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네치아 ②
어느 날 갑자기 - 그러니까 책을 읽다가 혹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번쩍하고 기억에 떠오른 식당이 있다. 처음에는 우연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반복적으로 제법 자주 일어났다. 이탈리아 베네토 주의 레스토랑 안티카 오스테리아 체라(Antica Osteria Cera) 이야기다.
미슐랭 투 스타 레스토랑인 이곳은 이탈리아 최고의 해산물 전문 식당이다. 찾아가는 방법은, 단순하면서도 어렵다. 순례나 모험에 준하는 각오, 때에 따라서는 군사작전급의 계획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건 이탈리아 특유의 사정에 기인한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이탈리아의 최고급 레스토랑들은 교외의 산간벽지에 점점이 흩어져있다. 도심에서는 찾기 힘든, 그러니까 수풀이 우거지고 전망이 너무도 아름다운 고품격 리조트 같은 곳에 위치해 있으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그렇지 않은 곳이 더 많다. 인구 600명도 안 되는 산촌 한가운데에 식당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곳은 시골 간선도로 한 길가에 덩그러니 서 있는 경우도 있다. 베네토 주의 쓰리 스타 레스토랑인 레 칼란드레(Le Calandre)가 대표적이다. 300유로짜리 코스 식사를 3시간 넘게 서빙하는 이탈리아 최고의 분자요리 레스토랑으로, 전 세계에서 손님들이 몰려온다. 그러나 도심에서 떨어져 있으니 뉴욕이나 도쿄, 서울에서 미식여행이라도 온 사람들은 바로 옆에 붙은 3성급 호텔을 찾아보거나 그마저도 없으면 5만 원 내외의 스튜디오 숙소에서 하룻밤을 때워야 한다. 그나마 여긴 사정이 나은 편이다. 안티카 오스테리아 체라는 주변에 숙박시설이 아예 없다. 그러니 일단 이곳을 찾아가려면 '베이스캠프'부터 설치해야만 한다.
구글로 검색하면, 루게토(Lughetto)에 위치해 있다고 나온다(도대체 루게토가 어디야?). 베네치아 주변이지만 대중교통이 없어 관광객들이 전혀 찾아오지 않는 곳이다. 일단 식당을 지도 한가운데에 놓고 가상의 동심원을 그려가며 열심히 호텔을 찾았다. 몇 군데가 걸린다. 그중에서도 비교적 큰 길가에 있고, 주차장도 넓다고 주장하는 곳에 예약을 잡았다. 무뚝뚝하지만 손이 빠른 아저씨가 주인이었고, 자갈밭 주차장은 과연 꽤 넓고 쾌적했다. 방에는 침대 하나만 놓여 있고 휑하니 아무것도 없는데, 오히려 묘한 통쾌함이 느껴졌다.
식당은 밀라노와 베네치아를 잇는 A4 고속도로의 끝자락 연장선상에 있다. 차를 몰고 가니 나 빼고는 전부 다 화물트럭들만 보인다. 위치로 보자면 베네치아에서 키오자(Chioggia)로 넘어가는 길목의 한 중간이다. 감이 왔다. 여기는 원래 분주한 산업도로의 삼거리 교차로에 있던 화물기사 식당이었을 것이다.
안티카 오스테리아 체라의 역사는 1966년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선대인 리노 체라가 키오자와 안코나에서 신선한 생선을 들여와 팔았고, 아내인 실바나는 팔다 남은 생선을 솜씨 좋게 가공해 치케티(Cicchetti, 베네치아식 핑거푸드) 형태로 선보였다. 어찌나 맛이 좋았는지 인근에 소문이 쫙 퍼진 모양이다. 원래 베네치아의 생선요리는 감칠맛으로 세계 제일 아니던가.
