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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연 Feb 23. 2019

잠시도 떨어질 수 없다

스탠리 원 핸드 머그 텀블러


버리지 못하는 자의 항변


미니멀리즘 라이프스타일은 일상에서 불필요한 것을 걷어내어 생활을 최대한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비움의 철학’은 음식, 수입과 지출, 인간관계, 가사와 노동, 사회 환경을 비롯한 거의 모든 인간사를 총망라한다. 그중에서도 정리 습관은 미니멀리즘의 핵심사항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관련 책들은 삶에서 얼마나 잉여 물질을 걷어내느냐로 승부를 가른다. 보통 1년 이상 사용하지 않은 물건은, 그것이 설령 스키복이나 수영복 따위의 시즌복이라 할지라도, 처분해야 한다고 닦달한다.


그러나 나에겐 도무지, 절대, 결코 버릴 수 없는 물건이 가득하다. 비싸서가 아니고, 아까워서도 아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물들은 모두 나와의 추억이 담겨있다. 그 소중한 존재들을 감히 쓰레기로 취급할 수 없다. 단순히 소유의 문제가 아니다. 고작 물건 하나 버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삶을 바꿀 수 있느냐고 물어도 어쩔 수 없다. 버림으로써 자유를 얻는다고 말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구조로 굴러가는 것이 양자역학과 인생이다. 


더군다나 사용시간으로 물건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자주’와 ‘방치’의 차이는 사용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결정된다. 사물에는 각각의 시간이 따로 있다. 하루 동안 여러 번 사용해야 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몇 년에 걸쳐 한 번 쓸까말까 한 것도 있다. 사용하지 않지만 곁에 두고 있어야 하는 것이 있고, 보는 것만으로 용도를 다하는 것도 있다. 오래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사물의 죄는 아니며, 버려질 일은 더욱 아니다.


사물의 가치는 ‘쓰임새’로 평가해야 한다. 쓰임새가 있다면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나는 아주 오래된 자주색 싸구려 티셔츠를 가지고 있다. 머리 두 개가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목이 늘어졌고 앞섶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음식 얼룩이 있지만, 좋은 ‘모양새’의 티셔츠를 제치고 가장 먼저 손이 간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걸레만도 못한 것이 내게는 세상 어떤 옷보다 편하고 좋다. 


미니멀리즘은 재테크와 같은 일종의 환상이다. 내가 사는 곳은 더럽고, 냄새나고, 복잡하고, 구역질 나고, 치졸하고, 역겨운 진짜 세상이다.     



원 핸드 머그 텀블러


뭔가를 좋아하면 옆에 두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보이지 않으면 보고 싶고, 떨어지면 가까이 가고 싶다. 내겐 커피가 그렇다. 한꺼번에 마시기보다 오래 두고 천천히 마시는 편이다. 항상 끼고 살지만 가득한 한 잔은 부담스럽다. 사랑도 한 번에 쏟아 붓기보다 천천히 음미하는 것이 좋다. 내가 텀블러를 사용하는 이유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한 번에 잔뜩 내려 텀블러에 담아두고 가지고 다니면서 마신다. 불편한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일방적인 짝사랑이니 다른 도리가 없다.

      

