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귤 Sep 23. 2022

나를 내려놓는 방법

인제 아침가리 계곡 트레킹

푹푹 찌는 뜨거운 여름에도 등산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계곡 트레킹이다.


막 등산에 재미를 붙였을 무렵 인생 범위에 존재하지 않던 두 단어의 조합을 듣고 감탄한 기억이 난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한 여름에 등산이 가능하단 말인가? 시원한 계곡물에 뜨거운 발을 담그며 물놀이와 운동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여름 문화!


수영을 못해서 서핑, 해수욕장, 각종 물놀이에 관심이 없지만 계곡 트레킹은 왜인지 여름을 손꼽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됐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좋아하는 것을 사계절 다른 맛으로 즐길 수 있다니. 굳이 비유하자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팥을 추울때는 붕어빵과 찐빵으로 더울때는 팥빙수로 먹는 것이라고나 할까.


계곡은 깊게 파인 지형에 고인 물이기에 산에는 대부분 계곡이 있다. 산이 4440개나 된다는 대한민국에 산다는 것은 4440개의 계곡 트레킹을 즐길 수 있는 행운인 것이다. 그래서 전국 각지에는 계곡 트레킹으로 소문난 산이 많다.


일 년에 4월과 5월 그리고 9월과 10월의 정해진 요일에 단 40명만 입장할 수 있다는 신비로운 지리산 칠선 계곡 트래킹, 푸른 이끼로 가득해 팅커벨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닐지 궁금한 강원도 정선의 가리왕산, 긴 계곡길의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캠핑으로도 트레킹으로도 유명한 가평의 유명산, 북한산, 관악산, 수락산, 도봉산 서울에서도 하산길에 시원한 도심 속 계곡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매미의 열기가 치열한 8월의 여름, 인제에 위치한 아침가리로 계곡 트레킹을 떠난다. ‘아침가리’ 나는 하루 중 아침을 가장 좋아한다. 가보기도 전에 싱그러운 어감을 듣는 순간부터 아침가리는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아침가리 계곡길이 있는 방태산은 '아침에 잠시 밭을 갈 정도의 해만 비치고 금세 져버버리는 첩첩산중'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6.25 전쟁 때도 워낙 오지라 군인이 오지 않아 전쟁 난 줄도 몰랐다 한다.참 인상적이고 신비로운 지역명이다.


고대하던 산행에 새벽 4시부터 부지런을 떤다. 라이스페이퍼를 한 장 한 장 뜨거운 물에 담가 그것이 찢어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꺼내 그 속에 빨간색 노란색 파프리카, 오리고기, 닭가슴살, 적채와 비트, 새우와 게살을 채운 오색찬란 월남쌈. 장어를 잘 구워 갓 지은 쌀밥 위에 올리고 해초와 당근, 오이, 부추, 지단, 야채를 넣은 장어해초덮밥. 모든 것은 밀키트가 해주었지만 정성은 50년 전통 조리사의 손맛이다.


같이 가는 나의 동료 J는 달걀말이를 20겹이나 말았다고 자랑한다. 거기에 푸실리를 불지 않을 만큼 적당히 삶아 야채와 상큼한 소스를 얹은 샐러드 파스타를 만들었다. 그것은 모두 내가 좋아하는 음식인데. 또 다른 동료 T는 냉모밀을 준비했다고 한다. 냉모밀은 대접이라며 냉면 대접까지 챙겨 왔다. 역시 배웠다. 운전 대장 S는 자신은 준비한 게 없다고 하더니 상큼 달콤한 과일을 예쁘게도 잔뜩 깎아왔다. 비장한 얼음 막걸리까지 꺼낸다. 우리는 모두 이 등산에 진심이다.


아침가리 계곡길은 도착해서도 한 시간 정도 걸어야 한다. 탐험대 복장을 하고 온 J는 목에 물안경을 흔들거리며 걷는다. T는 길쭉한 다리로 배낭을 엉덩이에 풀석거리며 저 멀리 앞장서고 있다. 앞장서는 녀석을 잡기 위해 강아지풀을 주워 그것으로 강아지풀 놀이를 한다. 두 팔을 팔랑이며 찾아간 계곡의 입구. 신비롭게 꼭꼭 숨어있다가 펼쳐진 비경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진다.


'와'


옥같은 물결. 어릴 적 장판 사이사이 동그란 옥이 박혀있던 옥장판이 기억난다. 그 옥들을 모아 물에 풀어놓은 것처럼 금실 너울대는 여름 물결. 여흘 거리는 물결에 몸을 담가보니 물이 제법 깊어 내 허리까지 온다. 벌써 가방이 다 젖었다. 이제 우리의 탐험이 시작된다. 내가 걸으면 그 아래에 물고기가 따라 걷는다. 물이 어찌나 맑은지 투명한 물아래에 알알이 귀여운 조약돌과 올챙이, 송사리가 다 보인다. 그것들이 발가락을 간지럽힌다. 손으로 잡을라 치면 도망간다.



