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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귤 Sep 21. 2022

하루의 죽음

일몰등산

카카오톡을 지웠다. 이번 주말은 메신저 없이 살아야겠다. 어느 책에서였나 트위터에서였나, '사람이 내뿜는 독소가 있다'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180% 정도 맞는 말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의식. 연대감! 그로 인해 세상을 바라보는 더욱 넓어진 시각! 교과서에서 나온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무리 얇게 베어내도 어떤 것이든 양면성'이 있기 마련이다. 어쩔 수 없이 관계는 피로감과 노폐물이 남는다. 비단 말뿐만 아니라 표정과 몸짓의 비언어적인 요소로부터도 자극을 받는다. 어쩔 때는 눈코입을 합친 것보다도 작은 직사각형 화면에서 나오는 텍스트, 손톱 반달보다도 작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성이 더 치명적이기도 하다.


독소 민감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작은 오염에도 그 사람의 취약성, 당시의 면역에 따라 큰 상처를 받는다. 보이지 않는 아픔은 더 잘 관리해야한다. 그래서 독에 중독된 사람은 그것을 배출하고 정화하는 자정작용이 필요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사람은 타인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독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독에 중독되기도 한다. 사람을 피해 혼자만의 시간을 취하려다 자아가 내뿜는 독소에 그런 줄도 모르고 당할 수 있다. 그건 표고버섯처럼 생긴 독버섯 같다. 경험상 그런 줄 모르고 그렇게 되는 것은 더 위험하다.


이제는 유사과학이 된 MBTI를 이야기할 때면 내가 내향 인간이라는 사실에 많은 사람이 놀란다. 주말이면 산에 있고, 평일에도 걷고 뛰며, 외부 교류활동에 적극적인 내가 당연히 외향 인간인 줄 알았다고 말한다.


내향과 소극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혼자'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고, '약속시간 5분 전까지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은 마음'의 표면에 경청 그리고 리액션, 살아오면서 터득한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일종의 ‘명랑가면’을 장착하기 때문에 나는 나의 내향을 완전히 숨길 수 있었다. 사실 숨길 생각도 없었지만.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아무도 만나지 않아도 괜찮다. 약속이 생기면 그 순간부터 완벽한 만남의 계획과 실패의 상상을 하느라 에너지를 소비한다. 그러다 약속이 취소되면 그것이 주는 평온함에 안도한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친목이 사람이 싫은 건 아니다. 만나면 좋다.


이런 지킬 앤 하이드를 뺨치는 이중적이고 역설적인 인간은 활발 발랄한 모습을 보이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 실시간 스토리로 일상을 홍보하는 열성 인스타그래머이다가도 뿅. 비활성화가 습관이다. 이제 '진짜' 나를 아는 사람들은 가급적 한 달의 ‘만남여유기간’을 준다. 번개란 없다. 내가 홀연히 SNS에서 사라져도,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아도 스스로 에너지를 채우는 기간이라 이해해준다. 참 고맙다.


재택근무도 나에게 위험하다. 에고가 내뿜는 독이 꽤 강력하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막 유행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적극적으로 재택근무를 유지하는 회사에 다닌다. 출퇴근 왕복 2시간 거리, 아침에 준비 시간을 아끼면 남는 시간과 에너지를 나를 위해 쓸 수 있다.


그런데 재택근무만 하면 말 그대로 하루가 망한다. 아침에는 알찬 재택 생활을 하자! 고 다이어리에 다짐한다. 의지는 아침 이슬과 함께 사라진다. 점심을 먹으면 갑자기 불안해진다 허리가 웅크려진다. 그리곤 곧 무기력을 동반한 우울감이 파도를 타고 몰려온다. 고립의 심해로 빠진다. 그때부터 집은 감옥이다. 차라리 출근하는 게 더 알차게 산다. 이럴 때마다 억울하다. 자기 주도적으로 살지 못한다는 죄책감이 느껴진다.


가을이 온다 해놓고 한낮 기온이 30도가 넘는 날이었다. “요즘 너무 사람을 많이 만났어. 집에서 좀 쉬어도 괜찮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어리석고 착각이 가득한 재택근무였다. 재충전이라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아니 매번 그랬던 것처럼 우울해졌다. “나는 인간 실격이야.” 좌절감에 허우적거리다가 그 감정을 이길 수 없어 코를 박고 뻥튀기를 먹었다. 눈물을 참아서인지 뻥튀기를 물 없이 먹어서인지 목이 막혀오는데 창밖으로 하루가 뉘엿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예민하고 민감한 인간은 재충전과 휴식의 미묘한 기준과 섬세한 행동요령이 필요하다. 고갈된 의지를 쥐어짜 내 동네 뒷산으로 지는 해를 보러 갔다. 일몰은 일출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일출 산행이 하루를 맞이하는 경이로움, 벅참이 가득한 등산이라면 일몰 산행은 하루가 끝나기 전 아쉬운 오늘을 달래기 위한, 오늘도 인간이 24시간 죽어갔음을 추모하는 등산이다. 게으른 하루를 보내도 산에서 떠나가는 해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래도 오늘 잘 살았다는 성취의 위안을 느낄 수 있다.


