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하늘은 높고 푸르다. 하늘이 높다는 말을 어려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원래 하늘은 높고 원래 하늘은 파랬다. 가을 하늘이라고 뭐가 특별할까. 하지만 스물세 번의 가을을 겪고 보니 이제는 알겠다. 가을 하늘은 특별하다. 더 맑게 푸르고 더 푸르게 맑았다. 가을에는 가지 끝의 노란 단풍이 옅은 바람에 떨린다. 흔들리는 단풍잎은 갓난아이의 손가락과 비슷하다. 작고 통통한 손가락의 움직임이 바람에 떨리는 단풍과 닮았다. 조그맣고 섬세하지만 살아있는 것.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움직인다는 것을. 멈춘 것 같아도, 정지된 것 같아도, 살아있는 모든 것은 움직인다. 살아 있음으로 계절은 바뀌고 세상은 변한다. 생명이 태어나고 존재가 소멸한다. 노란 단풍은 햇살을 머금고 푸른 하늘을 밝혔다. 가을은 눈부신 계절이다.
작년 오늘, 엄마가 죽었다. 준비가 안된 일이었다. 예상할 수도 없었다. 3일간의 장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한숨 잤더니 왼쪽 새끼손가락이 펴지지 않았다. 힘을 주어 펴려고 하면 펴지기는 했지만 구십 도가 넘어가면 손가락이 떨렸다. 일자로 펴고 있으려면 손 전체가 떨렸다. 그냥 놔두면 구부러져 있다는 이물감이 들었다. 원인을 알고 싶거나 병원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엄마가 죽었는데 손가락 하나쯤 안 펴지는 거야 별일 아니었다. 아팠으면 생각이 달랐겠지만 다행히 아프지는 않았다. 엄마를 혼자 보내기 싫어 손가락을 같이 보냈다고 생각했다. 손가락으로 엄마와 내가 이어진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했다.
엄마는 청소일을 했다. 자동차 회사에서 일했고 그날도 새벽 3시 40분에 출근을 하고 있었다. 여느 날과 같이 빌라에서 언덕길을 내려갔고 두 번의 계단을 지나 마을버스를 탔다. 마을버스에서 파란색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다시 한번 버스를 갈아타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회사 건너편의 버스 정류장에 내린 엄마는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고 낯선 굉음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차에 치였다. 노란색 2인승 포르셰였다. 가해자는 나보다 두 살이 어린 스물한 살이었다. 음주운전이었고 그는 만취 상태였다. 엄마를 차로 쳤다는 사실도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위험운전치사상죄라는 죄목으로 그는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검사는 9년을 구형했지만 법원에서는 나이가 어리다는 등의 이유로 7년을 선고했다. 담당 수사관은 나에게 손해배상을 위한 민사소송을 제기하라며 변호사를 소개해 주었다. 그는 법원의 양형이 아쉽다고 했지만 나에게 중요한 건 그에 대한 분노보다는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었고 엄마를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평생을 봐온 엄마였지만 엄마가 떠난 후로는 엄마 얼굴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사진 속 익숙한 얼굴이 고개만 돌리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덜 슬퍼하라고 엄마가 그 기억까지 가져갔는지 모르겠다.
엄마가 없으면 나는 혼자였다. 아빠는 어려서부터 없었고 외동이었다. 가족은 엄마와 내가 전부였다. 아빠가 누군지 엄마는 알려주지 않았다.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아빠가 해외에서 일을 한다 거나 일찍 돌아가셨다든가 하는 설명도 없었다. 아빠에 대해 물으면 엄마는 항상 '아빠는 없다'라고만 했다. 왜 나는 아빠가 없는지 이해가 안 됐고 답답함에 짜증을 내며 운 적도 있다. 하지만 몇 번을 물어도 엄마의 대답은 같았고 감정을 뺀 엄마의 태도에 나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는 아빠가 없는 사람도 있고 그게 나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 운동회에서 아빠들의 계주가 있었다. 친구들은 상기된 얼굴로 자기 아빠를 응원하는데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런 순간에 결국 떠오른 건 '아빠는 없다'라는 엄마의 말이었다. 이미 그때부터 아빠가 왜 없는지 생각하는 것보다는 '아빠는 없다'라고 인정하는 게 더 편했다. 그건 엄연한 하나의 사실이었다. 설명과 해명, 거기에 더해질 수밖에 없는 거짓말이 나에게 더 상처가 될 거라는 걸 엄마는 알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그녀 나름의 배려였다. 아빠들의 계주 시간에 나는 그냥 학교를 빠져나와 정문 앞 슈퍼에서 포도맛 쭈쭈바를 사 먹었다.
