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 시절의 저녁

- 토리노 Torino ②

by 황지원

"오늘 우리는 역사를 만들었으니, 이제 먹으러 가자!"

(Oggi abbiamo fatto la storia e adesso andiamo a mangiare.)


1859년 4월 26일, 샤르데냐 왕국의 총리대신 '카보우르 백작' 카밀로 벤소는 이탈리아 통일전쟁의 일환으로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낭독한 후 이렇게 외쳤다. 미식가로 유명했던 그는 왕궁 근처에 수많은 단골집 리스트를 갖고 있었는데, 가령 그가 즐겨 찾았던 카페 피오리오(Caffè Fiorio)는 지금도 토리노 최고의 커피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저녁은 주로 델 캄비오(Ristorante Del Cambio)에서 해결했는데, 4월 26일 그날의 향연(饗宴)도 아마 델 캄비오에서 열렸을 것이다. 지금도 미슐랭 원 스타를 보유한, 이 도시 최고의 우아한 레스토랑이다.


(Ritstorante Del Cambio, Torino)


10년 넘게 델 캄비오를 책임졌던 셰프의 이름은 마테오 바로네토(Matteo Baronetto)다. 그는 롬바르디아 밀라노 출신으로, 저 유명한 카를로 크라코 밑에서 수련한 요리사였다. 바로네토는 델 캄비오 특유의 강렬하고 완고한 피에몬테 미식 전통 위에 국제적이고 세련된 감각을 더해 이 식당의 분위기를 일신한 것으로 유명하다. 마치 묵직하고 진중한 바그너나 말러, 브루크너의 독일 후기 낭만주의 음악만을 연주하던 오케스트라에 신세대 프랑스 지휘자가 나타나 샤르팡티에부터 메시앙까지, 심지어 동양의 현대음악을 레퍼토리에 추가한 것과 비슷하달까.


(바로네토 셰프와 함께, 델 캄비오)


그가 이끌던 델 캄비오는 전통적 우아함이 특유의 신선한 국제감각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비텔로 톤나토(참치 마요네즈 소스로 시즈닝을 한 차가운 송아지 고기), 아뇰로띠(피에몬테 전통 라비올리) 등 지역의 유서 깊은 전통 요리가 있고, 알도 콘테르노, 보르고뇨, 브루노 지아코사, 마스카렐리, 가야 등 피에몬테 최고의 바롤로, 바르바레스코 와인 라인업도 사정없이 미각과 후각을 뒤흔든다. 거기에 일식풍을 가미한 '피에몬테 라멘'이라던가 프랑스식 콩소메 수프에 캐비어를 넣은 라비올리 등 현란한 국제적 퓨전이 새로운 감흥을 흩뿌리며, 침목향의 수제 고가구 사이에 놓인 현대미술품 같은 매혹적인 불균형의 이미지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래도 코스의 마지막은 다시 전통으로 돌아와, 피에몬테 각지에서 엄선한 최고급 치즈를 즐기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바로네토는 올해 봄에 레스토랑과 작별했고, 오랫동안 수셰프로 봉직했던 디에고 질리오가 새로운 수장이 되었다. 그가 이끄는 주방을 체험하러 다시 한번 델 캄비오를 찾아가 보고 싶다. 무엇보다도, 지난번에 놓쳤던 보넷(Bonet, 피에몬테식 커스터드푸딩)이 너무도 궁금하다. 향 깊은 에스프레소와 즐기는 델 캄비오의 보넷이라. 그 누가 이 유혹을 참을 수 있겠는가.


(Trattoria Antiche Sere, Torino)


파인 다이닝만이 토리노식 만찬의 정답은 당연히 아니다. 로컬 분위기 물씬 풍기는 식당에서 즐기는 고요하면서도 풍요롭고, 여유 넘치는 식사야말로 진짜 토리노의 낭만일 것이다. 나는 크게 두 군데를 즐겨 찾는 편이다.


먼저 스칸나부에(Scannabue). 점심, 저녁 모두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일단 여기를 모르면 토리노 사람이 아니다. 토리노 중앙역인 포르타 누오바 바로 앞에 있다. 나는 이곳의 활기차고 오픈된 분위기를 고려해 주로 점심에 들르는 편이다. 추천 1순위는 역시나 비텔로 톤나토(Vitello Tonnato). 스칸나부에 특제 비텔로 톤나토에 미네랄이 넘실대는 피에몬테의 티모라쏘 데르토나(Timorasso Derthona) 와인 한잔을 곁들이면 갑자기 없던 용기도 생긴다. 여정의 중간에 심신이 지쳐올 때면, 스칸나부에가 정답인 것 같다.


(스칸나부에의 시그니처 '비텔로 톤나토')


저녁이라면 고민 없이 안티케 세레(Antiche Sere)를 찾아간다. '클라시코'라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토리노에서 가장 전통적인 분위기의 트라토리아이다. 산 파올로 지구(Borgo San Paolo)의 미로 같은 골목길 안쪽에 숨어 있다. 동네 단골만이 드나들법한 영험한 분위기에 미리 주눅 들 필요는 없다. 여주인장 안토넬라 로타가 몹시도 따뜻한 환대를 보내주기 때문이다. 주방을 책임지는 건 그녀의 오빠 다니엘레와 아내 클라우디아인데, 그들은 활기차면서도 침착한 태도로 토리노와 피에몬테의 클래식들을 전부 망라한 최고 수준의 요리들을 선보인다.



비텔로 톤나토, 아뇰로띠, 타야린 등의 프리모(첫 번째 탄수화물 코스)에서부터 화덕에 구운 돼지 정강이 살이나 토끼 고기 로스트 등 세콘도(두 번째 단백질 메인요리)까지 - 그 모두가 추천 1순위로 손꼽힌다. 디저트로 서빙되는 판나코타 또한 가히 토리노 최고라는 소문이다.


'고풍스러운 저녁'(안티케 세레)이라는 식당의 이름답게 따뜻한 느낌의 지역 요리들과 피에몬테 각지에서 생산된 소소하고도 매력 있는 와인들이 로컬 미식의 진수를 선사한다. 아마도 이곳은 이탈리아 최고의 트라토리아일 것이다. 어쩌면 내게 토리노는 '안티케 세레'와 동의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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