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정류장에서 눈물을 쏟은 지 3개월이 지났다. 달리 말해 신아영이 나타난 후로 3개월이 지났다. 점점 더 혼자가 되었다. 나를 찾는 연락은 일절 없었다. 관공서에서 보내는 재난 문자나 배달 앱에서 보내는 광고 문자가 전부였다. 하나 달라진 것은 신아영의 연락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초인종이 울리길 바랐고 전화라도 오기를 바랐다. 외출도 거의 하지 않았다. 마트에서 더 이상 장을 보지 않았고 편의점에도 가지 않았다. 필요한 건 배달을 시켰고 요새는 생필품 중 모든 것을 배달할 수 있었다. 그나마 하는 외출은 집 앞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것이었다. 사람을 마주치기 싫어 보통 밤 12시가 넘어서 나갔다.
하루는 쓰레기를 버리러 빌라 앞에 나갔다. 현관에서 조금만 나가면 쓰레기를 모아두는 곳이 있었다. 겨울이라 추웠지만 반팔 반바지 슬리퍼를 신고 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쓰레기를 던지고 다시 들어가려는 데 빌라 현관 앞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밤이라 고양이 눈은 노란 바탕에 동공이 까맣고 위아래로 뾰족했다. 현관 쪽으로 내가 다가가도 고양이는 자리를 지키고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 보니 고양이 귀 한쪽이 뭉개져 있었다. 언덕길에서 뛰어올라 나를 넘어트렸던 고양이였다. 고양이가 문 앞에 바로 있어 순간 나와 대치되는 상황이 되었다. 추워서 들어가야 하는데 고양이는 현관문을 지키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집에 데려가 달라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일단 현관으로 들어가야 해서 무시하고 지나가려 했다. 내가 다가가자(정확히는 현관문으로 걷자) 고양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걸음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근데 그 모양이 나에게 위협을 느껴서 라기보다는 '내가 비켜줄게'하는 느낌이었고 동작도 느렸다. 뒤로 물러나면서도 노란 눈은 계속 나를 응시했다. 무시하고 현관에 들어가 계단을 오르려는데 뒤를 돌아보니 문 밖에서 아직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에서 보니 밤 중이라 두 눈만 떠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사라졌다. 집에 들어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파에 앉았다. 티브이에서는 <관상>이라는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유명한 관상가가 왕족의 정치 싸움에 휘말리는 내용이었다. 이미 봤던 영화지만 다시 보고 있었다. 보려고 보는 게 아니라 채널을 돌리다 나왔는데 나쁘지 않으니 계속 틀어놓는 것이다. 관상으로 운명을 점칠 수 있다면 아빠가 없는 것도, 엄마가 죽은 것도, 모두 내 얼굴에 드러나 있을까.
스마트폰에 전화가 울렸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나에게 전화할 사람은 없었다.(낮이라도 그랬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티브이를 음소거로 바꿨다. 벨소리가 집구석구석으로 퍼졌다. 반복되는 울림의 사이사이 시간이 긴 침묵으로 느껴졌다. 받으려는 찰나, 벨소리가 끊어졌다. 다시 전화가 오면 바로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5분이 지나도 벨은 울리지 않았다. 내가 그 번호로 발신을 해도 되지만 그러지 않았다. 잘못 걸려온 전화일 수도 있었다. 핸드폰을 소파 쿠션 위로 던졌다. 음소거해둔 티브이의 볼륨을 올렸다. 그 순간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민규야, 잘 지냈어? 나 신아영” 그녀의 목소리는 밤 12시가 아닌 낮 12시 같았다. 티브이 음량을 다시 음소거했다.
“오랜만이다" 기다리던 전화였지만 무덤덤한 투로 말했다.
“뭐 하고 있어?"
"티브이 봐"
"내 연락 기다렸어?" 신아영의 목소리는 친절하고 다정했다. 이해할 수 없는 친절에 의심이 들기도 했다. 왜 나한테 접근하지? 꽃뱀 그런 건가? 아니면 인신매매? 알 수 없었다.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그럼에도 자꾸 마음이 갔다.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만나자. 지난번에는 갑작스러웠잖아. 그렇게 말고"
“이 시간에 전화하는 건 괜찮고?"
"크큭"
“그래, 보자, 언제가 편해?”
“왜 만나자고 하는지도 안 물어보네?"
"궁금해. 근데 어차피 안 알려줄 거잖아"
“응 맞아 크큭. 금요일 도서관 앞 공원 벤치에서 보자"
"도서관?"
“그래~ 정보 도서관! 도서관 공원 벤치 세시"
그렇게 신아영과 약속을 잡았다. 도서관은 내가 가장 많이 가던 장소였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로는 가지 않았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어렸을 때부터 늘 가던 곳이었다. 도서관은 내 놀이터였고 나만의 개인적인 공간이었다. 공공 도서관이었지만 혼자 가는 곳이었기 때문에 남의 눈 신경 쓰지 않고 다니던 사적 공간이었다. 신아영은 그것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신아영은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아는 것일까. 왜 나에게 접근하는 걸까, 의문이었다.
통화를 끊고 신아영의 번호를 저장했다. 카카오톡 프로필을 확인했다. 프로필 화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고 다시 티브이 볼륨을 올렸다. 캔을 따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이틀 뒤에 다시 신아영을 만나기로 했다. 왜 우리가 만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열쇠는 신아영에게 있었고 나는 그 문제를 풀고 싶었다. 방법은 그녀를 만나는 수밖에 없었다. 혹시 그곳에 위험이 있더라도 일단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경계는 경계대로 하되 만나야 뭐라도 알 수 있었다.
티브이를 보니 영화는 벌써 엔딩이었다. 배우 송강호가 연기한 관상가 김내강은 반역자들에게 아들을 잃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권력을 잡은 한명회에게 말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만 본 셈이지. 파도를 보아야 하는데. 파도를 만드는 건 바람인데 말이오. 당신들은 그저 높은 파도를 잠시 탔을 뿐이오. 우린 그저 낮게 쓸려가고 있는 중이었소만. 뭐 언젠가 오를 날이 있지 않겠소. 높이 오른 파도가 언젠가 부서지듯이 말이오.' 김내강은 한명회를 저주했다. 당신이 권력을 잡은 건 운명이었지만 그 또한 부서질 거라고, 당신은 목이 잘릴 관상이라고 했다.
맥주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찬 기운에 이불을 더 끌어올렸다. 다시 한번 신아영의 프로필을 확인했다. 역시나 아무 사진 없었다. 세 달 전에 본 신아영을 떠올렸다. 니트와 청바지에도 드러나던 그녀의 몸을 생각했다. 끈 풀어진 신발을 묶을 때 보였던 그녀의 하얀 발목을 떠올렸다. 복사뼈 쪽에 푸른 핏줄이 엷게 올라와 있었다. 다시 맥주를 마셨다. 나를 바라보던 고양이의 노란 눈을 생각했다. 고양이는 나를 바라보았다. 응시했다, 가 정확한 표현이었다. 고양이는 나의 무엇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밤이 길었다. 여느 때처럼 오늘도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티브이의 광고 소리가 집 안을 채웠다. 티브이 소리라도 있어야 했다. 그마저도 없으면 밤이 너무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