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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귤 Sep 15. 2022

가방 정리

도봉산 다락능선에서

37도 뙤약볕이 피부를 찌르던 한 여름날.


고약하게도 바람 한 점이 귀했던 8월 산행은 참 고됐다. 하산 후 마시는 소주가 참 달다. 다디단 술에 쬰득한 내장수육을 먹고 집에 도착하니 벌써 밤 10시가 넘었다. 14시간 만의 귀가에 강아지 오구는 헬리콥터 꼬리로 나를 반긴다. 꼬리 뒤로 멀리 시야를 두니 엄마가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첫째 딸을 바라본다.


몸은 피로하고 정신은 몽롱해서 더 이상 남은 기운이 없다. 내 상태는 메타몽이다. 이대로 슬라임될 것 같다. 하지만 고갈된 체력을 꾹 짜내서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가장 먼저 땀으로 푹 절은 몸을 설거지한다. 뜨거운 물로 거품 잔뜩 묻힌 뒷목을 지지니 축축한 등산 가방을 메고 다닌 피로가 한결 가신다. 머리에 수건을 둘둘 말고 나와 등산복을 세탁기에 돌린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신발과 가방을 정리한다. 흙 묻은 등산화는 바삭한 새 걸레에 물을 묻혀 깨끗이 닦는다. 가방 안에 담긴 도시락 통을 꺼낸다. 개수대로 가져와 수세미로 덜그럭 닦는다. 고무장갑까지 낄 기운은 없다. 모든 설거지를 마치고 남은 주방세제로 구겨진 손수건을 비벼 빤다. 도시락 가방에 담아둔 다 쓴 물티슈, 페트병, 과자 봉지, 반숙란 껍질를 모두 꺼내 분류한다.


"따라라~띠리리"


경쾌한 세탁 종료음이 들린다. 묵은 땀이 지워진 상쾌한 옷을 탁탁 털어 건조대에 말린다.

시계를 보니 밤 12시가 다 되어간다. 오늘 하루도 끝.


가방 정리도 나름 기준이 있다. 반드시 산에 다녀온 당일에 정리하는 것.

오늘 가져간 음식은 오늘이 지나면 먹지 않고 버리는 것이다.


주말이 어떻게 지나는지 모를 정도로 등산에 미친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엔 푸릇한 새벽에 나가 어둑한 밤에 돌아왔다. 피로에 잔뜩 젖은 채로 돌아와 가방을 그대로 신발장 앞에 두고 옷을 훌렁훌렁 허물 벗어 몸만 씻고 기절했다. 다음날 눈이 뜨면 좀비처럼 세수를 하고 가방을 주섬주섬 메고 다시 산에 갔다. 같이 가는 사람도 비슷해서 어제 본 사람이 머리만 뽀송하게 다시 등장하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한참 산을 오르다가 당 떨어지는 기분에 A와 간식을 나눠먹었다.

그때 A가 말했다.

"이거 어제 가져갔던 하이츄 아니야?"

맞았다. 그 하이츄는 어제 가져갔던 하이츄다.

그리고 나는 어제 계곡 트레킹을 갔다.

그리고 말랑한 소프트캔디는 나와 함께 계곡물에 시원하게 수영을 했다.

그것은 헹굼 캔디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A의 물음을 듣고 모든 과정이 떠올랐다. 그런데 진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못 먹는 음식을 준 것 같아 너무 미안하고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나머지 너무 단호하고 강력하게

"아니"

라고 0.5초만에 대답했다. 거짓말 한 것이다. 심지어 말도 안 되는 긴 해명까지 했던 것 같다.

어쩌면 오늘 내 글을 읽을지도 모르는 A에게 이제야 고백한다.

"맞아, 그건 계곡에 담갔던 헹굼 하이츄야"

 

그 이후 오늘 가져간 간식은 오늘 다 먹는다. 남으면 아까워하지 않고 버린다. 이런 생각을 가지면 음식도 너무 과하게 욕심내지 않는다. 등산하기 전날 편의점에서 군것질 쇼핑으로 본의 아닌 탕진을 일삼았는데 그 습관도 없어졌다. 이것은 무엇을 취하고, 버릴지를 결정하는 것이며 필요한 만큼 선택하는 일이다.


산에서 돌아오면 아무리 힘들어도 나를 감쌌던 것들, 에너지를 줬던 것들, 그리고 그것을 담은 가방, 마지막으로 혹사된 몸을 정리해야 한다. 그것은 성스러운 규칙이다. 반드시 지켜야 한다.

가방 안에 쓸모없는 쓰레기가 남지 않도록 하는 것, 미리 보조배터리를 충전해두는 것, 케케 묻은 흙먼지가 방 안에 남지 않도록 하는 것. 이것을 잘 지켜야 다음 산행에 나도, 함께하는 이도 쾌적하게 다녀올 수 있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퇴근하고 돌아와 아무리 피곤해도 먼지 묻은 몸으로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뒤적이지 않는 것. 냉장고에 보관된 음식이 썩지 않도록 자주 들여다보는 것. 밥을 먹고 설거지를 바로 하는 것. 한 계절의 빨래를 미루지 않고 세탁소에 맡기는 것. 손발톱을 제때 다듬는 것. 바탕화면을 자주 정리하는 것. 스마트폰 앨범을 정리하는 것. 안 읽는 책장을 수시로 정리하는 것. 페트병을 재활용할 때 껍데기를 찢는 것. 다음날 입을 옷을 미리 다려놓는 것.


작고 사소한 것은 나중으로 미루기 쉽다. 그러나 생각날 때 시간을 들여 품 들이지 않으면,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 나타난다. 작은 먼지가 먼지 덩어리가 되기 전에 수시로 털어 주변을 잘 정리하는 것이 좋다.


좋은 일을 하면 그것이 다시 잘 시작될 수 있도록 깨끗이 마무리하는 것, 삶이 혼돈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은 생각보다 번거로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초점과 균형,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좋아할 수 있는 힘을 유지한다. 그래서 오늘도, 오늘은 이제 좀 그만하라는 무릎 연골을 달래가며 가방을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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