탄수화물을 잔뜩 먹었더니 머리에 피가 몰려 잠이 쏟아진다. 퇴근시간에 걸쳐 길이 막힌 덕분에 머리가 띵할 정도로 버스에서 졸다 일어나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몇 주만 해도 이 시간은 대낮이었는데, 벌써 햇빛이 머리 아래로 기우는 것이 느껴진다. 평지 아래 모든 것들에 황금색 필름이 씌워져 보인다. 슈퍼마켓 차양도 트럭에서 맛좋은 쥐포를 굽는 아저씨의 집게도 퇴근 후 피로한 표정으로 버스를 기다리는 직장인의 얼굴도 황금색 빛이 난다.  들판에 핀 강아지풀에도 속털 틈새에 빛이 가득 찬다. 그래서 결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한참을 구경하다가 해가 다 질뻔했다.



파아란 가을 하늘 그 아래 금색이 덧입어진 언덕이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아직 여름이 끝나지 않았는 줄 알았는데 조급해진 햇살의 기운을 느끼고 코끝에서 시원한 기운을 마시니 가을이 오긴 온 모양이다.


산에 오른다. 노이즈 캔슬링 속에서 끊이지 않는 생각과 귓구멍의 노래가 섞여 만든 신기한 잡음이 어느덧 사라진다. 어떤 행위만 남는다. 시끄럽고 번잡하며 엄청 강한 척 하다가 어떤 것에는 매우 취약한 자아가 느껴지지 않는다. 자아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산을 오르는 나의 근육과 흐르는 땀방울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오르는 행위에만 집중할 수 있고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아 진다.


해가 벌써 눈높이로 내려왔다. 황금 필터가 이제 공기 중으로 까지 번졌다. 붉은색 필터도 추가됐다. 산 아래로 보이는 도시. 한 지역 구역에 모여있는 콘크리트 덩어리들. 인간이 숫자로 이름 붙이는 많은 네모들. 멀리서 바라보는 그곳이 온화한 기운 아래 선명히도 보인다.


구름도 선명하다. 구름을 보니 완전한 가을이 분명하다. 도마 위에 밀가루를 흩뿌려 손으로 부비부비 비벼 펴낸 것 같은 권운, 자글자글한 조개의 표면 같은 권적운. 가을 탄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이 구름들을 타고 싶다. 구름뿐만 아니다. 모든 것이 선명해 보인다. 다양한 사람의 개성있는 숨소리도 선명하다.  연필로 꾹꾹 눌러서 그린 것 같다. 너무 뚜렷해서 빛이 아닌데도 눈이 부신다. 나무와 흙은 사람이 내는 소음과 이산화탄소를 가만히 흡수한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는다.


떠나가는 황혼이 아쉬운지 해는 거진 다 떨어졌는데 하늘이 점점 더 붉어진다. 하늘은 왜 몹시 어두워지기 전에 매우 빨개지는 걸까. 왜 모든 색을 다 보여주고 이내 검게 변해버리는 걸까. 잘 익은 홍시빛으로 물든 하늘. 이것은 떠나기 싫어 미련이 많이 남은 여름의 뜨거운 인사다. 히사이시 조의 summer. 개별 음과 박자가 각자의 개성을 뽐내지 않고, 서로 밀고 당기며 만드는 웅장한 화음을 들으며 여름을 기억한다. 여름과 함께 하산한다.


‘푸르르’ 풀벌레 소리가 노래에 입혀진 건가 싶었는데 풀 속에 숨어있는 귀뚜라미가 노래와 어우러져 신비롭고 아련한 항연을 만든다. 가을의 전령사 귀뚜라미는 말한다. "여름은 갔어. 가을이야." 여름의 끝과 가을의 시작 여을의 노을. 나는 계절과 계절이 걸치는 한 순간에 서있다.  


순식간에 어둑해진 주위. 오른쪽으로 둥글게 배를 불린 달의 시간. 젖은 독소는 지는 해에 다 말랐다. 어깨 위에는 다 마른 회복의 소금기만 반짝거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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