우리들은 신이 났다. 물길을 걷다가 심심하면 수영을 한다. 물안경을 챙겨 온 J는 역시 인간 물개다. 물살을 유영하는 것이 커다란 수달 같다. 수영을 못하는 나는 에어베스트 튜브를 어깨에 메고 둥둥 떠다녔다. 수영장에서 키판을 떼기 전까지는 선생님의 자랑이었으므로 힘찬 발장구를 하기도 한다. 그러다 지치면 누워서 둥둥 떠다닌다. 초록이 차오르는 잎사귀 사이로 빛의 줄기가 보인다. 나는 물에 스며들고 빛은 초록에 스며든다. 치열한 여름 햇빛이 오지의 나뭇잎을 통과하여 뜨겁지 않은 찬란한 빛을 만든다.



둔치에 앉아 점심을 먹는다. 우리의 만찬을 하나하나 꺼내는데 하늘이 갑자기 새무룩해지더니 실비가 내린다. 비가 내려도 좋다. 원래 나는 비를 싫어한다. 오늘부터 비를 좋아하기로 했다. 자연이 만드는 촉촉한 비 가 오지의 비경을 더욱 선명히 보여주고 자갈과 강물과 정성의 냄새를 더욱 진하게 만든다.



솔솔 거리를 비를 배경음으로 삼아 정성이 가득한 음식을 나눈다. 물놀이하고 먹는 밥이 역시 꿀맛이다. 뭘 먹어도 맛있겠지만 특히 더 맛이 좋다. 음식이 음식 이상의 역할을 하는 감사한 순간이다. 밥을 먹다가 눈치챈다. 언젠가부터 화려한 검정 나비가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산신령의 나비로 불리는 산제비 나비는 오늘 우리의 산 동지이다.


밥을 먹고 힘이 난 녀석들은 언제 어디서 꺾인지 모르는 나무를 스틱 삼아 가지고 다닌다. 바위와 바위 틈 사이에 물살이 센 곳을 찾아 물 썰매를 탄다. 물이 제법 깊은 곳에서는 깊은 다이빙을 한다. 지대가 평평한 곳에서 물수제비를 띄운다. 태어나 처음으로 물수제비를 떠본다. 금실 금실 물비늘은 오색찬란하다. 윤슬만 빛나는 잔잔한 수면 위로 작은 돌멩이가 물무늬를 만들며 빛의 둘레를 넓힌다.


오지 탐험은 새로운 경험이다. 인간의 보살핌과 관심 없이 물과 흙과 물고기와 도롱뇽과 나비와 풀. 오직 서로를 도우며 자생한 생명의 생태계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시선도 강요도 나 자신의 원칙도 배경도 자격도 의식하지 않는다. 웃고 싶으면 마음껏 웃었고 눕고 싶으면 시간을 재지 않고 누웠다.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고 몸이 젖어 추우면 돌판에 누워 몸을 말렸다. 나 자신을 자신 그대로 느꼈으며 서로의 기분과 느낌, 즐거운 마음을 물수제비로 강물에 띄웠다. 그리고 그 물결을 나누었다.


도시에서 나는 무의식 중에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닌다. 그래서 항상 어깨가 뭉쳐있다. 열심히 하면 다 된다고 생각하던 시간도 있었다. 조금 더 편안하게 살아도 되는 것을 항상 완벽하고 잘 해내려고 애쓰다 보니 일이 잘 되지 못했을 때에는 실패에 대한 좌절감도 컸지만 더 열심히 하지 못했다는 스스로의 실망감이 더 컸다. 상황을 유연하게 바라볼 수 있음에도 마음이 꼭 나빠야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마음 씀씀이를 각박하게 굴었다. 해야만 하는 것, 지켜야 하는 것, 규칙과 강박. 내가 완벽하지 않음을 알면서 다른 사람에게 완벽함을 요구하기도 했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였다. 편안하게 글을 쓴다는 것이 창피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 후부터 내 글에 만족하지 못했다. 가벼운 글을 날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생각으로 고뇌, 무거운, 교훈, 중요한 내용을 옮기려는 마음이 들자 타자에서 손가락이 나가지가 않았다. 머리에서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란 인간은 본래가 뭔가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인간 이어서일 지도 모른다.


삶을 사는 것도 그렇고 글을 쓰는 것도 그렇고 내가 보는 것을 가장 나답고 편하게 보고 느끼며 쓰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하다. 여름의 오지 탐험. 아무렇게나 강물에 눕는 것. 강아지풀 놀이와 물 수제비를 띄우는 것. 하루정도 나그네로 살아보는 것. 나 자신을 내려놓는 일은 그런 연습이다.



이전 16화 하루의 죽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