그리고 아들과 딸들이 대를 이었다. 장남 리오넬로 체라(Lionello Cera)를 중심으로, 동생인 다니엘레(Daniele)와 로레나(Lorena)가 모두 요리에 재능이 있었다. 이들은 예술적인 감각도 대단히 뛰어나서, 부모 세대의 정겨운 길거리 선술집을 순식간에 모던한 미니멀리즘의 최고급 파인 다이닝으로 변모시켰다. '정갈한 우아함'은 지금도 이 레스토랑의 상징으로, 식당에 들어가면 순백의 테이블 리넨 위에는 물잔과 접시 하나 등 최소한의 식기만 놓여 있고, 은은한 조명 아래 주황색 의자가 깊고도 감미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곳의 시그니쳐는 - 놀랍게도 - 전채요리 안티파스토인 차가운 스파게티(Spaghettino Freddo)다. 30g 남짓의 스파게티노를 삶아 차갑게 식힌 후, 그 위에 깍둑썰기 한 루세르나 생선, 생새우 등을 다져 올리고 시칠리아 브론테산 피스타치오로 만들어낸 진득한 소스를 얹어낸다. 소스는 이미 말돈 소금, 봉골레 육수, 생강 오일 등으로 시즈닝 되어 엄청난 풍미를 자랑하고, 마지막에는 포베 델 그라파에서 공수한 '안개처럼 흐릿하고 신비로운 풍미'의 최고급 올리브 오일이 화룡점정을 찍는다. 첫 접시로 등장하지만 요동치는 거대한 감칠맛이 온 입안을 진동하기에 살짝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이어지는 요리들은 그야말로 해산물의 완벽한 향연(饗宴)이다. 아드리아 해에서 올라온 가장 신선하고 진귀한 수십 종의 생선과 새우, 갑각류, 조개들이 찌고, 굽고, 삶은 형태로, 그리고 때로는 그릴에서 불맛을 한껏 입은 채 연신 뜨거운 김을 쏟아내며 서빙된다. 파스타로 빚어내도 맛있고, 살짝 올리브유만 쳐서 생으로 먹어도 기막힌 맛이다. 이탈리아 요리의 다채로움과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이곳처럼 우리의 미각을 전방위로 뒤흔드는 레스토랑을 대체 어디서 또 찾을 수 있을까.
3시간짜리 저녁 만찬을 마치고는 5km 남짓 떨어진 외로운 '베이스캠프'로 다시 돌아왔다. 촌스런 꽃무늬 장식의 침대에 세로로 누워 생각이란 걸 좀 해보았다. 도대체 오늘 난 무엇을 만난 것일까. 그건 마치 완전히 새로운 장르나 스타일의 오페라를 한편 본 듯한 묘하고도 황홀한 기분이었다.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형태의 식당이다. 인구가 밀집한 길목 좋은 곳에 대자본을 들여 근사한 레스토랑을 세우고 여기서 손님을 받는다. 이건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한 세상의 이치다. 뉴저지 늪지대나 파주 장단콩마을에 미슐랭급 파인 다이닝이 있기를 꿈꾼다면 그건 지나친 중세적 환상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가능하다.
선대가 운영하던 '생선구이 기사식당'을 지금은 아들과 딸이 이어받아 세계적인 레스토랑으로 변모시켰다. 사람들은 보석처럼 빛나는 관광도시 베네치아의 매혹을 뒤로하고, 아무것도 볼 것 없는 이 작은 마을로 굳이 긴 시간 운전을 해 찾아온다.
이 식당에 대한 나의 불만(?)은 단 한 가지다. 지금껏 딱 한 번밖에 못 찾아갔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무려 150유로에 달하는 비장의 2인 메뉴 '날생선 치케티'(i cicchetti crudi)에도 도전해 볼 계획이다. 석호 리조토(Risotto della laguna), 레드와인에 졸인 붉은 쏨뱅이(Scorfano dorato) 등도 도대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다.
안티카 오스테리아 체라(Antica Osteria Cera), 내 마음의 영원한 쓰리스타 레스토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