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지역아동센터'
"놀이터에서 재밌는 놀이 할 사람~?"
9년 전에도 초등학생들은 스마트폰의 노예였다. 지역아동센터(이하 센터) 아이들은 쉬는 시간만 되면 눈이 뚫어져라 스마트폰만 쳐다봤다. 보조교사였던 나는 놀이터로 유혹한다. 마치 홈쇼핑 매진 임박 때처럼 "늦게 오는 사람은 술래~"라는 말까지 해주면 완벽하다.
핸드폰이 없는 저학년과 운동을 좋아하는 고학년 몇 명이 놀이터로 뛰어나오다 보면 스마트폰에 집중하는 애들도 슬쩍 관심을 보인다. "선생님 무슨 놀이하는데요?" "저 늦게 나가는데 술래 하기 싫어요" 이 말이 나오면 작전 성공.
"선생님이 술래 할 거니까 늦게 오면 못한다"
(예전 사진이 있긴 한데 아이들 얼굴도 가려야하니 챗GPT로 대신했습니다)
보조교사 업무
센터 보조교사는 주 교사를 도와 공부를 가르쳐줘야 한다. 초등 1학년부터 6학년까지 30여 명 정도이다 보니 교사 한 명이 모든 아이들을 신경 쓰기 어렵다. 그때 보조교사는 학업 의지가 부족한 아이를 담당한다. 글을 못 읽는 1학년 친구도, 국어는 좋아하지만 수학을 싫어하는 친구도 있다.
공부 가르치기보다 더 중요한 업무가 있다. 바로 놀이다. 아이들과 보드게임이나 체육활동을 함께 하는 것이다. 아이들과 놀아주는 게 아니라 같이 놀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다 큰 성인이 초등학생들과 같이 노는 게 재밌는 일은 아니지만 정신연령이 높지 않은 나였기에 재밌게 같이 놀았다.
모든 놀이에는 규칙이 존재한다. 얼음땡에도 술래가 있어야 하며 술래 아닌 사람이 얼음을 하면 움직일 수가 없다. 술래는 얼음이 아닌 사람을 잡을 수가 있는 간단한 규칙이 있다. 이 규칙을 어기게 되면 그때부터 애들은 싸움이 시작된다. 그때를 대비하기 위해 심판 역할을 하는 어른이 필요하다.
가르치는 즐거움
공부하는 시간만 되면 집중 안 하고 다른 얘기를 하거나 놀고 싶어서 몸을 베베 꼬는 친구 한 명이 있었다. 문제를 풀어보라고 해도 딴짓을 하면서 공부에 의욕이 없어 보이는 친구였다. 나는 그 친구에게 친해지기는 게 먼저였다고 생각했다.
"땡땡이는 꿈이 뭐야?"
"저는 경찰이 되고 싶어요"
"경찰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멋있어야 하고 운동도 잘해야 해요"
"땡땡이는 운동 잘하니까 경찰이 될 수 있겠네. 근데 경찰 되려면 경찰대학 들어가야 하는데 공부도 잘해야하지 않을까?"
"네..."
그 이후부터 땡땡이는 거짓맛처럼 공부를 해보려고 노력했다. 땡땡이가 공부를 안 하려고 게으름을 피울 때면 "땡떙경찰관님 이번 문제만 풀면 멋있는 경찰 되지 않을까요?" 이러면서 동기부여를 심어줬다. 초등학생 감성의 동기부여로 공부를 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신기했다.
또 다른 친구 빵빵이도 말 안 듣고 공부 안 하는 친구였다. 빵빵이는 국어, 수학 등 주요 과목에 흥미가 없어 공부시간만 되면 연습장에다가 그림을 그렸다. 빵빵이랑도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빵빵이는 학교에서 무슨 수업이 가장 재밌어?"
