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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파수꾼 18

by 추세경

며칠 째 이 모텔에 묵고 있었다. 대부분의 시간은 잠을 잤다. 자도 자도 졸렸고, 밥을 먹으면 한두 시간 정도 정신이 맑을 때도 있었지만 침대에 누워 있으면 이내 졸렸고 눈을 감으면 잠에 들었다. 몸에 열도 났고 두통도 있었다. 지난 100일간의 떠돌이 생활로 몸이 피곤한 것 같았다. 그간에 도서관을 찾아다니거나, 소설책을 찾는 건 하지 않았고, 정신이 깰 때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계좌에 있는 돈을 확인했다. 돈은 아직 계좌에 그대로 있었다. 흑구가 말한 일주일이 벌써 절반이 지나고 있었다. 압박이 강한 밴드가 이마에 걸린 듯 잠에 들 때나 잠자는 중간에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이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잠깐 스치는 생각에 불과했다. 다시 잠에 들었고, 잠에 들면 몸의 썩은 부위에서 새어 나오는 듯한 괴상한 꿈을 계속 꿨다. 모텔에서 며칠을 묵는 건 신기한 경험이었다. 옆방에서 들리는 신음소리는 날마다 소리가 바뀌었다. 여자의 신음이 더 클 때도 있었지만 남자의 신음이 더 클 때도 있었다. 셋째 날에는 편의점에 밥을 먹으러 내려가는 데 중년의 남녀가 모텔 입구에서 서성였다. 아저씨는 별거 아니라며 빨리 들어가자고 하는데 아줌마는 부끄럽다며 뭘 이런 데를 오냐고 했다. 실랑이를 벌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상 곧 모텔에 들어갈 것 같았다. 부부도 아닌 것 같았고 연인도 아닌 것 같았다.


오늘이 모텔에 온 지 4일 째였다. 오늘도 거의 잠만 잤다. 정신을 차려 보니 벌써 해가 진 저녁이었다. 이번에 깼을 때는 그전과 달랐다. 몸이 개운했고, 정신도 또렷했다. 아팠던 몸이 이제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거친 소나기가 게이고 맑은 해가 뜨는 것처럼 몸은 언제 아팠냐는 듯 개운했다. 가벼운 움직임으로 화장실에 들어가 씻었다. 바디 워시와 샴푸를 평소보다 많이 짜서 거품을 냈다. 따뜻한 물로 거품을 닦아 내며 몸을 구석구석 닦았다. 사일 째 면도를 안 해서 면도기로 수염을 세 번 네 번을 밀었다. 저녁은 터미널 근처까지 걸어가서 어디든 식당에 가볼 생각이었다. 모텔에 들어온 내내 편의점 음식들 로만 끼니를 때웠다. 밥 다운 밥을 먹고 싶었다.


모텔 입구를 나오는데 입구와 연결된 계단 밑에 검정고양이가 있었다. 내가 올 줄 알았다는 듯 빤히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이 노란 고양이였다. 고양이 인간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사람은 없었다. 혹시 인간으로 변신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조로 님?'이라고 외쳤는데, 고양이는 뒤를 돌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혹시 또 사라질까 빠른 걸음으로 고양이에게 다가갔지만 고양이는 도망가지 않았다. 다만 내 쪽으로 몸을 돌리지는 않았고 갈 곳이 있다는 듯 속도를 유지하며 걸었다. 나는 고양이 뒤를 따라갔다. '조로 님'이라고 몇 번을 불렀지만 고양이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누가 보면 내가 고양이를 산책시킨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지금 상황은 반대였다. 고양이가 나를 산책시키고 있었다. 고양이는 내가 공원에서 왔던 길로 걸었다. 차도 옆 폭이 좁은 인도였다. 해진 저녁이었고 차도를 비추는 가로등만 있었기 때문에 인도에는 불빛이 거의 없었다. 낮에 걸을 때도 위험한 곳이라고 느껴졌는데 밤에는 더 위험했다. 고양이는 그런 건 전혀 상관없다는 듯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


고양이가 멈춘 곳은 4일 전 흑구를 만났던 공원 앞이었다. 공원 입구 앞에 도착해 고양이는 뒤를 돌아 나를 마주 보는 자세로 앉았다. 이곳이 도착지점이라고 알리는 것 같았다. 녀석은 내 눈을 마주쳤고 나도 그 녀석을 바라보았다.


