 이불, 옷가지 몇 개, 그리고 지갑과 수첩 하나가 놓여있었다. 구석구석 습기가 차서 벽지가 까맣게 슬어있었다.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우리는 이 공간을 빨리 나가려고 가장 큰 쓰레기봉투를 사 와 손에 집히는 대로 거기다 쑤셔 넣었다. 짐이 아무것도 없어 생각보다 정리는 금방 끝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수첩과 지갑을 넣다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무심코 한번 열어보았다. 지갑을 펼치자마자 보이는 것은 동생과 내 태권도 품증이었다. 아무도 기억할리 없는 품증 같은 거. 너무 오래되어 코팅도 벗겨져 빛바랜 증명사진이 품증에 붙어있었다. 활짝 웃는 초등학생 둘. 그가 기억하는 우리의 모습은 저런 것이었을까. 참았던 눈물이 밀려 나왔다. 더는 멈출 수가 없었다. 옆에 놓인 수첩을 열자, 필담들이 적혀있었다. 중환자실에서 환자들이나 쓰는 그런 종류의 것. 아빠는 제대로 말할 힘도 없었나 보다.


첫 장에는 ‘배가 고파요.’라고 쓰여 있었다. 첫 장에 쓰인 다섯 글자. 좁은 방이 슬픔으로 가득 차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죄책감, 그리움, 미안함, 후회, 기도,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여 주저앉아 동생과 부둥켜안은 채 무너지듯 엉엉 울었다. 그 수첩에는, 장남 강ㅁㅁ- 강북삼성병원. 차남 강ㅇㅁ- 경기대학교 4학년이라는 글씨가 또박또박 쓰여있었다. 아빠도 우리가 어디 있는지, 뭘 하는지 다 알면서도 찾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아픈 자기가 짐이 될까 봐. 그렇게 배가 고픈데도, 전화한 번 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남들에게 우리 자랑을 했다니, 보러 오지도 않는 새끼들을. 우리는 그대로 거기에 무너져서, 다시는 전처럼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빠는 그렇게 싫어하던 하나님에게, 무슨 기도를 하러 아픈몸을 끌고 교회에 갔던걸까.

동생과 나는 몇 시간 동안 거기 앉아서 더는 들리지 않는 아빠에게 미안하다고, 진짜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죄송하다고 울었다.


6.

그 뒤로 일상은 전과 같이 돌아갔다. 여태까지 인생에서 없었던 사람이 없어졌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일은 없었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보호자들이 위독한 보호자들을 외면하거나, 피할 때면 어김없이 트라우마가 발현한다. 그들 중 한 명만이라도 제발, 이 되돌릴 수 없는 고통과 죄책감을 덜 수 있었으면, 후회하지 않았으면 하고 속으로 기도하면서 한 번 더 정말 괜찮은지 여쭙게 된다.


또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건 아마 자신이 천국에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이 그곳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언젠가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라는 걸, 아빠에게 배웠다는 점 정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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