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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기 반장 Feb 23. 2024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무엇을 해야 하는가?

feat. 갓 마흔들의 고민


이렇게 야한 속옷을! 제가 감히... 만져도 될까요?     


이과, 공대, 군대, 그리고 유통. 제대와 동시에 입사한 회사에서 난생처음 보는 여자 속옷 앞에 얼어붙었다. 고교 시절부터 남자들에 둘러싸여 지내온 시간만 어언 9년. 신입 사원 현장 실습 첫날을 여자 속옷 물류 센터에서 보내게 될 줄이야. 게다가 대놓고 야하기로 유명한 브랜드 제품이었다. 아직 군대 물이 빠지지도 않은 남자 동기들은 마치 무장 공비라도 만난 듯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여자 동기들이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이놈들,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으면서!     

     

2009년 7월에 만난 입사 동기는 100명에 육박했다. 그중 나는 남자 다섯, 여자 셋으로 구성된 6조에 속했다. 지난주 금요일, 힙지로에서 오랜만에 6조가 뭉쳤다. 저마다 사정이 있어 참석률은 절반에 불과했지만, 마흔 혹은 그 이상이 되어 나타난 동기들과 그때 그 시절로 두 배 즐거운 시간 여행을 떠났다. (완전체로는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동안 얼마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을까. 추억 토크가 무르익어 갈 때쯤 바삭하게 구워진 화로 피자가 나왔다. 이제 슬슬 근황 토크로 넘어가 볼까나.     

          

    

     


"마흔을 기념하여 직장 생활을 청산하고 백수가 되었어." 나의 말에 피자처럼 눈이 동그래지는 동기들. 얼마 전에 출판한 내 책 사인본과 함께 무소속이 되어 처음 판 명함을 돌렸다.   

  

"이학기 반장? 뭔가 느낌이 오는데. 왜 이렇게 네이밍 했어?"
"학창 시절에 반장 선거에 나가면 나는 2학기에만 반장이 되더라고."       

"맞아! 너 신입 사원 연수 때도 처음과 가장 이미지가 다른 사람 1위에 뽑혔잖아. 나는 이학기라고 해서 인생 2막을 의미하는 인생 2학기인 줄 알았어."     
"처음에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그렇게 볼 수도 있겠더라고. 그래서 네이밍이 너무 마음에 들어."   


 그날 모인 네 명 중 둘은 직장인, 둘은 프리랜서였다. 또 한 명의 프리랜서 동기는 남편과 서울에 거주하지만, 제주도에 1년 계약으로 숙소를 얻었단다.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영감을 얻고 싶어 내린 결정이란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제주도는 보통 1년 단위 계약을 하는데 방 3개짜리 빌라가 보증금 5,000만 원에 연 500만 원을 세로 낸다고 한다. 반전세도 월세도 아닌 연세? 알바를 하든 어떤 일을 하든 돈과 관계없이 자기만의 예술성을 추구하고 싶다는 동기. '상업성과 예술성', 글 쓰는 사람으로 살고자 퇴사한 나의 고민과도 맞닿아있는 주제였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중에 무엇을 해야 할까?     

     

이번엔 또 한 명의 그래픽 디자이너인 직장인 동기가 입을 열었다. 자신은 입시 미술을 잘했기에 지금의 길을 가고 있지만,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 고민이 된단다. 디자인은 결국 상류층을 위해 존재하는 노동이 아닐까 하는 회의감이 든다나. 브랜드 등급에 따라 디자인 가격이 천차만별인데 반해 책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가격으로 값이 매겨지는 것이 멋지다는 동기. 동화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란다. 좋아하는 것을 위해 뭐라도 해야 하는데 게을러서 시도도 못한다고 말하는 동기에게 나는 속으로 응원했다.       

     

'두 아이의 엄마로서 너는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야. 엄마는 정말 위대한 존재야. 아이들이 주는 높은 책임감과 넓은 모성애의 힘으로 너는 더욱 깊어질 거고 진짜 너다운 길을 결국 가게 될 거야. 분명 잘 해낼 거고 잘 할 거야!'     

     

또 한 명의 직장인이자 글로벌 탑 브랜드의 전략 기획자인 동기도 딜레마에 빠져있다고 했다. 상사와의 갈등이 심한데 가장으로서 때려치울 수도 없는 노릇 아니냐며. 회사에서 명예퇴직 신청을 받고 있는데 하루에도 열두 번씩 갈등한단다. 대기업 직장인이든 프리랜서이든 나이에 상관없이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에 대한 고민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 숙제가 아닐까.     

     


     

     

초저녁에 시작된 토크는 잠시도 끊기지 않았고 새벽 1시가 넘도록 계속되었다. 깔깔거렸다 심오해졌다 고민의 밀당에 취한 우리들. 전 세계 남편들은 왜 화장실에 들어가면 나오지 않는가, AI 시대에도 왜 언어 학습이 필요한가, 인간의 공감 능력이 중요하다 해도 오히려 감정 소비가 없어야 지속할 수 있는 노인 케어를 AI가 더 잘 해내지 않을까, 재창조도 가능해지는 AGI 시대가 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등등.      

     

결론이 쉽사리 나지 않는 주제들이었지만, 이 글을 쓰며 오히려 심플하게 정리됐다. 나는 인생을 '재미'있게 살고 싶다. 잘하는 것 안에서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고 좋아하는 것 안에서 잘하는 것에 집중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재미가 더해가느냐 줄어드느냐가 기준이 될 것이다. 매일 매 순간 치열하게 몰입할 수 있는 본질적 재미를 좇는다면 내일 당장 죽더라도 묘비에 '나는 인생을 재미있게 살다 가노라'고 새길 수 있지 않을까.     

     

     

Q. 여러분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중에 무엇을 하고 있나요? 재미를 추구하는 인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학기 반장 연재]

월 : 이학기 스쿨의 월요일 진로반
화 : 이학기 스쿨의 화요일 독서반
수 : 이학기 스쿨의 수요일 작가반
목 : 이학기 스쿨의 목요일 직장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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