“나를 도와주러 온건가요?”


고양이 인간은 말이 없었다. 말을 안 하는 건지 말을 할 수 없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를 마주 보던 고양이는 몸을 틀어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녀석이 보는 곳은 공원 입구의 안내판이었다. 안내판을 한번 보았다가, 나를 한번 보았다가, 다시 안내판을 보았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걸 반복했다. 안내판을 보라는 건가, 조금 더 앞으로 걸어가 안내판 쪽으로 핸드폰 라이트를 비췄다. 밤이라 안 보이던 글자들이 드러났다.


‘이상한 나라의 공원’


공원의 이름이었다. 공원 입구 안내판에는 분명 ‘이상한 나라의 공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순간 고양이가 달리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땐 이미 따라잡을 수 없는 거리였고 공원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 이미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이곳에 나를 안내했듯 본인을 따라오라는 듯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고양이가 움직인 쪽으로 달려가 주변을 살폈지만 어디에도 고양이는 없었다. 편의점 앞에서 사라졌을 때처럼 다시 한번 사라지고 없었다. 짜증이 났다. 고양이 인간은 매번 제멋대로였다. 나타나고 싶을 때 나타났다가 말도 없이 사라졌다.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도 애초에 고양이 인간 때문이었다. 흑구가 고양이 인간이 사기꾼이라고 말했던 게 오히려 맞는 말일지도 몰랐다. 제대로 도움도 주지 않을 거면 애초에 나타나지 말든지 왜 자꾸 나타나 심란하게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배도 고픈데 왜 또 여기까지 온 건지, 왜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을까. 공원 안내판이 생각났다. 그쪽으로 다시 뛰었다.


양쪽에 목재 기둥을 사이에 걸려 있는 네모난 철재 안내판에는 분명 '이상한 나라의 공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휠체어의 노인은 나에게 '소설책'은 '이상한 나라의 도서관'에 있다고 했다. 근데 이곳이 이상한 나라의 공원이었다. 안내판을 보니 상단 가운데 공원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아래로 안내사항들이 있었다. 화장실이나 벤치, 운동시설, 호수, 음수대 등의 위치가 모식도 안에 표시되어 있었다. 흑구를 만났던 호수의 둘레길도 모식도 안에 표시되어 있었다. 공원에서 지켜야 할 사항들도 적혀 있었다. 흡연이나 노점 행위, 애완견의 배설물을 방치하는 행위 등을 하면 안 된다고 적혀 있었다. 공원의 이름 외에는 평범한 안내판이었다. 안내판 하단에 공원의 관리처가 적혀 있었다. ‘이상한 나라 관리 재단’이라는 곳이었다. 느낌상 지자체나 나라에서 관리하는 재단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공원은 개인의 사유지나 사설 단체가 무료로 개방한 공원이었다. 안내판에 입장료를 내야 한다는 말도 없었고 입구에 매표소도 없었다. 지난번에 공원으로 뛰어 들어갈 때도 아무 제한도 없었다. 안내판에 적힌 재단의 이름 옆에는 대표 번호가 적혀 있었다. 혹시나 해서 전화를 걸었지만 저녁 6시가 지나 업무 시간이 아니라는 기계음이 나왔다. 일단 번호를 핸드폰에 저장했다. 내가 안내판에 앞에 서있는 동안 두 명이 공원에서 나왔고 세 명이 공원으로 들어갔다. 산책하러 나온 주민들이었다. 그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쉼터인 것 같았다. 안내판 주변을 한 동안 서성였다. 혹시 고양이가 나타날까 싶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배가 고팠다. 일단 오늘은 다시 숙소로 가야 했다. 공원을 가로질러 터미널 근처로 가서 순댓국 한 그릇을 사 먹었다. 30년은 된 것 같은 오래된 식당이었는데 국물이 진짜 맛있었다. 오랜만에 먹는 제대로 된 밥이어서 그럴 수도 있었다. 공깃밥을 한 공기 더 시켜 먹고 식당을 나왔다. 다시 공원을 가로질러 차도를 걸어 모텔에 돌아왔다. 양치하고 손발만 닦고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으로 ‘이상한 나라 재단’에 대해 검색했다. 검색 페이지 가장 위에 재단 홈페이지가 있었다. 클릭해서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재단 소개가 있었다.


