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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기 반장 Jun 20. 2024

82년생 직장인 #5

"내가 볼 땐 자네가 이제는 팀장을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말투로 지점장이 물었다.


"지점장님,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다른 팀장들은 모두 15년 차 이상의 베테랑들입니다. 제가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팀장 충원은 언제쯤 될 수 있겠습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실 인사팀에서 몇 명을 추천받긴 했지만, 나는 자네를 팀장으로 세우겠다고 말했소. 한번 생각해 보고 말해주시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담당 나부랭이인 너는 더 이상 거절하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너는 무거운 마음으로 지점장실을 나왔다. 


백화점은 회의 때마다 층별로 매출 목표 대비 실적이 적나라하게 비교되기에 자연스레 경쟁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다. 3년 차인 너가 15년 차 이상의 팀장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당시 회사에서 새롭게 개편된 연봉제와 더불어 '3x5 인재 양성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신입 사원이 3년마다 승진하여 15년 만에 임원이 되는 초고속 테크트리의 샘플이 필요했던 것이다. 너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지점장은 첫 번째 샘플로 너를 지목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1년이나 제대로 다닐 수 있을까' 걱정했었고 이제는 '3년 만 채우자'는 심정으로 회사를 다니는 너에게는 말도 안 되게 과분한 기회였다. 사실을 모르는 상태였지만, 너는 고심 끝에 지점장에게 팀장이 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너는 지점에서 최연소 팀장이 되어버렸다.


팀장인데 여전히 너는 혼자였다. 관리자가 한 명뿐인 팀의 팀장이라니 이게 무슨 웃픈 상황인가 싶었다. 내부 사정을 잘 모르는 외부에서는 너를 유능한 젊은 팀장으로 오해했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팀에 속한 엄마, 이모뻘 되는 40명의 점주들도 귀여운 담당 나부랭이가 한순간에 팀장이 되니 혼란스러워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점주들을 상대하는 것 또한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너가 아무리 15년 차 팀장들을 흉내 낸다 한들 더 귀엽게만 비칠 게 뻔했다. 약점을 강점으로 바꿀 너만의 리더십이 필요했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너의 머릿속에 불현듯 엄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교사 출신인 엄마는 자존심이 센 사람이었지만, 결혼하면서 경력 단절이 되었고 아들 뒷바라지 하느라 건강식품 세일즈를 한 적이 있었다. 너는 엄마의 성격상 절대 영업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엄마의 힘은 위대했다. 좋은 성과로 동기들을 교육하는 일까지 맡을 정도로 엄마는 회사에서 인정받기도 했다.


엄마는 그때 아들뻘 되는 팀장에게 설움을 당했던 일화를 들려준 적이 있다. 그 팀장은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엄마뻘 되는 직원들을 하대하는 것은 물론 나중에는 엄마가 만든 교육안도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꾸며 승진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래, 이거였다. '우리 엄마, 이모가 여기에서 일한다면 어떻게 대해야 할까?'를 고민하는 것에서 너만의 리더십을 찾아야겠다는 인사이트를 얻었다. 


유통업이라는 군대 문화의 거친 환경에서 그동안 점주들은 '사람으로서의 인격'이 아닌 '매출로써의 인격'을 지키며 소진되어 왔다. 너의 리더십 첫 번째 과제는 '사람이 인격이 되는 일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였다. 조직을 이끌기 위해 팀장으로서의 권위는 지키되 겸손한 자세로 섬기는 리더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건 마치 공부도 잘하는데 얼굴까지 예쁜 김태희가 되려는 것과 같은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너는 부족한 점이 많았기에 말하기보단 들으려고 노력했고 모르는 건 솔직하게 모르니까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가뜩이나 감정 노동이 심한 유통업에서 너의 엄마나 이모가 인상 쓰며 일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어떤가?


너는 점주들이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하면 좋을 것 같아 아침 공지 시간에 모인 점주들에게 웃음이나 감동을 줄 수 있는 이야기나 읽을거리를 준비하기도 했다. 가끔 선을 넘는 점주도 있어 정색할 때도 있었고 매출 압박으로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는 인상 쓰고 다니기도 했지만, 너는 최대한 인간적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어떨 때는 너가 팀장인지 상담사인지 헷갈릴 정도로 너의 팀의 분위기는 점점 따듯해졌다.


처음에는 열정과 패기로 혼자서 어떻게든 팀을 이끌어왔는데 점점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점주들이 자체적으로 뽑은 점주 회장이 있었는데 혼자 낑낑대는 너가 안쓰러웠는지 자기 일도 아닌데 발 벗고 나서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아직도 생각하면 가슴이 따듯해지는 일화가 있다.


한 번은 전사적인 프로젝트로 1~2만 원대 여성 샌들 PB 제품을 어느 점포에서 가장 많이 파는지 경쟁이 붙은 적이 있다. 지점장들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 그러면 안 되지만, 추가 매출을 위해 팀별로도 할당된 목표가 있어 점주들을 동원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너가 동의할 수 없는 일을 남에게 요구한다는 것이 언제나 너에게는 큰 부담감으로 작용했다. 햄릿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너의 표정을 캐치한 점주 회장이 도대체 무슨 일이냐며 솔직히 말해보라고 했다. 무겁게 입을 뗀 너는 너의 팀에 할당받은 목표 금액이 2백만 원인데 점주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고민이라고 털어놓았다.


"에이, 난 또 뭐라고. 팀장님 아무 걱정 마세요!"


점주 회장은 뒤도 안 돌아보고 매장들을 돌며 점주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다. 경쟁이 붙은 점포들은 마지막까지 1원이라도 더 매출을 올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12시간의 긴 레이스가 끝나고 마침내 PB 제품 매출을 오픈한 결과, 거짓말 같이 너의 점포가 1등을 차지하고 말았다.


지점장 이하 모든 관리자가 로테이션으로 직접 행사장에서 판매까지 해가며 열을 올렸던 성과였다. 지점장은 관리자들을 전부 불러 모아 오늘 하루 너무 수고 많았다며 격려하곤 팀별로 할당된 PB 제품 매출 실적을 보고 받았다. 선배 팀장들부터 돌아가며 목표 대비 달성 금액을 실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내 팀장인 너의 차례가 왔다.


"저희는... 목표 200만 원에... 실적 260만 원 달성했습니다."


알고 보니 점주 회장이 매장을 돌며 점주들에게 '우리 팀장이 곤란해지지 않도록 무조건 두 켤레 이상씩 사라'고 설득했던 것이었다. 다른 팀은 아무도 목표 달성을 못했는데 너의 팀만 유일하게 목표를 초과 달성하여 살짝 민망한 상황이었다.


"오, 좋소! 이게 진짜 리더십이오. 사실 점주들한테 말하기 껄끄럽다는 거 나도 잘 알고 있었소. 그런데 오늘 결과를 보면 평상시에 얼마나 점주들과 소통이 잘 되는지 유추해 볼 수 있소. 수고 많았소!"


지점장은 기라성 같은 선배 팀장들 사이에 주눅 들어 있었던 막내 팀장을 이렇게 띄워주었다. 하지만 선배 팀장들의 안색을 보니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았다.



(6화에 계속...)



[이학기 반장 연재]

월 : 이학기 스쿨의 월요일 진로반
화 : 이학기 스쿨의 화요일 독서반
수 : 이학기 스쿨의 수요일 작가반(끝)
목 : 이학기 스쿨의 목요일 직장반
금 : 이학기 스쿨의 금요일 고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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