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 너머의 그 여름

- 피에몬테 Piemonte ②

by 황지원

베네치아에서 A4 고속도로로 진입한 후 서쪽으로 계속 차를 몰아가고 있었다. 파도바와 비첸차를 거쳐 베로나를 넘어서고, 가르다 호수를 지난 뒤 크레모나 쪽으로 내려오면 그때부터는 포(Po) 강 유역이다. 이제부터는 강줄기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연신 덜컹거리는 렌터카를 간신히 달래며 천천히 서북쪽으로 방향을 잡다 보면 야트막한 구릉들이 줄지어 늘어선 작은 마을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아스티, 알바, 라 모라, 몬포르테 달바와 코스틸리오네. 이탈리아 반도의 서북쪽 끝 - 안개와 포도밭, 구릉과 개암나무들, 산딸기와 소나무 숲, 파르티잔과 대문호들의 땅 피에몬테(Piemonte)에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이탈리아 3대 와인 산지'(토스카나 키안티, 베네토 발폴리첼라와 함께)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피에몬테의 랑게(Langhe) 지역은 네비올로 포도로 빚어내는 깊은 풍미의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의 본고장이다.

아스티에서 남서로 방향을 돌려 바롤로 마을 쪽으로 내려갔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와인을 만드는 곳이라지만 분위기는 고요하고 소박하다. 비탈진 경사를 끼고돌며 형성된 마을에는 이날도 안개가 자욱했다. '네비아’(Nebbia, 안개)하면 롬바르디아 주의 밀라노가 가장 악명 높지만, 그곳의 안개가 일종의 산업적 재해에 가깝다면 랑게와 몬페라토 언덕을 휘감아 도는 피에몬테의 안개에는 일종의 신화적인 힘이 베여있는 듯하다. 새벽이슬처럼 맑고 옅으나, 벨벳의 커튼처럼 부드러운 이 안개는 고요하고 장엄한 침묵처럼 온 포도밭을 휘감아 돌며 네비올로 포도의 생육에 깊은 위로와도 같은 안식을 제공하고 있었다.



바롤로(Barolo)는 ‘이탈리아 와인의 왕’으로 불린다. 오묘한 루비빛과 묵직하고 강건한 바디감, 황홀하게 솟아오르는 풍요로운 아로마가 피에몬테 사보이 왕가의 장엄한 기품마저 느끼게 해 준다. 농밀한 장미향과 강렬한 타닌, 텁텁하면서도 묵직한 표정의 복잡한 풍미가 벽돌로 쌓아 올린 건물처럼 단단한 구조감을 지닌 채 입안을 엄습한다. 장기숙성을 거쳐 생산되는 무거운 와인이라 쉽사리 열리지 않고, 한참이나 뻣뻣한 느낌을 준다. 따라서 시간을 충분히 들여 섬세한 디캔딩 작업을 거쳐야만 마실만해진다. 네비올로 품종 100%를 사용해 만들고, 최소 3년의 숙성기간을 거치며 그중에서도 오크통에서 2년 반 정도의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세상에 나쁜 바롤로는 없다'지만 바롤로도 만드는 방법에 따라 크게 정통파와 신세대파로 나뉜다. 가장 하드코어 한 전통주의자는 바르톨로 마스카렐로(Bartolo Mascarello)다. 그는 대형 오크통에서 천천히 숙성해 묵직하고 복잡한 풍미를 자아내는 전통적인 방식을 끝까지 고수했다. 프랑스산 소형 오크통, 즉 바리크에 숙성해 달콤한 나무향을 입히는 방식을 극도로 혐오하여 한때 에티켓에 'No Barrique, No Berlusconi'(바리크도, 베를루스코니도 안된다)를 써서 출시하기도 했다.


(보르고뇨 와이너리의 대형 오크통, 2019년 촬영)


보르고뇨(Borgogno)도 대표적인 정통파 가운데 하나다. 1761년에 문을 연 포도원이며, 1861년 이탈리아 통일 기념 오찬에서 피에몬테를 대표하는 와인으로 테이블에 오르면서 큰 명성을 얻는다. 와이너리를 방문해 그들이 자랑하는 찬란한 장기숙성 와인 컬렉션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커다란 콘크리트 탱크에서 천천히 자연발효를 시킨 후, 장기간 침용을 거쳐 대형 슬라보니아 오크통에서 십수 년을 숙성시키는 전통방식을 고수한다. 와이너리를 둘러보고 나면 도저히 한 병 안 살 수가 없다. 신화적인 포도밭인 칸누비(Cannubi)에서 탄생한 것이 눈에 밟혔으나, 현지에서도 가격이 어마무시하다. 대신 2003년 빈티지의 고숙성 리제르바 한 병을 데려왔다. 쉽사리 열 수 없어서 한남동 '월간식당'의 안경섭 셰프님 저장고에 2년 넘게 맡겨놓았다가 2021년에야 마실 수 있었다. 아직도 '내 인생의 와인'으로 기억된다.



다음 날은 산토 스테파노 벨보(Santo Stefano Belbo)로 차를 몰았다. 작가 체사레 파베세(Cesare Pavese)의 생가를 찾아가는 길이다.