"저는 미술시간이 재밌어요"
"빵빵이 그림 잘 그리는구나"
"그림이 아니고 제가 하는 건 이런 거예요"
핸드폰을 꺼내더니 본인이 수수깡으로 만들었던 집, 배 등 다양한 구조물을 보여줬다. 손재주가 없던 나에게는 그 수수깡 작품이 대단해 보였다. 자세히 보면 수수깡 색깔을 잘 골라 나름 디테일한 색감도 드러났다.
"빵빵이 엄청 잘 만드는구나~ 선생님은 이런 거 잘 못 만드는데 빵빵이는 나중에 커서 실내 인테리어 이런 쪽으로 가면 부자 되겠다"
이 얘기를 듣자 빵빵이는 부끄러워하더니 점점 내 말을 잘 듣기 시작했다. 본인이 좋아하고 잘하는 거에 대해 칭찬을 들었을 때 사람은 무장해제 된다. 빵빵이한테도 싫어하는 것도 해야 좋아하는 걸 더 잘할 수 있다고 설명해 주자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었다.
말실수
2학년 친구 중에 정말 말을 잘 듣고 밝은 여자 아이가 있었다.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건 절대 안 하는 그런 친구였다. 사실 그 친구가 면학분위기를 좋게 만들어주기도 했고 말도 잘 듣다 보니 정말 편하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영희(가명)는 지난 주말에 뭐 했어?"
"놀이공원 다녀와서 재밌게 놀고 왔어요"
"엄마랑 아빠랑 같이 가서 재밌었겠구나"
"우리 엄마랑 아빠랑 이혼했고 엄마랑만 다녀왔어요. 아빠는 멀리 살아요"
아차! 싶었다. 해맑게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영희를 보고 난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사실 9년이 지난 지금도 초등학생이 내 앞에서 똑같이 말한다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아직도 모르겠다. 나의 어설픈 말 한마디가 아이한테는 상처로 남진 않을까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값진 경험
말실수를 한 적도 있긴 하지만 친구 같은 선생님 역할로 인해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20대 후반에 적성을 늦게 찾은 것 같아 '교대에 다시 재입학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죽하면 매일 점심시간마다 나랑 같이 밥을 먹자고 남자무리와 여자무리가 싸우곤 했다. 결국 하루는 남자 무리와 하루는 여자무리와 번갈아가면서 밥을 같이 먹었다. 아마 밥을 먹는 시간이야말로 애들이 공부에서 벗어나서 즐거운 시간이었던 거 같다.
내가 워낙 아이들과 잘 어울리니 센터장과 직원이 나에게 칭찬을 많이 해주기도 했다.
"구독함 선생님은 나중에 좋은 아빠가 될 거에요"
나도 아마 MBC 예능프로 <아빠! 어디가?>에 나온 이종혁을 보고 '나도 저런 아빠가 돼야지'라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다. 권위적이지 않고 아이들과 재미있는 게 노는 게 최고의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성장하는 아이
1년 동안 아이들이 성장하는 게 눈에 보였다. 까불거리던 아이가 진중한 면도 생기고 키가 조그맣던 아이가 키가 확 커버리기도 했다. 눈앞에서 성장한다는 걸 지켜본다는 건 엄청나게 큰 뿌듯함을 안겨준다. 아이들의 인생에서 나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 중 한 명이었겠지만, 내 인생에서 그 1년은 정말 소중한 기억이었다.
아이들마다 성격 다 다르고 재능도 다 다르다. 누구 하나 안 이쁜 사람이 없다. 교우관계가 좋지 않거나 공부를 잘 안 하는 친구들도 관심과 사랑을 주다 보면 금방 또 말을 잘 듣게 된다. 성격이 부정적이거나 시니컬한 친구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이해하다 보면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9년이 지났지만 카카오톡으로 안부를 물어보는 학생도 있다. 초등학생이었던 애가 지금은 대학생이 되서 자격증도 따고 운전면허 시험도 봤다고 자랑을 했다.
또 다른 아이들의 페이스북 계정을 보다 보면 술 먹는 사진, 화장하고 해외여행 간 사진 등을 보면서 기분이 좀 이상했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9년 동안 나도 성장한 게 있는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