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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기 반장 Apr 30. 2024

인간의 이중성을 동시에 보는 눈을 가진 여자

톨스토이, <부활>


본의 아니게 요즘 러시아 문학 벽돌 책 깨기를 하고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에 이어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었다. <백치>를 읽을 때 나는 정말 백치가 될 뻔했다. 수많은 등장인물을 좇아가기도 버거운데 각 사람을 이름이나 성, 별명 등으로 난잡하게 부르는 러시아식 호칭까지 더해지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럼에도 사람의 심리를 관통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천재성에 감탄했으니 진짜 천재는 백치가 된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감동을 선사하나 보다.     


한번 호되게 맛을 봐서일까. <부활>에도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별 위화감 없이 읽으며 내 삶에 찾아온 러시아 문학의 부활을 기쁘게 맞이했다. 이래서 이름이 중요한가 보다. 위대한 작품들을 읽다 보니 문득 하나의 질문이 머릿속을 스친다. 세계적인 문학가들을 배출한 러시아가 왜 국제 깡패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백치>에 서려 있는 이미지가 ‘백치’라는 괴상함이었다면 <부활>에 맺혀있는 이미지는 ‘사시’라는 신비함이었다. <부활>의 주인공 카츄사는 사시를 가진 매력적인 여인이다. 그녀의 시선은 동시에 두 곳을 비춘다.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한 네흘류도프 공작은 자신의 이중성을 동시에 꿰뚫어 보는 카츄사의 사시에 몸서리친다.     


"하나는 그를 향하고, 하나는 그를 비껴 쳐다보는 두 검은 눈동자가 그 검고 무시무시한 무언가를 떠올리게 했다."

- 톨스토이, <부활1>, 민음사, 153쪽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속삭이는 두 가지 음성을 듣는다. 하나는 이타심의 타이름이고 또 하나는 이기심의 부르짖음이다. 톨스토이는 <부활>에서 인간의 이중성을 ‘정신적 인간’과 ‘동물적 인간’으로 표현했다. 혈기왕성했던 군인 시절의 네흘류도프는 한 마리의 짐승이었다. 어리고 순수한 카츄사를 그저 사냥감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네흘류도프는 카츄사를 덮쳤고 동물적 인간은 네흘류도프를 삼켜버렸다.     


그 후로 매춘부로 전락한 카츄사는 어느 날 살인 사건의 누명을 쓰고 재판을 받는다. 마침 배심원으로 참석한 네흘류도프는 10년 만에 카츄사와 법정에서 재회한다. 카츄사의 인생을 망쳐놓았다는 죄책감이 네흘류도프의 정신적 인간을 완전히 깨어나게 한다. 속죄를 위해 네흘류도프는 카츄사와 결혼까지 결심한다. 이를 보며 카츄사는 “예전에 날 육체적으로 이용했듯이 이제는 영적으로 이용하려는 당신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겠다”라고 다짐한다.    


네흘류도프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동물적 인간을 만족시켰던 네흘류도프가 회심하여 정신적 인간을 만족시킨다 한들 모두 자기만족을 위한 일이 아닐까? 인간의 선행은 결국 다 내 마음이 편해지려고 하는 짓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선함이 ‘이기적 이타심’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하니 순간 허무감이 밀려왔다. 선한 영향력의 확장을 꿈꾸는 나의 외침도 결국은 부르짖음을 포장한 타이름일 뿐이지 아닐까.     


네흘류도프가 카츄사를 통해 속죄하고 부활하려던 계획은 실패로 끝난다. 하지만 한 개인을 향하던 지엽적인 사랑이 민중을 향한 광대한 사랑으로 확장되며 네흘류도프는 진정한 부활을 맞이한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이기적 이타심 또한 온전히 선한 열매를 맺기 위한 작은 씨앗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학기 반장 연재]

월 : 이학기 스쿨의 월요일 진로반
화 : 이학기 스쿨의 화요일 독서반
수 : 이학기 스쿨의 수요일 작가반
목 : 이학기 스쿨의 목요일 직장반
금 : 이학기 스쿨의 금요일 고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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