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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기 반장 May 07. 2024

자녀가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면

이희영, <페인트>


만일 내가 부모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과연 우리 부모님을 선택했을까?



글쎄다. 아버지와 엄마는 각각 내게 좋은 분들이지만, 두 분을 부모로 한 가정에서 만나야 했다면 나는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방 2개만 있는 집에서 살았다. 물리적 거실은 있었지만, 정서적 거실이 없었다. 거실은 가족이 함께 모이고 소통하는 공간이다. 아버지의 방과 엄마의 방 사이를 냉랭한 공기가 가득 채우고 있었고 나는 그 공기 속에 표류했다.

질문을 바꿔보자. 우리 아이가 부모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이는 과연 우리 부부를 선택했을까? 최근에 나는 아내에게 우리 아이들이 부럽다고 말한 적이 있다. 네 식구가 매일 거실에 모여 쫑알쫑알 서로 말하겠다고 복작거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다. 아이들도 진정 행복하다고 느끼는지 어떤 결핍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이희영의 청소년 소설 <페인트>를 읽으며 나는 과연 몇 점짜리 부모일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15점짜리 부모 밑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아이도 있어.”(23쪽)


이희영 작가는 ‘나는 좋은 부모일까’라는 반성에서 <페인트>를 집필했다고 밝혔다. 소설의 배경은 인구 절벽의 위기에 대처하는 미래 한국 사회이다.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은 부모는 NC 센터에 아이를 맡기면 그만이었다. NC란 국가의 아이들(nation’s children)의 영어 약자인데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에서 돌보는 아이들을 뜻했다. NC 센터에서 자란 아이들은 일정 나이가 되면 자신을 입양하려는 부모를 면접을 통해 선택할 수 있었다. 그걸 ‘페인트’라고 불렀다. ‘페인트’란 부모 면접(parent’s interview)의 영어 발음을 은어로 부르는 말이었다.

입양에 성공하면 부모에게는 다양한 혜택이 주어졌고 아이들도 NC 센터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누렸다. 물론 불협화음이 나는 경우도 있어 입양되었다가 다시 NC 센터로 돌아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NC 센터는 출산율을 높이지 않으면 국가의 존속마저 위태로워진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궁여지책이었다. 인구 절벽의 현실화가 눈앞에 다가와서 그런지 소설 속 설정이 꽤 그럴싸했다.






주인공 제누 301은 NC 센터에서 자란 아이다. 여러 번의 페인트를 통해 입양 혜택을 노리는 가식적인 어른들을 보면서 제누 301은 실망한다. 그러던 어느 날 처음으로 호감이 가는 어른들, 하나와 해오름을 만난다. 그들은 달랐다. 격식을 차린 여느 어른들과는 달리 그들은 어설펐다. 하지만 솔직했고 인간적이었다. 하나와 해오름은 제누 301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이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의 문제들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제누 301은 그들을 이렇게 평가한다. “그것으로 되었다. 두 사람은 부모 준비가 끝난 사람들이었다.”(189쪽)

이희영 작가의 유년은 잿빛 회색이었다고 한다. 하나와 해오름처럼 자신의 아이에게는 같은 색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부모가 된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바라는 아이로 만들려는 욕심보다 아이와의 시간을 즐기는 마음이 먼저다. 부모는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되어 가는 것이다. 아이를 가르치려 들지 말고 아이와 함께 놀고 즐기면 된다.”(200쪽)

6살 아들과 4살 딸은 모두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색들로 하얀 스케치북을 채우고 나면 꼭 우리 부부 앞에서 작품 전시회를 연다. 그때 우리 가정에는 작품의 다양한 색만큼이나 많은 웃음꽃이 만개한다. '아이와 함께 놀고 즐기'는 것의 의미는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구성원 각자가 좋아하는 색으로 페인트칠해 가는 과정이 아닐까. 마치 저마다 고유한 빛깔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꽃들의 정원처럼 말이다.

결국 하나와 해오름을 부모로 선택하지 않은 제누 301의 결정도 그의 삶을 칠해가는 고유한 색깔이 될 것이다.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지만, 내 앞에 펼쳐진 삶을 어떤 색으로 물들일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자녀의 삶은 자녀의 색으로, 부모의 삶은 부모의 색으로 물들이면 되는 것이다. 지금 내 손에 쥐어진 페인트는 어떤 색인가?



Beatrice Emma Parsons (1869~1955)




[이학기 반장 연재]

월 : 이학기 스쿨의 월요일 진로반
화 : 이학기 스쿨의 화요일 독서반
수 : 이학기 스쿨의 수요일 작가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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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 이학기 스쿨의 금요일 고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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