이상한 나라 재단은 1973년에 설립된 재단으로 어느 독지가가 본인의 전재산을 기증하여 만들어진 재단이었다. 전국 곳곳에 시민들을 위한 녹지 공원을 조성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그 외 사업으로 보육원과 대안학교 등을 운영하고 있었다. 1989년과 2007년에는 사회 공헌의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에서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재단은 산하에 소속된 경영위원회에 의해 운영되고 이사장은 선출직으로 임기는 5년이었고 재임은 불가했다. 역대 이사장 연혁이 있었는데 장관출신도 있었고 대학교 총장 출신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소설가 출신도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625 전쟁 전후의 삶을 대하소설로 그려 한국의 근현대사를 생생하게 그렸다는 평을 받는 소설가였다. 시설현황에 들어갔지만 '이상한 나라의 도서관'은 없었다. 애초에 그게 있었다면 내가 인터넷을 검색했을 때 그때 찾을 수 있어야 했다. 혹시나 싶어 다시 한번 이상한 나라의 도서관으로 검색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제야 검색페이지 하단에 이상한 나라 재단과 관련된 정보들이 보이긴 했다. 내일은 대표 번호로 전화해 이상한 나라의 도서관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한번 더 공원에 가보려고 했다. 증거는 현장에 있다고, 공원에 가야 뭐라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되든 안되든 일단 가보는 것이다. 혹시 내가 이상한 나라 재단에 대해 알아보고 다니는 게 흑구의 제안을 거절하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걱정이 된다,라고 하기엔 양심에 걸렸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머리를 한번 좌로 우로 여러 차례 돌렸다. 이런 생각은 하지 말아야 했다. 엄마를 만났던 것도 벌써 4개월이 지났다. 엄마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존재하고 있기는 한 걸까. 흑구가 말한 것처럼 고양이 인간이 말한 게 다 거짓이라면, 엄마가 애초에 죽었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걸까. 하지만 나는 분명 엄마를 만났다. 엄마 밥을 먹었고 엄마 손을 잡았고 엄마를 안고 울기도 했다. 생생한 감각이었고 그것들이 모두 거짓이라고 한다면 그건 내가 미쳤다는 증거였다. 내가 미치지 않았다면 엄마를 만난 건 사실이었다. 제멋대로인 고양이 인간이 밉지만 그가 말 뿐인 사기꾼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이 서사의 악역은 고양이 인간이 아니라 흑구였다. 현재로서는 그랬다. 흑구는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는 천사가 아니라 악마였다. 그게 유혹인 걸 알면서도 미혹되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 대해 신아영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흑구를 만났고, 돈을 받았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그걸 단번에 거절하지 못했다고, 그게 괴롭지만, 그게 고민이라고, 그런 얘기였다. 가끔 이렇게 신아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가 어떻게 사는지, 어떤 도서관을 다녀왔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등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지금 내 상황을 털어놓을 사람은 신아영 밖에 없었다. 그녀가 안 읽어도 어쩔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뭐라도 보내야 했다. 답장을 기다리는 게 괴롭지만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기도 했다. 최소한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은 일방적인 소통이지만 언젠가 신아영이 또 내 앞에 나타날 거라고 믿고 있다. 그 믿음은 설렘이고 외로움을 견디는 힘이었다. 메시지를 보내고 핸드폰을 껐다. 손이 안 닿을 거리에 핸드폰을 두었다. 이제 핸드폰을 그만 보고 싶었다. 옆 방에서는 오늘도 신음소리가 들렸다. 소리만 들었을 땐 새로운 사람들이었고 이곳에 온 이후로 가장 격정적인 섹스를 했다. 오늘은 신음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괜히 더 외로워지는 것 같았다. 이불을 머리까지 덮었지만 계속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고추가 커져 있었다. 이렇게 된 거 고추를 만지기 시작했다. 며칠 만에 컨디션도 괜찮았다. 뭐를 상상할까 고민하며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지를 벗고 팬티를 벗고 침대에 대자로 누웠다. 커진 고추에 피가 쏠렸다. 달아 오른 핏줄에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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