혼자 살아야 했다. 내게 남은 건 엄마와 같이 살던 투룸 빌라와 엄마의 사망 보험금이 있었다. 수사관이 연결해 준 변호사를 통해 가해자에게 손해배상 청구도 해둔 상태였다. 당장의 생계에는 충분한 돈이었다.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보험사와 경찰서, 법원에서 오는 연락을 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학교는 가기 싫었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애초에 가까이 지내던 친구도 없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나름대로 친하게 지내던 친구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나랑 친하던 친구들은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거나 졸업한 뒤 연락이 끊기거나 별 이유 없이 멀어지기도 했다. 대학에 가서는 철저히 혼자였다. 먼저 나서지 않으면 친구가 생기지 않았다. 가끔 먼저 다가와 친절하게 구는 사람도 있었지만 미적지근한 내 반응에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벌써 일 년이 지나 엄마 기일이었다. 납골당에 가서 인사를 하고 돌아온 날이었다. 자다가 몽정을 해서 팬티가 젖었다. 사정의 순간 정신은 깨어 있었지만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물에 젖은 휴지처럼 몸이 무거웠고 손가락 발가락 끝에도 힘이 없었다. 근육을 벗어두고 정신만 깨어난 것 같았다. 팬티를 갈아입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잠에 들었다.
꿈에 나온 건 고등학교 동창 여자애였다. 2학년 때 같은 반이었지만 대화를 해본 적은 없었다. 하얀 피부에 분홍색 혈색이 생기 있고 생머리가 등까지 내려오는 친구였다. 머리를 묶을 때면 두 번 세 번 옆머리를 쓸어 올렸는데 숱이 많은 구레나룻의 잔머리가 하얀 피부와 대조를 이뤘다. 하복 교복을 입으면 가느다란 팔뚝이 아기 피부처럼 하얬다. 우리는 푸른 잔디밭에 누워 있었다. 사방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였다. 한 그루의 느티나무가 우리 위로 그늘을 만들었다. 그녀는 내 품에 잠들어 있었다. 감고 있는 두 눈 이은 주말 아침 햇살처럼 평화로웠다. 어떤 근심도 어떤 어려움도 없어 보였다.
처음 와 본 곳이었다. 언덕과 잔디와 나무가 모두 낯설었다. 새소리가 들렸고 잔디마다 햇빛이 부딪쳐 투명했다. 여기는 어딜까, 생각하는데 그녀의 손이 바지 위로 나의 페니스를 잡았다.
크큭
그녀가 웃었다. 잠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내 페니스를 손 끝으로 쓸었다. 집게손가락으로 길이를 재듯 만지더니 이내 손바닥으로 움켜쥐었다. 그녀의 정수리가 보였고 구레나룻의 옆머리가 보였다. 볼은 투명한 듯 하얬다. 나는 발기했다. 온몸의 세포가 저릿했다. 그 상태로 몸이 마비된 것 같았다. 느티나무의 그늘이 비껴가기 시작했다. 강한 햇빛에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녀의 손은 멈추지 않았고 나는 신음을 냈다.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발기했다.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더니 한번 더 '크큭'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내 바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버튼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팬티 안에 손이 들어온 순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대로 사정했다. 모든 걸 쏟아내는 듯한 강한 사정이었다.
다시 잠들었다 일어났을 때는 오전 11시가 넘었다. 몽정한 게 생각나 덜 깬 몸을 이끌고 화장실로 갔다. 팬티를 벗고 샤워기로 밑을 닦았다. 팬티를 물로 빨았다. 세면대 거울에 내가 비쳤다. 며칠 째 면도를 안 해 수염이 거뭇했다. 생생한 꿈이었다. 이런 꿈이 언제나 그렇듯 결정적인 순간에 잠에서 깬 게 아쉬웠다. 졸업한 지 4년이 지났지만 그 친구의 이름을 기억했다. 신아영이었다. 왜 하필 그녀가 나왔을까. 대화 한번 해본 적 없는 친구였다. 매력적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졸업한 지 벌써 4년이 지났다. 그간 만난 적도 없고 그녀를 떠올린 적도 없었다. 지금 꿈에 나오는 건 이해가 안 됐다.
샴푸로 머리를 감는 데 왼쪽 새끼손가락에 떨림이 없었다. 엄마가 죽은 뒤 손가락이 안 펴져 머리를 감을 때도 손이 저렸는데 그 이물감이 사라졌다. 머리에 거품을 묻힌 채 손등으로 눈을 한번 닦았다. 왼손 손바닥을 얼굴 높이로 올렸다. 손이 정상으로 돌아온다면 엄마가 죽고 두 달 만이었다.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잠시지만 긴장됐다. 하지만 그대로였다. 새끼손가락은 여전히 굽어 있었고 펴려고 하면 손이 떨렸다. 방금 전에는 이물감이 없었는데 분명 그렇게 느꼈는데 착각한 건지 잠이 덜 깬 건지 알 수 없었다. 덜 닦인 샴푸 거품이 눈에 들어갔다. 따가움을 참고 머리를 헹구는 데 현관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띵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