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올 어머니
그런데, 우리 엄마는 무척이나 무서웠다.
한번 회초리를 들면 무섭게 혼냈다. 나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엄마에게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어도 모자를 판에 맨날 대들기만 해서 더 맞기도 더 맞았다. (나중에 이야기지만, 동생은 무조건 잘못했다고 해서 나보다 덜 맞았다고 했다.)
나는 거짓말을 참도 잘 하였다. 바른대로 말했다가는 엄마한테 벼락 맞을게 분명하니까, 그 순간만이라도 모면해보자 싶어서 맨날 입에서는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그 날은 중학교 기말 고사를 앞둔 주말이었다. 아빠에게 학원 독서실에서 공부를 할 것이니, 나를 학원에 차를 태워달라고 부탁을 했다. 아빠는 나를 학원 앞에 내려주었고, 나는 학원 독서실에 들어가는 척 연기를 했다. 그러곤 학원에서 모여 노는 무리들과 접선을 했다. 나 포함 여자 셋에 우리 여자들보다 한 학년 위였던 오빠들 셋이 모였다. 학원을 핑계로 항상 모여 놀던 우리는 그 날도 어김없이 코스였던 근처 대학교 캠퍼스를 한바퀴 빙 돌았다. 마침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시즌이었던지라 크리스마스 소재를 한 영화도 한편 봐줬다. 영화 관 앞에 있는 떡볶이 순대 튀김 포차에 들러서 오뎅 국물도 시원하게 한 사발 들이켜 주고, 마지막으로 노래방까지 정점을 찍었다. 신이 나게 놀고 난 나는 저녁 해가 다 질 무렵이 되어서야 집으로 슬금 슬금 돌아갔다. 그런데 남 동생이 나를 보더니, "누나 이제 죽었어. 엄마 아빠가 학원에 전화했는데, 오늘 학원은 문 닫았다며? 어딜 다니다가 이제서야 와?" 나는 눈 앞이 캄캄해지고, "아 학원이 일찍 닫는다고 해서, 학원 근처 사는 친구네 가서 공부좀 하다가왔지. 그리고 떡볶이좀 먹고, 편의점 앞에서 심심해서 노래도 한곡 부르고 왔어." 이런 뚱딴지 같은 말들을 나는 내 뱉자, 남동생은 "누나 대체 앞뒤가 맞는 말좀 해라. 거짓말도 좀 들통이 나지 않게 해야할거 아니야?" 나를 찾아 학원 근처를 돌아보았던 엄마 아빠는 집으로 돌아오셨고, 나는 남동생 앞에서 했던 말을 앞뒤가 맞지 않게 또 버벅 거리다가 그 근처 '친.구.집'에 가보자는 엄마 아빠 말에 친구집까지 가서 친구를 불러내는 소동까지 피웠다. 여튼 나는 그날 학원을 가지 않고 친구들과 놀았던 건데, 그 친구와 나는 서로 입이 맞지 않아 모든게 거짓말인게 들통이 나고 말았다. 부모님은 나의 학원을 끊고, 외출금지령을 내리셨다. 나는 이렇게 항상 거짓말을 했지만, 항상 모두 걸렸다. 그리고 엄마는 더 호랑이같은 얼굴로 변해갔다.
