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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망 Oct 23. 2024

같이 하늘을 보던 사이

대체로 우중충하다가 잠깐 갠다면

*

스위스 여행 일정을 하루 늘렸다. 그래 4박은 너무 짧고 5박은 해야지, 이런 자연 속에선 파묻혀 한 달을 지내도 모자랄 것 같았다. 며칠간 비가 온 끝에 하루 늘린 마지막 날 다행히 천국 같은 날씨가 찾아왔다. 버킷리스트였던 패러글라이딩을 할 수 있게 됐다. 라우터브루넨 숙소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림이었다. 위 산에 계단식 밭이 있는 모습이 여유롭고 신비로웠다. 이곳은 숙소마다 벤치와 선베드가 구비되어 있었다. 누워서 신선놀음하는 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패러글라이딩은 쫄보에게도 적당한 액티비티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한계를 부수는 쾌감을 주면서, 번지점프보다는 훨씬 덜 무섭다는 점에서 적절했다. 한 패러글라이딩 업소에서 당일로 예약했다. 하이디가 살 것 같은 산속 마을 뮈렌에서 오후 4시쯤 만나기로 하고 170프랑을 냈다. 



뮈렌에서 산 정상에 올라가니 파일럿들이 많았는데, 우리보고 그들 중 선택하란다. 이게 무슨 연애 예능에서 간택하는 포맷인지 민망했다. 와중에 한국말 잘한다고 어필하는 아저씨도 있었다. 

“한국 여자랑 결혼하고 시퍼요...” 


음, 너무 플러팅같네요. 다른 점잖은 아저씨 Dan을 선택했다. 백발의 40대 인상 좋은 뉴질랜드 출신의. 10분을 걸어 언덕에 올라 장비를 맬 때까지도 실감이 안 났다. 언덕 위엔 나 말고도 몇 명의 한국인과 관광객들이 있었고, 각기 짝꿍 가이드와 1:1 매칭이 되어 패러글라이딩을 시작했다. 댄은 20kg나 되는 장비를 메고도 가뿐히 걸었다. 내가 이제 무섭다고, 안전하냐며 귀찮게 해도 다정하게 대해줬다. “우린 좋은 파트너가 될 거야.” 말해주며 긴장을 풀어주려 했다. 



원, 투, 쓰리! 긴장할 새도 없이, 한걸음에 언덕 내리막길을 내달으니 가속도가 붙었다. 순풍이 불어 도움닫기를 하다가 어느새! 3걸음 정도만 뗐는데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우린 하늘에 붕 떠서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래도 되나 싶다가 내 몸체가 비행기처럼 느껴지고, 패러슈트가 촥- 펼쳐졌다. 난 이제 날다람쥐처럼 날개를 얻었다! 세상이 밭 밑에서 달랑거렸다. 줄 달린 의자에만 의지해 하늘을 나는 기분이라니. 뮈렌의 절벽과 폭포를 위에서 보니, 이전까지 보던 풍경과 완전히 달랐다. 협곡, 계곡들이 선명하게 보여 산의 핏줄들 같았다. 향긋한 산바람이 세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유치한 감탄사밖에 내지 못했다. “대박!”


댄이 “대박 킹왕짱”이라고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말하는 모습이 정겨웠다. 누가 가르쳐준 건지, 킹왕짱이 이미 철 지난 단어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10년간은 더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대로 놔두었다. 지구 어딘가에 ‘킹왕짱’이라고 말하는 외국인이 있는 것도 재미있으니까. 


  풍경에 정신을 팔면서도, 나는 내 뒤에 있는 가이드의 비행하는 삶이 궁금해졌다. 매일 이 절경을 보는 삶. 나는 15분이지만, 그는 매일 몇 시간씩 날겠지? 실례될까 봐 망설이다가 못 참고 물어봤다. 몇 번쯤 하늘을 날아봤냐고. 


“6800번쯤?” 

와- 기네스북감인데요. 매일 일로 하면 지겹지 않아요?", 

"전혀. 매순간이 좋은걸요." 


풍경이 매일 매순간 좋게만 보인다니 부러웠다. 뉴질랜드에 살다가 스위스가 아름다워 정착했다는 댄. 아름다운 곳만 골라서 사는 그는 내 손을 줄에 쥐여주며 직접 조종도 하게 했다. 오른쪽 줄을 위로 땡기면 오른쪽으로 간다. 직관적이고 쉬운데 은근히 세심한 손조종이 필요하다. 댄은 더 나아가 서비스 코스를 제안했다. 


