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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망 Oct 25. 2024

아테네적 관점에서

대체로 우중충하다가 잠깐 갠다면



90년대생들은 거의 <그리스로마 신화> 만화를 보며 자랐다. 한창 신화 붐이 일었을 때다. 애들은 한국 신보다도 그리스 로마 신들의 계보를 잘 알았고 줄줄 외우고 다녔다. 마치 남자애들이 어려운 공룡 이름을 잘 외우듯이. 헤르메스가 무슨 신인지, 제우스가 어떤 여자와 바람을 피워대서 그들이 별자리로 올라갔는지, 트로이 전쟁에서 신들이 어떻게 장난질을 쳤는지, 누가 누구의 아들이고 딸인지 등등. 



아마도 그 붐은 서구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 선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90년대부터 더욱 해외여행을 많이 다니기 시작했고, 유럽에 대한 관심도도 높아지면서, 유럽 문화의 근간인 르네상스와 그의 단골 소재 신화에 대한 관심, 교양을 배우려는 사회 분위기가 있었다. 캐릭터 비주얼도 예뻤기 때문에 우리는 만화책으로, 책으로, TV 만화로 수없이 복습을 했다. 



 기독교도 서양 문화의 근간이긴 하지만, 그건 애들이 보기에 좀 엄숙하고 재미가 없어서, 또 현재 종교와 연결돼 있어 편파적일 수 있기 때문에 붐이 안 된 것 같다. (내 생각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지금 종교로서 사람들이 받들진 않고 과거의 유산이라 거리감이 적절하다. ‘이야기’ 성격이 더 강하기도 해서 판타지 소설 읽듯이 그걸 읽었던 거다. 좀 더 먼 곳의, 신비로운 옛이야기들.



 내 신화사랑은 좀 유별나서 온갖 지역의 신화에 관심이 뻗어있다. 국문과에서 한국 전통 신앙을 배우는 민속학 과목도 좋아했다. 실제 당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인기로, 새로운 신화를 발굴하려는 조짐도 있었다. 북유럽, 이집트 신화들도 만화책으로 나왔으나 아쉽게도 큰 반향은 없었다. 나는 그쪽까지 관심 있던 소수의 독자였고 신화 자체의 매력에 빠졌다. 



신화에는 공통의 모티프와 맥락이 있다. 사람들을 묶어줄 강력한 통치 이념이자 그만큼 재밌게 만들어서 오래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들. 세상의 기원에 대해 설명해 줌으로써 사회 혼란을 줄이고자 했던 시도들. 그러려면 그만큼 신들이 매력적이어야 했다. 엄숙한 신이 아니라 바람도 피고 인간적이어서 공감을 부르는 신들이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들처럼. 



유독 그리스는 신화를 잘 보존하고 있을 것 같다는 환상이 있었다. 신전들이 남아있고 상대적으로 유럽 중에 ‘덜’ 도시화가 되었고 자연환경이 아름다운 곳일 것 같았다. <맘마미아!>만 봐도 그 아름다움을 실제로 보고 싶어졌다. 한국인이 많이 안 가는 나라이기도 했다. 서유럽, 동유럽의 정보와 이야기는 넘쳐났는데 그리스 여행 후기들은 많이 없었다. 그러니 더 호기심이 생겨 날 좋은 9월, 그리스로 떠났다. 





그리스는 지중해 남쪽에 위치하고 본토와 수천 개의 섬으로 구성돼 있다. 이오니아해, 에게해와 면해있다. 국기에서 파란색은 하늘과 바다, 흰색은 동방 정교회를 상징한다. 수도는 아테네. 공용어는 그리스어다. 2009년 국가 부도 위기 이후 실업률이 올라갔고 살기가 팍팍해졌다. 그리스 정부가 재정 적자를 숨겨왔다고 한다. 직접 가서 본 그리스는 가난한 나라라기엔 너무 아름다웠다. 왠지 생활감이 덜 느껴지고 거대한 야외 박물관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같았다. 



아테네의 중심은 신타그마 광장이다. X95 리무진 버스를 타고 공항에서 이동하면, 신타그마 광장과 아크로폴리스 쪽이 구시가, 오모니아 광장이 현재 주거 지역이다. 먼저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갔다. Pre-historic 관부터 시작해 쫙 돌았다. 미노아, 미케네, 에게해 문명… 아주 오래된 유물들이었는데, 믿을 수 없을 만큼 보존 상태가 좋았다. 무엇보다 항아리들이 참 많았다. 이 큰 것들이 어디서 보존되다 튀어나왔을까? 그려진 그림들은 거의 인간이었다. 싸우고, 사랑하고 살아 숨 쉬는. 



나체의 남자 조각상들은 희고 맑았다. 얼굴 없이 몸통만 있는 조각상들엔 이상한 힘이 느껴졌다. 몸통만으로도 허전함 없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옆 전시관의 거대한 ‘쿠로스’ 상은 나체 조각상으로, 이집트와 동양의 영향을 받은 시대, 기원전 600년보다 전에 제작됐다. 크기로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고전 시대는 그리스 미술의 전성기로 기원전 300년 즈음이다. 우리가 많이 접한 스타일로, 마라톤과 살라미스 전투, 펠로폰네소스 전투 등을 소재로 삼는다. 