호랑이만 같던 엄마는 나의 대학입시와 함께 바로 고양이로 변신했다. 엄마의 과업이었던 나의 대학 진학이 끝난 것이었다. 대학 진학을 위해 엄마와 나는 너무나 힘든 시간을 서로 겪었다. 왜 공부해야하는지 목적도 모른 채 한 낱 반항심에 한껏 물들어 엄마만 미워하는 사춘기 딸과, 퍽퍽한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한 여자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극명하게 알겠는 엄마는 서로를 미워하고 헐뜯으며 그렇게 20여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나의 대학입시가 해결된 그 시점부터 엄마는 새장 속에서 풀려난 새와 같이 자유를 만끽 하는 듯 홀가분해보였다. 그 마음은 고스란히 이제 막 스무살이 됀 나에게도 물들어, 함께 자유로워했다. 둘이 팔짱을 끼고 남대문을 돌아다니며 구두, 옷가지, 운동화를 샀다. 나는 엄마 손을 잡고 귀도 뚫었고, 속옷도 함께 골랐다. 호떡을 함께 호호 불고 먹으며, 버스를 함께 탔다. 렌즈에 색이 들어간 안경도 맞추고, 새로운 안경을 쓴 내 모습을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엄마는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다. 엄마는 새로 맞춘 녹색 렌즈가 내 얼굴에 잘 맞고 예쁘다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의 대학 입학식에 엄마는 참석했다. 대학 입학식을 강당에서 1부, 그리고 야외 무대에서 2부(?) 식순으로 치뤘는데, 2부까지 남아있는 학부형은 두 가족이었다. 그 중 한 가족이 우리 엄마였다. 엄마는 나의 대학 입학식에도 나의 초등학교 1일 교사를 하던 그 날과 마찬가지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참석했다. 이 날 아마 리본핀은 안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엄마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값비싼 모피 코트를 입고 그리고 롱 부츠를 신고, 가방도 가장 비싼(?) 것을 어깨에 메고 왔다. (엄마가 이때 값 비싼 가방을 들었는지는 사실 확신이 안선다. 엄마는 평생 명품이란 것을 사본적이 없으니까.) 한 켠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애기인가? 학교 입학식에 아직도 참석을 하고' 그런데, 나의 대학 입학의 날은 엄마에게 나에 대한 책임감에 대한 해방의 날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그렇게 입학식 참석을 통해 엄마의 지난 노력에 대한 시간을 자축했던 것 같다.
엄마는 나의 결혼을 젖먹던 힘을 다해 반대했다.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말만 되뇌였다. '치, 어떻게 키웠는데?' 라는 나의 사춘기 시절 반항심은 다시금 장착이 되었다. 엄마는 나의 결혼식 내내 눈가가 벌개져서 눈물은 끝까지 참아냈다. 그리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나와 남편이 우리의 신혼집으로 서둘러가는 것을 보며 '너희들은 왜이렇게 빨리 집에 돌아가니?'라며 못내 서운해했다. 큰 아이를 갖고 만삭이 되어 뒤뚱거리는 나에게 엄마는 가슴팍에 얼굴만한 리본이 달린 원피스를 사줬다. "아이 엄마라도 예쁘게 하고 다녀라." 큰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원에 누워있는 나에게 생물 가물치를 사서 6시간이 넘도록 고았다면서, 국물을 들이키라고 했다.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나에게 주말 내내 김치를 담그어 주면서 몸이 힘들어진 엄마는 화를 엄청 냈다. (지금 아이들에게 밥을 해주며 화를 내는 나의 모습과 어찌나 똑같은지) 명절이 되면 시댁에 들렀다 오는 나를 집으로 내 쫓기가 바쁘다. "힘든데 집에가서 누워라. 누워라."
몸이 으슬으슬 하고 몸살기운이 돌면, 엄마가 구워주던 감자전이 생각난다. 유난히도 음식 하기를 힘들어했던 엄마가 정말 많이 하던 감자전. 그리고 구워주던 소고기 끝에 기름 장 찍어 깻잎+상추 셑트로 한입에 욱여 넣던 그 밥상. 체했을 때 정성껏 끓여주시던 백숙과 흰 눈길을 달려나가 수퍼에 가서 사오신 콜라 한 모금으로 쳇기를 쑥 내리던 그 겨울 밤. 나의 현재는 엄마의 모든 손길과 노고로 만들어졌다. 엄마의 깊은 한숨과 그리고 나를 잘 되게 하고 싶은 바램과 눈물 어린 기도로 나는 만들어졌다. 아. 어머니여. 사랑하올 어머니여.
삶은 세상에 다시 난 것이라
Life is being born again in the world.
-Woo My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