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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기 반장 Apr 23. 2024

N포 세대라도 사랑까지 포기할 순 없다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우리는 왜 좋은 사람을 못 만날까?



계획하지 않았던 여행을 떠나는 한 남자. 그는 비행기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한 여자에게 반한다. 여러 비행기 중에 하필 옆자리에 그녀가 앉게 될 확률은 989.727분의 1. 이 놀라운 수치에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만남은 필연이 되고 호감은 이내 사랑이 되어버린다.     


‘낭만적 운명론’에 빠진 연인은 우연에 필연적 의미를 부여해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관계에서 필연적 의미 부여가 점점 힘을 잃고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결국 다시 처음의 우연만 남게 된다. 이는 사랑의 종말을 뜻한다.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은 저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심리학적 해석과 철학적 고찰로 사랑의 메커니즘을 낱낱이 해부했다. 24살에 이 책을 썼다고 하니 그의 천재적인 통찰력에 입이 떡 벌어졌다. 뻔한 연애담이 이토록 신선할 수 있다니! 그가 쓴 사랑 이야기를 읽다가 나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희망이 자기 인식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있는 것-비겁함, 심약함, 게으름, 부정직, 타협성, 끔찍한 어리석음 같은 것-을 상대에게서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에 빠진다.”      

-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23~24쪽


이러한 ‘낭만주의의 저주’에 때문에 우리는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낭만주의의 저주란 “자신의 결핍을 인식하지 못해 좋은 사람을 놓치고, 완벽한 사랑만을 좇다가 나에게 맞는 사람마저 놓쳐버리는” 것이다. 저자는 나 자신에게 절대 찾을 수 없는 완벽함을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찾을 때 낭만적인 도취가 불러오는 공허에 휩싸인다고 경고한다.    

 




철없던 시절 낭만적 운명론으로 연인을 바라볼 때는 상대의 조건이 가장 중요했다. 여성스러워야 하고 담배는 피우지 않아야 하며 대중교통에서 노약자석에 앉지 않는 사람이어야만 했다(그 외에도 수만 가지 희망사항이 있었다.) 하지만 상대의 조건은 그저 무지에 가까운 단편적인 정보에 불과했다. 내가 짜 놓은 틀에 맞춰 상대를 구겨 넣으려 하는 폭력성을 사랑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조건이 아닌 나의 인격이다. 좋은 사람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이전에 내가 먼저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될지 고민하는 것이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려고 상대의 조건 30가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대에게 좋은 배우자가 되기 위해 계발해야 할 나의 인격 30가지를 놓고 기도하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성숙한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성숙한 사랑은 절제로 가득하며, 이상화에 저항하며, 질투, 마조히즘, 강박에서 자유로우며, 성적 차원을 갖춘 우정의 한 형태이며, 유쾌하고, 평화롭고, 상호적이다. 반면 미성숙한 사랑은 이상화와 실망 사이의 혼란스러운 비틀 거림이며, 환희나 행복의 감정이 익사나 섬뜩한 구토의 인상과 결합되어 있는 불안정한 상태이며, 마침내 답을 찾았다는 느낌이 이렇게 헤맨 적이 없다는 느낌과 공존하는 상태이다.” (261쪽)     


우리 부부는 결혼기념일마다 지난 1년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결혼 1주년 기념일에 아내가 한 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사랑이 아닌 배려를 한 것 같아요.” 지금 돌아보면 당시 아내는 낭만적 운명론으로써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주인공 ‘나’가 사랑하는 ‘클로이’에게 “나는 너를 마시멜로 한다”라고 말했던 그런 달큼함 말이다.    


나는 아내가 사용한 ‘배려’라는 단어가 오히려 ‘성숙한 사랑’을 의미하는 적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부부는 결혼을 전제로 정식으로 교제한 지 4개월 만에 식을 올렸다. 초고속 결혼이 가능했던 이유는 서로의 꿈이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좋은 남편 되기’, 아내는 ‘좋은 아내 되기’를 꿈꾸고 있었다. 첫눈에 반해 감정적으로 불타오른 관계라기보다는 성숙한 사랑을 꿈꾸며 이성적인 판단으로 결심한 관계에 가까웠다. (낭만적 운명론을 지양한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지향했기에 4개월 만에 결혼한 것이 아닐까?)   


물론 여느 신혼부부처럼 신혼 초부터 큰 갈등이 있었다. ‘미성숙한 사랑’의 결정체였다. 결혼 전만 해도 좋은 남편이 될 자신감이 충만했던 내가 예상하지 못한 갈등 앞에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무너질 수 없었다. 내 인생의 최우선 목표는 ‘좋은 아내 찾기’가 아니라 ‘좋은 남편 되기’라는 다짐을 상기했다. 갈등을 통해 상대에 대한 기대를 없애면 해주는 것에 감사할 수 있고 해주지 않아도 서운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좋은 아내 되기를 꿈꾸는 아내 역시 갈등을 통해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이타적인 배려가 중요함을 느꼈다고 한다. 기대하지 않고 기여하는 것, 성숙한 사랑을 향한 첫걸음이다.


낭만주의의 저주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상대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알랭 드 보통은 사랑의 유익에 대해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제대로 된 정체성을 소유할 능력을 상실한다. 사랑 안에서 자아가 지속적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소설 속 주인공 ‘나’도 이에 동의한다. “나는 클로이가 제공하는 내 인격에 대한 통찰들 덕분에 성숙할 기회를 얻었다. 다른 사람들은 구태여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 성격의 측면들을 지적하는 데에는 연인의 친밀성이 필요하다.” (145쪽)   


우리는 사랑 안에서 정체성을 확립한다. 진정한 사랑은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지속적인 노력이다. 사랑하기로 작정한 의지요 결단이다. 사랑은 우리를 성숙하게 한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하는 ‘N포 세대’라고 할지라도 사랑까지 포기할 수는 다.




※ 이학기 반장의 저서 <서른, 진짜 나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중에서 일부 내용을 재구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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