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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귤 Sep 28. 2022

평발의 등산

등산화 이야기

"회원님, 평발이시네요?"

28년 만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내 발바닥이 평평하다는 것을.


조금만 걸어도 쉽게 피곤해진 원인은 평평한 발바닥에 있었다. 아치형 발로 살아본 적은 없지만 왜 중고등학교 때 유행하던 반스, 컨버스만 신으면 발이 퉁퉁 붓고 칼로 찢는 느낌이 들었는지. 대학교 신입생 시절 하이힐을 신으면 다음날 걸을 수가 없었는지. 친구들이 어떻게 그 신발을 신고 다닐 수 있었는지. 헬스 PT 수업에서 풀리지 않던 고통의 실마리가 해결됐다. 남들 발바닥 모양을 일일이 보면서 다닐 수는 없기에 도대체 내 발이 얼마나 평면인지 궁금해서 발 모양 테스트하는 곳을 찾아가 두 발을 대보았다. 아치와 평평함의 상태를 보여주는 모니터 화면에서 내 발은 평평함의 극단으로 치우쳐있었다.


내 발은 평발 중에 평평 평발이구나.


벌써 4년이 넘게 달리고 있지만 달리기 페이스, 1km를 달리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늘지 않았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 10분에 8’에서 이제 6’로 줄어든 것을 보면 두 다리가 꽤나 열심히 굴려고 노력했구나 싶다가도 공원에서 다른 사람들이 슁슁~날아다니는 것을 보면 자괴감 느꼈다. 평발인지 몰랐을 때는 눈에 보이는 숫자가 내 한계라고 비관했다.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고 내가 가진 신체적 조건을 이해하지 않았던 것이다.


중학교 때부터 '알부자'라고 불리며 알 충전해달라고 놀림당하는 내 종아리가 부끄러웠다. 유튜브에서 유명한 종아리 얇아지는데 효과적이라는 '강하나 스트레칭'은 안 보고도 척척 동작을 할 정도로 외웠다. 걷기가 문제인가 싶어서 학다리 걷기를 따라 하며 어기적어기적 걸어보기도 하고 부종을 없애준다는 성분이 불분명한 건강보조식품을 먹으며 얇은 종아리를 만들기에 몰입했다. 그러면서 신발은 딱딱하고 평평한 것, 각선미가 살아난다는 힐을 신었다. 사실은 평발이어서 걸음걸이가 불안정하고, 신발이 불편해 종아리 근육을 많이 써서 근육이 발달된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때는 신체의 형태만 보았지 내 몸이 어떻게 생기고 어떤 방식으로 기능하며 어떻게 보완해줘야 하는지 몰랐다.


도시에 살면서 신발은 그냥 예쁜 것, 다리를 예쁘게 만들어주기 위한 것, 쉽게 사고 쉽게 질려서 버리는 물건이었다. 신발에 애착을 가지는 사람도 아니었다. 내 몸을 이해하기 전에는 남들이 하는 것, 겉에서 예뻐 보이기에 급한 것을 찾았다. 유행이 지나면 쉽게 버렸고 나에게 맞지 않는 불편함이 선이라 생각하고 좇았다. 평발을 알고 나서 온 몸을 받치고 서있는 두 발은 몸의 중심이며 발이 건강해야 내가 좋아하는 걷기와 달리기 그리고 등산을 오래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부터 내 몸을 이해하고 이를 보완해 줄 수 있는 신발을 공부했다. 신발은 장비가 되었다.


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듯 발 모양도 다 다르다. 수많은 등산화, 좋다는 등산화 중에서도 내가 가장 편하게 신을 수 있는 신발 모양은 따로 있었다. 등산화를 신어보고 뜯어보고 공부했다. 그렇게 여러 매장에서 신발을 고르고 골라 엄선한 내 신발. 그 신발을 1년 넘게 매 주말마다 신었다. 어릴 적 메이플스토리에서 좋은 장비를 차면 자신감이 붙을 뿐만 아니라 슬라임을 더 많이 잡을 수 있었는데 좋은 신발, 좋은 장비는 정말 좋았다. 오래 걸어도 물집이 잡히지 않았다. 발톱이 까매지지 않았다. 다음날 일어나도 종아리가 부드러웠다.


한 신발만 주야장천 신으니 밑창이 떨어졌다. 살면서 처음으로 신발 밑창이 떨어질 때까지 신발을 신은 것이다. 그리고 떨어진 밑창을 소중하게 본드를 붙여서 다시 튼튼할 수 있게 고쳐 신었다. 떨어지면 또 붙이고 다시 붙였다. 멀리 다녀오면 흙과 먼지가 묻은 그 신발을 다시 깨끗이 닦고 냄새가 나지 않도록 볕과 그늘에 잘 말렸다. 그 덕에 나는 험한 바위도 가파른 내리막길도 안전하게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더 잘할 수 있기 위해 오랜 시간 안전하고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신발. 취미는 장비빨이라는 말을 완벽하게 적용시킬 수 있는 존재. 나의 신발은 딱딱한 돌과 질퍽한 흙과 가파른 오르막과 아찔한 내리막에서 장시간 인내심을 가지고 두 발에 헌신했다.


등산화를 통해 물건을 구매할 때 보이기에 아름다운 것보다 내 단점을 보완하고 생활에 편리함을 줄 수 있는 물건에 소비를 집중하게 됐다. 이제 내 종아리를 얇게 보일 수 있는 압박붕대나 종아리를 얇게 해 준다는 이름 모를 건강보조식품을 먹는 것이 아니라 나의 평평한 발바닥을 보완해 줌으로써 내가 달리고 산을 오르는데 도움이 되는 신발과 양말, 뭉친 발바닥 근육을 풀어 줄 수 있는 폼롤러와 마사지 건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한계를 이겨내고 꾸준히 좋아하는 것을 하는 발바닥과 다리와 종아리를 사랑하게 되었고 신발장의 수십 켤레의 신발 중에서도 밑창이 떨어진 등산화를 가장 사랑하게 되었다.


떨어진 나의 신발 밑창은 패배로 점철된 나의 유년시절 체육시간을 극복한다.신체구조상 사랑할  없을 법했던 결함을 감싸 안아준 고마운 존재. 가장 깊숙하고 사적인 곳에서 나를 감싸주는 동지.  덕에 나는 오늘도 무사히 걷고 오른다.


제 인생 등산화는 호카오네오네 카하입니다. 1년 여를 신고 보내주었으며, 같은 라인의 다른 색을 다시 구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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