“Do you want 빙글빙글?” 

“Yes yes 네네!” 


옆으로 쭉 도는가 싶더니 360도로 몇 번 회전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게 짜릿했다. 나는 상쾌한 공기 중에 감탄도 하고 질문도 했고, 대답은 뒤에서 날아왔다. 우리 목소리는 바람에 흩어졌다. 술도 안 마셨는데 하늘의 윗 공기에 취하니 텐션이 올라갔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하늘의 신과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신탁을 받는 기분?) 수호신은 내 등 뒤를 딱 받쳐주고 든든히 지지해 주는 친구다. 내가 날아가면 베테랑답게 바로 구해줄 것이다. 우리의 비행이 마무리되면서 이 풍경을 최대한 담아가기 위해 눈을 크게 떴다. 


산 아래 땅에 착륙하는 건 스무스하게 이뤄졌다. 이인삼각 경기를 하듯 다리의 싱크를 맞추어 발을 단단히 디뎌냈다. 장비를 풀고 댄과는 기념사진도 찍고 아쉬워하며 작별했다. 15분의  생사를 같이한 우정은 짧고도 굵었다. 함께해서 좋았어요, 좋은 여행이 되길 이런 덕담을 하며 헤어졌다. 이후로 계속 발이 공중에 뜬 듯 얼떨떨했다. 

 


*

숙소 방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밤을 보내기 아쉬워 뜬 눈으로 천장을 보던 차였다. 4인실 방엔 우연히 한국인 언니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스몰 토크를 하다가 언니가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얘기하자고 제안했다. 옆방의 다른 한국인 남자도 합류했다. 



 밖의 공기는 차갑지도 덥지도 않았다. 비가 그친 하늘이 맑고 깨끗했다. 내가 아까 날던 곳이었다. 하늘에 별이 한두 개 보이더니 이내 쏟아질 듯했다. 한국에서 보던 별과 다른 점은, 여긴 손에 잡힐 듯 큰 다이아몬드처럼 반-짝- (대문자) 거린다는 것이다. 파리에서 봤던 에펠탑 조명 점등식이 하늘로 올라간 것 같았다. 옛날 사람들도 여기서 같은 별을 바라봤을 텐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별이 천체, 행성이란 걸 알았을까? 그냥 하늘의 신비로운 무늬처럼 보이는데.  


별 아래 모인 20대 한국인 셋은 생판 처음 본 사이였다. 매점에서 사 온 컵라면을 사서 나눠 먹었고 매콤한 연기가 별 무리처럼 올라갔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가며 얘기하는 목소리가 영롱하게 울려 퍼졌다. 이날 밤의 대화는 희귀하게도, 물 흐르듯 이어졌다. 친한 친구 사이나 애인이라도 깊이 통하는 대화를 하기 어려운데, 이땐 유독 그런 느낌이 있었다. 스위스의 공기와 풍경이 도와줘서 그럴까? 남자 대학생부터 여행 얘기를 들려줬다.  


“저는 자전거 타고 4개월째 여행 중이에요. 안 들르는 나라가 없죠.” 

자전거 얘기가 좀 이어진 후, 나도 말을 꺼냈다. 


“전 첫 유럽 여행이고 10일 정도 됐어요. 인턴 끝내고 공백 기간에 왔고… 돌아가면 취업준비해야 되는데 벌써 가기 싫네요.”

“저도 취준생이에요. 유럽은 두 번째고… 근데 스위스가 특히 좋지 않나요?”

“그러니까요. 한적하고 천국 같아요.” 


모두의 여행에는 스토리가 있었다. 왜 한국을 떠나게 되었는지, 지금 와서 어떤지. 우리의 공통점은 20대였고 미래가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고 리프레쉬하러 떠나온 여행이었다. 새벽까지 대화가 이어지다가,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언니와 남자의 목소리를 듣다가. 


다음날 우린 쿨하게 헤어졌다. 그래서 밤의 기억이 덧씌워지지 않고 온전히 남았다. 딱 하루만 지속된 우정이지만, 패러글라이딩을 함께한 댄과 라면을 나눠 먹은 청춘들의 목소리는 여운이 길게 남았다. 그들의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눈으론 하늘을 보고 목소리만으로 함께한 사이들이었다. 하늘을 함께 보고 느끼면 교감을 더 깊게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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