그리스인들은 인간을 숭배했던 것 같다. 신들이 아니라, 아름다운 육체를 가진 인간들. 그걸 찬미하고 가꾸느라 온 인생을 다 쓴 사람들. 먹고 마시고 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몸으로 살아가던 사람들. 히포크라테스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육체는 우주의 원리를 나타낸다’고 말했다. 과연 올림픽 경기도 나체로 치르던 사람들답게, 몸과 정신은 통하는 모양이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에서 눈길을 끌었던 건 화려한 그림체였다. 사실 말풍선 속의 대사는 크게 상관없었고 그들의 큰 눈과 파란 눈동자, 금발 곱슬머리, 풍만한 육체, 주름 잡힌 얇은 옷감에 우린 매혹됐다. 모든 신과 인간들이 예쁘고 잘생겼었는데, 그중에서도 예쁜 남자나 여자가 나오면 그 페이지들에 더 오래 머물렀다. 실제로 어떻게 생겼을지 상상해 보려 했다. 어른이 되면 이렇게 우리도 아름다워질까? 그리고 길고 신비로운 이름들. 에피테우스, 메데이아, 오르페우스 등.




*

그리스는 생각보다 지배받았던 역사가 긴데, 기원전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았고, 1453년까진 로마,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 후 오스만튀르크의 지배를 받았고 18세기 후반 이후 그리스 독립 항쟁을 하며 1830년 독립 국가가 됐다. 



 나는 그리스가 지배받지 않았을 것을 가정하고 싶다. 그랬을 때의 세계 모습이 어떨지 너무 궁금하다. 마케도니아가 동서양을 통합하지 않았다면, 그리스가 도시 문명을 바탕으로 계속 유지하며 성장해 왔다면. 그러면 그리스 신들을 믿는 종교가 아직까지 발전했을지 모른다. 신전이 폐허가 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면, 각 신들을 모시는 세력들이 균형 있게 발달했을 텐데. 예를 들어 지금의 힌두교, 불교급처럼 포세이돈교, 아테네교, 헤라교 이렇게 따로 발전했다면 세계의 종교 지도가 달라졌을 것 같다. 마치 자신의 탄생석, 탄생화처럼 품고 있는 신들이 하나씩 있을 것이다. 



아니면 또 다른 가정. 한국의 토속 신앙이 사라지지 않고 전승되어 종교로 자리 잡았다면? 나는 바리공주 같은 여성신을 모시게 됐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훨씬 종교가 다양해지지 않았을까? 여러 종교를 같이 믿는 형태도 많고, 환승 연애 아닌 환승 종교가 보편화되고. 역시 다신교에 대한 상상이 더 다채롭다. 



내가 좋아하는 여신 아테네는 현대적인 여성상이다. 일단 투구를 쓴 외모부터 매혹적이다. 신기하게도 다른 여신들이 미모와 엄마로서의 (헤라, 가이아, 아프로디테 등) 모습이 부각되는 반면, 아테네는 그런 여성성이 부각되지 않는다. 그녀는 철저히 능력과 지성으로 숭배된다. 승리, 지혜, 전쟁, 기술, 의술 등 다양한 주제를 총망라한 백과사전 같은 신이다. 모성과는 상관없이 개인으로 존재하며, 그 자체로 완전한 신이다. 그녀는 그런 점에서 성별을 뛰어넘어 가장 사랑받는 신 중 하나다. 그리스인들은 파르테논 신전까지 지어서 그녀를 숭배했다.  



어떻게 그런 여신 캐릭터가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인데, 그리스에 대해 배울수록 매우 남성 중심주의 사회라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스는 민주주의의 상징과도 같지만, 투표권은 남성에게만 주어진 권리였다. 그 시대 남성들은 남성들끼리 사랑을 하는 경우도 많았고, 여자는 항상 2등 시민이었다. 심지어 연극 공연에서도 남자 배우만 출연하고 여장으로 여자 캐릭터를 연기했다. 여자는 철저히 지워져 있었다. 



현대에도 그런 문화가 좀 남아있다. 타베르나 Taverna 는 프랑스 노천카페 느낌의 대중식당인데, 이를 중심으로 사교 모임들이 이뤄진다. 남성들만 출입하는 사교 모임도 있고, 그리스 전통 술 (소주 같은) 우조를 파는 술집 우제리아에도 남성들이 주로 모인다. 그래서 아테네 같은 여신은 특별하다. 남신과 대등하게 세상을 다스리는 여성의 존재가 그 시대 여성들에게 희망과 같았을 것이다. 



이 시대의 아테네는 누구일지 궁금해졌다. 대를 이어 내려온 아테네의 영혼이 어느 그리스 여성들의 몸에 깃들어 있을까. 그런 지혜로운 분위기를 가진 여성과 마주치면 좋겠다고 상상했다. 그녀라면 남성들의 모임 타베르나에서, 또는 우제리아에서 유유히 혼자 술을 마시거나 여성들의 커뮤니티를 이끌어낼 것 같았다. 여신을 따르는 님프들, 요정들과 여러 여신이 함께 각자의 지혜를 나누고 있는 장면. 만약 마주친다면 나는 그녀를 알아볼 수 있을까. 나도 혹시 그녀처럼 될 수 있을까, 이상한 생각을 하며 아테네의 거리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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