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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기 반장 Sep 02. 2024

82년생 직장인 #9

"이것으로 오늘의 간담회를 마치겠습니다."


평상시에는 점주들이 삼삼오오 모여 시끌벅적하게 간담회 장소를 빠져나간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너 혼자 남을 때까지 고요하기만 했다. 그제야 너도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남자는 태어나 세 번 운다는데 그 한 번을 지금 쓸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너는 새어 나오는 눈물을 참으며 앉아있었다.


"팀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배옥자 점주였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이제 다 끝난 일이니 잊으시고 지금부턴 어떻게 하면 매출 올려서 돈 많이 벌어갈까만 생각하세요. 어려운 일 있으면 말씀해 주시고요."


배옥자 점주의 눈 속에서 내 얼굴이 일렁이고 있었다. 투표의 결과는 기적 그 자체였다. 점주 회장 후라지크 점주를 포함해 배옥자 점주를 싫어하는 무리들조차 단 한 명도 손을 들지 않았던 것이다. 만장일치로 배옥자 점주는 용서를 받았고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예수는 늘 악에게 악으로 맞서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겼다. 그것이 현실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생생하게 체험한 날이었다. 


너는 공대 공부가 어렵고 따분하게 느껴지는 대학생 때 전공과 무관한 직업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아버지가 가공식품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알바도 할 겸 얼마동안 아버지를 도왔는데 트럭에 상품을 싣고 거래하는 슈퍼마켓들을 돌아다니며 상품을 공급해 주는 일이었다. 아, 세상에서 돈이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롯데월드를 처음 간 아이처럼 이런 세상이 있다는 사실이 너를 설레게 했다. 너는 무조건 유통 회사에 취직해 식품관에서 일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첫 직장인 '우리들'에 입사했을 때도 너는 1 지망을 식품관으로 적어 인사팀에 제출했다. 그러나 '너는 적성 검사 결과, 패션에 어울린다'는 너와 어울리지도 않는 말을 듣고 패션으로 배정을 받았다. 유행에 민감한 편도 아니기에 패션에도 큰 관심이 없었던 너가 심지어 여성복 카테고리를 담당하게 될 줄이야. 혼란스러워하는 너에게 선배들은 '패션의 꽃은 여성복'이라며 잘 배우고 성장하면 임원도 될 수 있을 거라고 희망고문을 해줬다.


너가 관리했던 층에는 40개 여성복 브랜드에 40명의 점주가 있었다. 40명의 점주는 밑에 직원 한 명을 두거나 직원과 알바 두 명을 두는 경우가 많았다. 한 브랜드에 점주 포함 총 2~3명이 근무하는 셈이었으니 층 전체에는 약 100명 정도가 근무했던 것이다. 물론 전부 다 여성이었고 남성은 너 하나뿐이었다. 너는 남고, 공대, 군대로 이어지는 코스를 거치며 전형적인 남초 환경에서 생활해 왔다. 유통 역시 군대 문화라고 들어서 적응이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100명이나 되는 여성들 가운데 남성은 너 하나뿐인 여초 환경에 맞닥뜨리며 '아무리 생각해도 도대체 내가 왜 여성복 패션을 담당하는 사람이 되었을까?'라는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차라리 그나마 익숙한 스포츠 패션이나 남성복을 담당했으면 직접 입어보기라도 하면서 흥미가 생겼을 텐데 여성복은 너가 입어볼 수도 없고 가뜩이나 모르는 영역인데 트렌드에 민감해서 쉴 새 없이 변하니까 좀처럼 감을 잡기 힘들었다.


하지만 너의 5대 강점 중 하나인 '긍정'의 힘을 발휘해 선배들과 점주들에게 물어보며 공부했고 엄마와 같이 쇼핑을 다니며 고객 관점에서 브랜드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그동안 너와 전혀 연결고리가 없던 영역에서 일하다 보니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레 너의 약점이 보완되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덧 자발적으로 시장조사를 하며 트렌드에 반응하는 너를 발견했고, 다양한 여성의 다채로운 욕구와 니즈를 패션을 통해 알아가게 되었다. 100명의 여성 직원들과 함께 일하며 그들의 시기와 질투, 욕심과 열정, 의리와 뚝심, 눈물과 땀의 의미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여성 직원들과 하루 종일 대화를 해야 하는 직업이다 보니 자연스레 공감 능력과 상담 능력이 향상되었다. 


남초 환경에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사실을 장착하게 된 너는 연애에 있어서도 점점 촌티를 벗게 되었다. 여성복 관리자라는 이유로 너는 마침내 연애와 일을 동시에 하는 '연업일치'를 이루게 되었다. 선배들이 귀에서 피가 나게 유통은 소문이 빨라서 사내 연애는 절대로 조심하라고 당부했던 터라 사내 연애는 꿈도 꾸지 않았다. 대신에 물밀듯이 들어오는 소개팅이 있었으니 너는 한 때 매주 휴무일마다 소개팅을 하기도 했고 심지어 하루에 두 탕을 뛴 적도 있었다.


소개팅에서 마음에 드는 여성을 만나면 너가 여성복 관리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나서 자연스럽게 데이트 신청을 하는 방법을 터득했는데 이것이 바로 연업일치 전략이었다. 다음 주에 여성복 시장 조사를 갈 예정이었다, 내가 남자다 보니 혼자서 여성층을 돌아다니는 것도 민망하고 매장에 직접 들어가 보는 것도 눈치가 보이더라, 혹시 시간 맞으면 구경할 겸 같이 가보면 어떻겠냐고 말하는 것이다. 거의 실패한 적이 없는 전략이었다. 게다가 시장 조사를 하면서 여성복에 대해 아는 체도 할 수 있고 데이트까지 할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연업일치 아니겠는가. 


그렇게 너는 100여 명의 여성 직원들과 함께 일했던 경험, 다양한 연업일치의 경험 등을 통해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고 이 경험들은 지금의 가정을 행복하게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결국에는 다 선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것이 너가 82년생 직장인으로서 얻은 소중한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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