여러 브랜드의 텀블러를 사랑했었다. 비싼 것도 있었고, 원터치로 개폐가 용이한 것도 있었다. 무게와 크기를 가리지 않고, 화사한 것부터 좀 모자라 보이는 것까지 이것저것 다 집적거렸다. 그중에는 유명 커피 브랜드에서 제작한 첨단 신소재의 소위 잘 나가는 야무지고 핫한 아이템이 있었다. 그런 인기 제품들은 콧대가 높아 신경을 바짝 쓰고 모시고 다녀야 했다. 그런 날은 집에 돌아오면 제풀에 지쳐 세척은 고사하고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그에 비하면 스탠리 원핸드 머그 텀블러는 투박하기 이를 데가 없다. 자동차로 치면 고급 세단과는 거리가 멀고 픽업 지프쯤 되는 것 같다. 이름처럼 스테인리스로 되어있어 무겁고 견고하다. 굵기가 웬만한 팔뚝 저리 가라다. 손이 큰 사람이 아니면 들고 다니기 버겁다. 내 경우엔 이동할 때 옆구리에 끼고 팔짱을 건다. 설사 떨어뜨려도 상관없다. 그러라고 있는 제품이다. 350㎖와 470㎖ 두 가지 사이즈가 있는데, 길이만 다를 뿐 굵기는 같다. 그래서 차에 있는 컵 홀더에 안착하지 못하고 늘 삐딱하게 놓인다. 브레이크라도 밟을라치면 앞으로 고꾸라져 바닥을 굴러다니고, 여기저기에 침을 뚝뚝 흘려서 검은 커피 자국을 남긴다. 여간 손이 많이 가는 번거로운 상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다른 제품이 감히 엄두도 못 내는 강력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보온은 6시간 이상, 보냉은 10시간 이상 유지된다. 겨울에는 오후 나절까지 미지근한 커피를 즐길 수 있고, 여름에는 퇴근길까지 얼음이 들어간 시원한 커피를 보장받는다. 마치 전 애인에게 돌아가 너 만한 사람이 없었노라고 용서를 구하듯, 다른 신상으로 갈아탔다가 매번 실망하고 다시 돌아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두 가지 사이즈를 다 가지고 번갈아 사용 중이다. 각각 10년씩 된 것 같다. 찌그러지고 표면이 심하게 긁혔다. 그걸로 축구만 하지 않았지, 산속을 구르고, 50미터 상공에서 떨어지기까지 했다. 워낙 튼실하고 단단한 놈이라 외형의 문제는 내구성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다. 문제는 버튼으로 된 뚜껑에 있다. 1년에 한 번씩 뚜껑만 10번은 교체한 것 같다. 사실, 플라스틱으로 된 이 뚜껑은 매우 중대한 결함이 있다. 검지를 이용하여 버튼을 누르면 상단에 작은 구멍이 열린다. 이때 몸체를 기울여 입에 대고 마시는 방식이다. 검지에 힘이 들어가는 동안엔 구멍이 열리고 손을 떼면 닫히는 단순한 원리인데, 뚜껑을 해부해 보면 그리 간단하지 않다. 고무마개가 딸린 개폐기와 잠금장치, 그리고 누룸판과 개폐기에 붙은 2개의 스프링이 있다. 가로의 운동력을 세로로 바꾸기 위한 장치들이다.     


이렇게 복잡한 구조는 용이하지 못한 세척, 분해 조립의 번거로움과 함께 검지에만 가해지는 집중에 중압감을 야기한다. 하루에 최소 100번 이상 누르는데, 만약 내부에 커피 찌꺼기와 같은 이물질이라도 끼게 되면 뻑뻑해진 버튼은 서너 배의 높은 힘을 요구한다. 따라서 검지 손가락은 헌신이라고 하기에는 강도가 지나친, 벌칙에 가까운 노동력에 시달린다.      


뚜껑 소재가 플라스틱이라는 점도 아쉽다. 원핸드 머그는 생긴 것처럼 애인 대하듯 살살 다루는 텀블러가 아니기 때문에 아웃도어에서 거칠 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떨어지고 긁히고 부딪히면서 생긴 충격은 고스란히 뚜껑으로 전달된다. 대부분 회생이 불가능한 후유증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핸드 머그를 고집하는 이유는 자유로움 때문이다. 영하 20도 밑도는 산속에서 눈을 털어내며 마시는 달달한 커피의 맛, 바다 한가운데 둥둥 떠서 즐기는 커피의 시원한 맛, 모닥불 옆에 쪼그리고 앉아 고구마를 구우며 마시는 커피의 씁쓸한 맛은 원핸드 머그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밖에도 일상에서 망치 대용으로 사용하기 좋고, 으슥한 밤중에는 무기로 손색이 없다. 캠핑 중에는 수건을 위에 덮어 베개로도 훌륭하다.   

  

뜨거운 커피를 넣고 뚜껑을 닫은 다음, 적당히 흔든 뒤에 뚜껑을 열면 픽, 하고 기압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커피 향이 밴 그 소리에 중독된 사람이라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 화장실과 목욕탕에서도 떨어지지 못한다.    

      

▶스탠리 제품은 텀블러 말고도 집에 보온병과 죽통, 컵이 몇 개 더 있다. 꽤 만족하는 편이다. 굳이 100년 전통을 따질 것 없이 확실히 아웃도어에 차별성이 있는 것 같다. 부피와 무게 때문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으나, 호신용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하다. 생긴 게 좀 험악하기는 해도 싸움 잘하고 의리심 강한 친구처럼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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