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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 만한 간호사 Jan 18. 2022

중환자실, 영상통화

P 할아버지는 벌써 중환자실에 넉 달째 같은 자리에 계셨다.

흉부외과에서 막힌 심장 혈관을 우회하는 수술을 받고 입실한 뒤로, 좋아질 때 즈음마다 어김없이 폐렴이나 신부전 등이 번갈아가며 아저씨의 상태를 악화시켰다. 오랜 투병 끝에 얻은 여러 항생제 내성균들 덕에 치료 효과는 눈에 띄게 둔화됐다. 결국 그는 기관절개술을 시행하고 나갈 기약 없이 중환자실에서 누워있었다.

의식은 무척 명료한 데다 워낙 꼬장꼬장한 성격이어서, 환자는 소소하게 불편한 것들도 참지 못하고 한 시간에도 몇 번이나 호출 벨을 누르는 것이 문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달간 침대에 내내 누워있기만 하면 침상의 작은 주름이나 베개 위치, 조명 세기 등 평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몹시도 거슬리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하다. 하지만 간호사 입장에서는 다른 환자 처치 중에 급하게 격리 가운을 입고 호출 받아 들어가 보면 베개를 좀 위로 올려달라거나, 발을 씻겨달라는 둥의 얘기를 들으면 맥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으니 간호사들이 별로 좋아하는 환자가 아닌 것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반면에 상태는 제법 안정적이어서 손이 가는 환자가 아니었으므로 주로 차지 간호사들에게 배정되곤 했는데, 그날도 그런 이유로 며칠째 내가 담당이었다. 루틴대로 환자의 상태를 보호자인 할머니에게 전화로 설명하다가, 문득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드려야겠다는데 생각이 닿았다.

-혹시 보호자분, 지금 집에 계세요?

-네. 집인데요.

-괜찮으시면 제가 지금 제 핸드폰으로 잠시 영상통화 걸면 받으실 수 있나요? 할아버지가 기관절개 때문에 말씀은 못하시지만 얼굴은 보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뜬금없는 질문에 잠깐 침묵이 이어졌다가 보호자는 지나치게 감사해하며 기다리겠다고 했다. 나는 격리방에 들어가서 가운을 입고, 휴대폰을 들고 들어가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할머니 보고 싶지 않으시냐고. 할아버지는 뻔한 질문에 좀 심드렁한 표정의 반응이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영상통화를 걸었고, 내 손을 거치대 삼아 멀리서나마 할아버지와 마주 볼 수 있게 해드렸다. 그제야 거짓말처럼 달라지는 얼굴, 나는 할아버지가 그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인지 처음 알았다.

말을 못 해도, 그들은 표정과 몸짓 만으로 서로 완전히 연결되어 있어서 오늘은 몸 상태가 어떤지, 잘 자고 잘 먹고 있는지,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서 전혀 어려움 없이 소통했고, 환자는 내내 행복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 얼굴색을 보면서 오늘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간호를 제공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찰나 같던 순간이 끝나고, 보호자에게 끊겠다고 인사하려 카메라를 돌린 순간 보호자는 내 얼굴을 보고 엉엉 우셨다. 얼마 만에 얼굴을 보는 건지 모르겠다고, 이렇게 좋아 보여서 다행이라고, 감사하다며 우는 모습에 나는 일찍이 이 생각을 못 한 것에 죄송스러워질 정도로 순도 높은 감사를 받았다. 

재밌게도 그날, 환자는 단 한 번도 나를 더 부르지 않았다. 내가 정기적으로 활력징후를 재러 들어갈 때마다 불편한 데 없으시냐 물어보면 환히 웃는 얼굴로 괜찮다고 했다. 아마 여기 있는 많은 사람들이 진짜 불편해하는 건 침대 높이나 베개 위치가 아니라 마음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자리를 자주 봐드리고, 시간을 들여 지켜봐도 채워질 수 없는 불편함은 애초에 전혀 다른 뿌리에서 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움이 뭘까. 그럼에도 연결되지 않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그곳엔 수많은 불편함이 누워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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