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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파수꾼 2

by 추세경

내 이름은 차민규다. 나이는 스물세 살이다. 일 년 전에 엄마가 돌아가셨고 아빠는 어렸을 때부터 없었다. 엄마는 나에게 건강하고 착하게만 살라고 했지만 내가 문제집을 산다고 하면 고민 없이 지갑에서 지폐를 꺼냈다. 하지만 문제집을 산다는 건 거짓말이었고 내가 주로 사는 건 만화책이나 무협지나 소설이었다.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초등학교 방학 때는 만화책 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한 여름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컵라면을 시켜 먹으면 그렇게 맛있었다. 중학교 때는 도서관에 무협지를 쌓아 놓고 읽었고 무협지가 질릴 즈음에는 일본의 추리소설을 읽었다. 엄마는 일주일에 6일은 일을 했기 때문에 낮에 내가 뭘 하는지는 몰랐다. 엄마랑 함께 보내는 시간은 평일 저녁과 주말 하루가 전부였다. 가끔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엄마 속을 썩인 적은 (적어도 내 기억엔) 없었고 책을 많이 봐서 그런지 공부를 안 해도 학교 성적이 중간은 됐다.


사람들에게 나는 영화나 드라마의 배경 같은 사람이다. 말수도 적었고 외모도 평범했다. 왕따를 당한 적은 없지만 남과 싸워본 적도 없었다. 각본 속의 행인 1이나 관객 1과 비슷했다.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 내가 싫지 않았다. 애초에 조용한 걸 즐겼고 고요한 걸 좋아했다. 엄마 말고는 아빠도 없고 다른 가족도 없었지만 불행하지 않았다. 남이 보기엔 별 색깔이 없어도 속에는 내 나름의 오색 빛 세계가 있었다. 만화책과 무협지와 소설을 친구 삼아 그 이야기들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것보다 책을 읽는 게 더 좋았다. 반 아이들과 떠드는 것보다 혼자 있는 시간이 더 좋았다.


엄마와 살던 투룸 빌라, 엄마가 죽고 내 소유가 된 투룸 빌라에는 중학교 2학년 때 이사 왔다. 벌써 여기 산지 구 년이 됐다. 유치원 때부터 이 동네 빌라 촌에 살았지만 세 드는 게 아닌 우리 집인 건 처음이었다. 사 호선 미아 사거리에서 마을버스를 타야 올 수 있는 곳이었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도 삼십 개가 넘는 계단을 두 번 지나고 언덕길을 십 분을 올라야 나오는 동네였다. 언덕에 쌓인 빌라들 사이사이로 골목이 있었고 겨울에 언덕이 얼면 동네 애들과 썰매를 탄 적도 있다. 빌라들은 대개 적갈색 벽돌로 지어졌는데 벽에는 하얀 페인트로 ‘00 맨션’ '00 빌라'라고 적혀 있었다. 빌라 입구에는 녹슬고 먼지 쌓인 우편함이 있었다. 어느 빌라나 그랬고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다. 우편함에는 동네 마트 전단지가 주로 꽂혀 있고 열쇠 수리 점 스티커가 붙어 있는가 하면 빨간색 전화번호만 적혀 있는 노란 명함이 꽂혀 있기도 했다. 그런 빌라에 살았고 우리 집은 3층이었다.


집의 초인종 소리를 들은 건 오랜만이었다. 엄마가 죽고서는 처음이었다. 지금 들은 게 맞나? 싶었다. 집에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었고 보험사 직원이나 검찰청 직원도 주로 전화로만 연락했다. 짐작 가는 사람이 없었다. 두 번째 초인종이 울렸다. 일단 화장실에서 나가야 했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몸을 닦았다. 마음이 급해 정강이 밑으로는 물기가 남아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을 햇살이 창문을 통해 TV 위로 떨어졌다. 투명한 햇살에 날리는 먼지가 보였다. 방에 들어가 팬티를 입고 회색 운동복 바지를 입었다. 근데 티셔츠가 안보였다. 화장실 앞에 벗어던진 게 생각났다. 화장실로 앞으로 돌아와 티셔츠를 주웠다. 목이 늘어 난 하얀 반팔티였다. 입으려고 하는데 세 번째로 초인종이 울렸다. 세 번째 초인종 소리를 들으니 짜증이 났다. 왜 자꾸 눌러대는 건지.


“누구세요”


목소리에 불쾌함을 섞었다. 시간은 오후 5시였다.


“신아영~”


“네?”


“1학년 2반 신아영!”


