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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귤 Oct 17. 2022

산은 어디에나 있지만,

지리산 칠선계곡과 설악산 흘림골

세월과 세상이, 사람이 변해도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묵직하게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산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자유는 산을 위협하지 않는 새와 다람쥐에게는 있지만, 인간에게는 없다. 어떤 산은 허용된 날 정해진 인원만 들어갈 수 있는 일종의 허락이 주어지는데, 그 한정된 특별함이 산행을 더욱 즐겁고 설레게 만든다.


지리산 칠선 계곡


지리산 칠선계곡은  5~6월, 9~10월 일 년에 넉 달, 일주일에 네 번, 하루에 40명만 입장할 수 있는 공간이다. 예약도 꽤나 치열하다. 정해진 기간이 매우 짧고 하루에 입장할 수 있는 인원이 정말 적기 때문에 지리산 산 자락 중에서도 사람 발자국이 가장 덜 닿았다. 칠선계곡의 입구부터 느껴지는 사람 입김이 섞이지 않은 특이한 풀 냄새. 그것은 내 폐를 곧장 거치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풀과 나무가 살아간 흔적을 내 안에 거칠게 남긴다.


칠선 계곡 탐방로는 허락된 날이 아니면 자물쇠로 출입구가 굳게 잠겨져 있다. 발자국이 희미해 산길이 불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 민간 가이드가 산행을 안내해주시고, 예약자들은 정예 멤버가 되어 함께 산을 올라야 한다. 내가 간 날도 그랬다. 인터넷 클릭 하나만으로 전국 각지에서 모인 얼굴들은 다양했다. 산에서 자주 마주치던 혼자 온 중년의 사람들, 빨간색 커플 옷을 맞춰 입은 커플, 트레일 러닝 복을 입은 고령의 남성, 그는 간식이 잔뜩 든 가방도 없다. 두 얼굴이 너무 닮아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중년과 고령의 남성 두 사람, 봄 산에 핀 철쭉 색 옷을 입은 사람. 산을 오가면서 기억하지 않았던 얼굴들이 그날은 특별해 보인다.


살아온 인생도,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도, 이후 살아갈 세월도 다르지만 그날 그 시간에 산을 좋아한다는 마음 하나로 모인 사람들은 운명공동체가 되어 발자국을 맞춘다. 내가 무슨 사람이고, 어떤 것을 가졌는지 이야기하지 않아도 턱끝까지 숨이 차오를 때, 묵묵히 숨의 박자를 맞춰주고 힘들어 보이는 이에게 에너지가 될 양식을 나누며 사람과 사람으로서 만난다.


소리 없는 응원으로 가득한 여정. 지리산 정상 지점 천왕봉에 도달했을 때 40명에서 28명이 된 정상 멤버는 그곳을 마지막으로 서로의 건투를 빌었다. 그러나 그 안녕은, 여정은 끝이 아니었다. 칠선 계곡 탐방 시작 길에는 작은 배지를 준다. 우리는 가방에서 짤랑거리는 배지를 멀리서 바라보며 서로 잘 하산하고 있는지 확인하였으며, 하산길에 다다랐을 무렵에는 다시 뭉쳐 귀갓길 택시를 함께했다. 그 이후로 나는 도봉산에서, 북한산에서, 전국에 있는 산에서 등에 붙은 칠선계곡 배지를 볼 때마다 그날의 동지가 아니어도, 언젠가의 동지로서 우리들을 기억하고 응원한다.



10월 초 지리산 칠선계곡은 곳곳에 섣부른 단풍들이 벌써 빨개져있다. 어떤 단풍잎은 너무 작아서 아직은, 아직은, 아직은 안된다고 다른 단풍잎들이 말렸겠거늘 기어코 빨개져버렸다. 힘들어서 빨개진 귀처럼 빨간, 작은 단풍잎을 보니 다 커보지도 못하고 져버릴 안타까움과 동시에 단풍이 단풍일 수 있는 이유를 가장 먼저 선보이려 서두른 서툰 귀여움에 웃음이 나온다.




설악산 흘림골


설악산, 말해 뭐해. 내가 가장 좋아하고 아름답다는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언어의 한계에 무기력함을 느끼는 공간. 설악산의 흘림골 탐방로가 7년 만에 개방되었다. 그동안 "대청봉", "공룡능선". 나에게 설악산은 "힘든 만큼 값지다" 였지만 흘림골은 힘들지 않아도 그 비경을 기가 막힌 장관을 담을 수 있는 산행이다. 80년대에는 각종 쓰레기와 자연훼손으로 상처받아 20년을 휴식하고, 그 이후 15년에 커다란 바위가 떨어진 사고로 정비하는 시간을 가졌으니 흘림골은 그곳이 가진 아름다움 보다 더 큰 아픔을 간직한 공간이다.


하루 5000명에게만 허락된 행운의 흘림골 탐방은 언제나 그랬듯 설악이 간직한 기막힘을 느낄 수 있었고 가던 길을 몇 번이고 다시 뒤돌아보게 만들었다. 짧아서 아쉬운 가을의 아름다움을 가장 강렬하고 왕성하게 터트리고 있는 가을 설악산. 그리고 그간 자랑하지 못한 빨강과 주황과 노랑의 멋을 마음껏 뿜어내는 흘림골 나무들. 그 속에서 바라본 펼쳐진 총천연색 파노라마. 설악산을 구성하는 대청봉, 한계령과 서북능선. 흙과 돌과 꽃과 나무와 그 위에 걸쳐진 구름. 쫄쫄거리며 지나가는 다람쥐를 보니 너는 그동안 이 멋진 풍경을 혼자만 보았구나, 부러운 마음이 든다. 그 질투에 바위에 누워 장관을 눈 위에 두고 입에는 달콤한 호두과자를 넣으며 인간 다람쥐가 되어본다.


어느 날은 자신감이 붙으면 더 빨리, 더 높게 올라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하지만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에 헐떡이며 목 끝의 피맛을 보게 될 것은 결국 나였다. 더 빨리 앞서가려다가, 더 예쁜 사진을 찍으려다가 위험한 행동을 한다면 더 이상 산에 갈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눈에 지나치는 쓰레기를, 다른 사람의 위험한 행동을 내 갈길 가자고 모른 체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흘림골을 산을 바다를, 자연을 오래 아니 영원히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산을 이길 수 없고, 자연을 이기려고 하면 내가 다친다. 그리고 언제나 그곳에 있다고 아무거나 해서는 안된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면 내가, 아니면 그곳이 사라진다. 영원히 잃을지도 모른다. 가장 소중할수록 가장 소중하게 다뤄야 한다. 계절마다 변하는 노을, 맑게 졸졸거리는 냇물, 아스팔트에 피어난 작은 민들레, 맞을 수 있는 이슬비, 주말 아침 푹 자서 퉁퉁부은 강아지의 얼굴, 함께 밥을 먹으며 음식 이상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사람, 내가 가진 것에 그리고 언제나 그곳에 있지만 감사한 줄 몰랐던 그것에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신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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