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사진은 바래도, 인연은 선명하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성인 이후에 만난 사람은 친해지기 어려울까?
학교를 졸업하면 사람에 대한 마음의 문이 조금씩 닫힌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갈 용기도 안난다. 그렇다고 나에게 먼저 다가오면 조심스러워진다.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주지' 언제부턴가 경계심은 개인주의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이 되고 누군가 다가오면 적당한 거리감이란 이유로 선을 긋게 된다.
압도적 분위기
지하 공장은 엄청 넓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매캐한 공기와 수십대 기계가 분위기를 압도했다. 기계 앞에는 편의점 노상에 어울릴만한 싸구려 의자가 있다. 기계음 돌아가는 소리만 들릴뿐 수십 명의 사람들은 싸구려 의자에 앉자 각자 할 일만 할 뿐이었다. 기계와 함께 돌아가는 인원은 성격이 고약한 사장과 남자 부장을 제외하곤 40대 이상의 여사님들이 대여섯 명, 20대 남성이 열댓 명 정도가 다였다.
과거 리사이클시티에서 선풍기를 조립을 하다가 정신을 놓아버린 기억 때문인지 공장 업무를 앞두고 걱정이 유독 컸다. 정말 다양한 기계가 있었고 부장이 20대 알바생들은 포지션에 맞게 배치시켰다. (무슨 기준으로 배치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나의 졸업 앨범이 나오기 위해서는 수많은 작업을 해야 한다.
모든 기계를 다루진 않았지만 업무 강도가 크게 구분되진 않는다. 몸이 쉽고 편한 업무일수록 부장이나 사장 옆자리에서 일을 해야 하고. 어려울수록 혼자서 일을 하기 때문에 눈치를 덜 봐도 된다.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한쪽 이어폰을 몰래 끼고 음악을 들은 적도 있다. 50분 일하고 10분 쉬는 시스템이었는데 50분이 과장 좀 보태서 5시간 같았다.
친해진 계기
오전 업무가 끝나면 1시간의 점심시간이 주어졌다. 20대 또래들은 대부분 공장 인근 중식당으로 향했다. 2012년 자장면 가격이 3000원(가격이 정확하진 않다)이니 돈이 없는 20대에게는 그거 만큼 가성비 있는 식당은 없었다. 나도 몇번 쫓아갔는데 너무 맛이 없었고 매일 먹다 보니 물리기도 했다. 자장면 모임에 빠지려면 또 다른 점심 모임을 찾아야 했다. (13년전만해도 혼밥의 용기가 없었다)
여사님들은 공장 휴게실 같은 곳에서 도시락을 싸왔다. 엄마의 도움을 받아 도시락을 부탁했다. 여사님과의 식사 자리가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소소하게 담소를 나누며 (주로 들었지만 ) 도시락 까는 재미가 쏠쏠했다. 점심시간에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는 A형도 있었는데, 나를 보더니 도시락을 싸와 나랑 여사님과 함께 점심을 먹기도 했다.
김치나 멸치볶음을 먹어보라고 주는 여사님도 있었다. 매운 걸 잘 먹지 못하는 나는 싫은 티도 못내고 억지로 먹었다. A형도 매운걸 좋아하지 않는데 "제가 매운 걸 잘 못 먹는데 이건 맛있게 맵네요~" 하면서 넉살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감탄을 했다. 그 형의 넉살을 보고 감탄을 하며 친해지기로 노력했다. 참고로 이 형이랑은 공장 사람들과 별명을 붙여 뒷담 아닌 뒷담을 하기도 했다.
20대 무리 중에 A형 말고도 마음이 맞는 B동생도 있었다. B동생 집과 우리 집과도 굉장히 가까워 금방 친해졌다. 스타크래프트라는 공통관심사도 있었고 키도 크고 훤칠해 호감이기도 했다. (아르바이트할 때만 해도 신하균을 닮았다고 느꼈는데 요즘은 미미미누를 닮았다) C형이랑도 공통 관심사인 축구로 금방 친해졌다. 주위에 흔치 않은 K리그 팬인데다가 각자 응원하는 팀이 라이벌팀이어서 더 친해진 것도 있었다.
13년이 지나도
졸업 앨범 공장을 퇴사하고 나서도 A형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갔다. 자주 보지는 않았으나 클럽알바, 농구장 알바 등 같이 일을 하며 친목을 다졌다. 공장에서 했던 것처럼 알바를 마치고 나면 소회를 같이 나누기도 했다. 그 이후 각자 직장을 잡아서 가끔씩 맥주 한잔씩 하는 사이다. 만날 때마다 예전 추억을 꺼내보곤 하지만 예전처럼 돈독해지는 건 아닌 거 같다. 각자의 상황도 달라지고 공통관심사가 적다 보니 더 가까워지는 건 조금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B동생과도 연락을 줄곧 이어갔다. 성격이 다른 탓에 서로에 대해 신기해하기도 했다. MBTI 열풍이 있기도 전에 지역구에서 하는 MBTI 상담소도 같이 받아본 기억이 있다. 아줌마들 사이에서 젊은 30대 남성 둘이 앉아서 열심히 MBTI에 관한 강의를 듣고 테스트도 해봤다. 지금도 종종 가끔씩 만나는 사이이며 연애, 결혼 등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됐다. (내 여동생이 사진을 보더니 자기 친한 언니를 소개해 준 적도 있다.)
C형이랑은 정말 우연한 기회에 연락이 닿았다. A형과 B동생과 달리 연락을 꾸준히 안 하다가 풋살 상대팀으로 만났다. 1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C형이 나를 기억해 주고 연락을 하는 바람에 나도 기억의 조각이 맞춰졌다. 그 이후로 연락을 종종 주고받다가 같이 풋살도 하고, K리그도 보며 술 한잔을 기울이는 사이가 됐다.
인연의 끈
나는 사람 욕심이 있는 편이다. 어느 집단에 속해서 '친한 사람 1명만 있으면 된다'라는 마인드를 갖는다. 그 집단에 나와서도 편하게 연락할 수 있는 한 사람만 있으면 그 경험은 잘했다고 생각한다. 1년이 채 안된 공장장에서 무려 3명의 인연을 10년 넘게 이어가고 있는 거 보면 정말로 신기하다. 때 묻지 않은 20대 초반의 나이여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아쉽게 A형, B동생, C형 모두 넷이 함께 모인 적은 없다. C형은 워낙 짧은 기간 근무를 했던 탓에 A형과 B동생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넷이 한번 자리를 마련해 보일까 생각도 했지만 넷이 시간 맞추기도 어렵고 셋이 모두 관심분야가 다르다. A형은 자전거와 운동 B동생은 운동과 책, C형은 축구와 자전거다. A형과 B동생이랑은 내가 주선해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요즘은 나보다 둘이 더 연락을 자주 하는 거 같기도 하다.
오래 본다고 인연이 유지되는 것도 아니고 관심사가 다르다고 인연이 짧게 끝나는 것도 아니다. 두 사람이 양쪽에서 인연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 사람만 노력하면 끈이 끊어지는 건 시간문제다. 타블로가 말하길 "인연은 우연이고 관계는 노력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30대 이후에 만나 친해져서 연락도 종종 하고 만나는 사람은 몇 사람이 되지 않는다. 그만큼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관계를 이어나가긴 어려운 일이다. 40대, 50대가 되어서도 그러지 않을까? 바쁘고 바쁜 현대사회에서 인연의 소중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