나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비해 문 뒤의 목소리에는 반가움, 익숙함, 등이 묻어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은 매주 놀러 오는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게다가 여자였다. 나는 슬리퍼도 신지 않고 맨발로 현관 앞에 섰다. 문에 달린 렌즈에 눈을 댔다. 묘한 날이었다. 문 앞에 서 있는 건 꿈에서 본 그녀였다. 초인종을 누르고 편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거는 건 꿈에 나온 신아영이었다. 꿈에서 그녀는 나를 흥분시켰고 현실의 나는 사정을 했다. 눈을 몇 번 감았다 떠도 그녀가 맞았다. 얼굴을 봤던 게 오 년도 넘어서 기억 속의 이미지, 상상 속의 얼굴과는 조금 달랐지만 분명 그녀가 맞았다. 잠시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렌즈로 자기를 본다는 걸 아는지 더 이상 초인종을 누르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다.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꿈에서 본 그녀와 마주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대치였다. 이마저 꿈인 건가. 다시 화장실로 가서 거울을 봤다. 덜 마른 머리를 수건으로 닦고 머리를 정리했다. 티셔츠의 목이 늘어져 최대한 뒤로 잡아당겼다. 손등으로 티셔츠와 바지를 털었다.


'똑똑'


이번엔 노크였다. 현관문의 원형 철제 손잡이를 잡았다. 반달형 버튼을 시계 방향으로 돌린 뒤 천천히 문을 열었다.


신아영은 베이지 색 폴로 니트에 레귤러 핏의 염색 청바지를 입고 신발은 흰색 단화였다. 어제 산 듯 깔끔했지만 왼쪽 신발끈이 풀려 있었다.


“신발끈 풀렸는데?”


“어? 아~ 땡큐”


무릎을 꿇고 신발끈을 묵으며 그녀는 나를 올려다봤다. 웃는 눈동자가 반짝였다. 이 정도 거리에서 그녀를 정면으로 봤던 적이 있는지 생각했다. 아마 없었다. 둘이서 대화를 해본 적도 없었다. 그녀는 외까풀이었지만 눈이 컸다. 콧날이 왼쪽으로 조금 휘어 있었다. 긴 생머리를 포니 테일로 묶어 구레나룻 잔머리가 귀 뒤로 넘어갔다. 가장 눈이 가는 건 볼 위의 솜털이었다. 피부가 워낙 하얗고 생기 있어 볼 위의 솜털이 보였다. 그게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예뻤다. 티브이에 나오는 전형적인 미인은 아니었지만 내가 학교 생활하면서 보았던 사람 중에 가장 예뻤다. 학교 다닐 때도 그렇게 생각했고 얼굴을 마주한 지금도 같은 마음이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오랜만이야 민규야, 나 기억하지?"


"응"


"놀랐어?"


"응"


"너는 그대로다"


그 순간 정신이 돌아왔다. 덜 마른 머리, 목 늘어난 티셔츠, 잠 옷 바지, 게다가 현관에 맨발로 서있었다. '그대로'라는 말이 단순한 인사말이라 해도 뭔가 부끄러웠다. 학교 다닐 때도 지금처럼 없어 보였나 싶었다.


"어떻게 온 거야? 동창이긴 해도 이렇게 만날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녀의 눈을 마주 보기는 힘들었다.


"나도 알아. 문도 안 열어주면 어떻게 하나 싶었어. 설명할 일들이 좀 있어" 그녀는 신발끈을 묵을 때의 그 눈웃음을 지었다. 꿈의 장면이 잠시 눈앞에 겹쳐 보였다.


"설명할 일?"


"응"


"그러면 잠깐 기다려줘. 어디 카페라도 가서 이야기하자"


"그것도 좋은데, 그냥 들어가서 얘기하면 안 될까?"


"여기?"


"응"


그녀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난처한 기색이 비쳤다.


"보시다시피 집 정리도 잘 안되어 있고 나는 잠옷을 입고 있어. 우리는 5년 만에 처음 만났고, 그전에도 제대로 된 대화는 안 해본 사이야. 집에서 얘기하는 건 곤란해"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무례하다는 것도 알아. 근데 마음이 급해서 그래. 시간이 없어"


"시간이 없다고?"


엄마가 죽었을 때부터 인생이 어떤 변곡점에 왔다는 느낌이었다. 지금의 일도 그중 일부일 수 있었다. 신아영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진실로 나에게 뭔가를 말하고 싶어 보였다. 게다가 신아영은 존재만으로도 나에게 큰 자극이었다. 그녀를 마주한 순간 내 온몸의 세포가 각성한 것 같았다. 머리는 걱정이 많았지만 마음은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알겠어. 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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