파베세는 전후 이탈리아 최고의 작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깡마른 체형과 퀭한 시선, 신경증을 달고 살 것만 같은 짙은 염세의 분위기. 그러면서도 묘하게 뒤로 깔린 투명한 순수의 그림자들. 어느 누구에게나 강렬한 첫인상을 던져다 주는 작가다. 처음엔 두 편의 시집으로 그를 읽기 시작했다 - '피곤한 노동'과 '냉담의 시'. 침울한 염세의 정조와 달콤한 밤(dolce notte)이 주는 몽환적 환상이 뒤섞인 그의 시는 토리노의 밤거리를 헤매다 들어간 텅 빈 대리석 카페의 짙고 우아한 에스프레소 커피를 연상케 한다. 항상 죽음과 밤, 실연과 이별, 고통과 단절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잘 직조된 실크 스카프처럼 유려한 품위를 잃지 않는 것도 그만의 매력이다. 끊임없이 존재의 주변을 부유(浮游)하는 듯한 태도, 세상과 엇갈리듯 부딪히고 물러서면 다가오는 특유의 묘한 이물감은 오히려 독자에게 강한 삶에의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다 파베세의 소설도 읽게 되었다. 평생을 대도시 토리노 한복판에서만 살았을 것 같은 작가지만 소설과 산문의 대부분은 언덕과 논밭, 송아지 농장과 밤나무 가득한 피에몬테의 시골마을이 배경이다. 10대의 유년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던 작가의 직접 체험이 바탕이 되었다고들 하는데, 과연 언어는 정밀하고 묘사는 섬세하다. 그러나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풍경들이다. 이 미묘한 거리감, 알 수 없는 비현실감이 그의 문학에 영험한 신비를 부여한다.


“나는 하얗게 마른 흙과 짓눌리고 미끄러운 오솔길의 풀, 햇살 아래 벌써 단물이 밴 포도 냄새를 풍기는 수확철 포도밭과 언덕의 거친 냄새를 가려낼 수 있었다. 하늘에는 바람의 기다란 선들, 밤의 어둠 속 별들 너머로 보이곤 하는 희끄무레한 얼룩 같은 것이 흩어져 있었다. 내일이면 나는 코르시카 거리에 있겠지 하고 생각한 순간, 바다에도 조류의 선들이 흩어져 있다는 것을, 어린 시절에 구름과 은하수를 바라보던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내가 여행을 시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작 <달과 불> 중에서)



생가 주변은 그의 작품만큼이나 쓸쓸함이 감돌았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기념사진을 한 장 찍고, 그의 두상 앞에서 잠시 '합장'을 하고는 길을 떠났다. 점심을 먹어야 했다. 바르바레스코로 차를 몰았다. 여기엔 내가 피에몬테에서 가장 사랑하는 식당이 있다. 안티카 토레(Antica Torre).


(Trattoria Antica Torre, Barbaresco)


작디작은 와인 마을 바르바레스코의 제일 꼭대기에 위치한 자그마한 시골 식당이다. 무너진 옛 성탑 옆에 있어 이름도 '옛 탑'(Antica Torre) 식당이 되었다. 주차장에 차를 놓고 걸어서 올라가면 자연스레 이곳의 신화적인 와이너리 가야(Gaja)를 스쳐 지나가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안젤로 가야의 단골식당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바르바레스코로 와인 순례를 오는 이들도 많아서, 이 작은 읍내에도 시크한 모던 식당이 두 곳이나 생겼지만 나는 못내 안티카 토레가 좋다.


이 집을 대표하는 요리는 피에몬테 전통의 타야린(Tajarin)이다. 달걀과 밀가루만을 이용해 만드는 수제 생면 파스타로, 셰프 마우리치오 알바렐로가 할머니로부터 이어받은 전통의 레시피를 철저히 고수하고 있다며 자부심을 숨기지 않는 메뉴다.


마을 제분소에서 가져온 질 좋은 밀 1kg당 오직 신선한 계란 20-22개를 이용해 면을 빚는다. 기계 반죽으로는 맛이 변한다며 매일 철저히 수작업으로만 면을 뽑고, 손으로 정확히 50cm씩 잘라내 특수제작한 건조대에 살짝 말려 사용한다. 직접 먹어보면 '환상적'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타야린 특유의 섬세한 식감과 단단한 물성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계란면의 풍성하면서도 과하지 않은 풍미가 입안을 담백하게 가득 채워 절로 행복감을 느끼게 한다. 조용하면서도 격조 있는 식당의 분위기와 거기에 곁들인 이 마을의 바르바레스코 와인 한 잔이면 실로 천국이 따로 없다.


식사를 마치고는 마을을 따라 펼쳐진 몬페라토 계곡의 깊은 줄기를 따라 포도밭 위로 계속 걸어 올라갔다. 바람은 시원하고, 잘 익은 포도들이 지천으로 널브러진 느슨한 구릉들은 이곳 사람들의 푸근한 태도만큼이나 가슴 찡한 느낌을 주었다. 문득, 파베세 소설 속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곧 벨보 강의 포플러나무들 사이에서, 또 언덕 위의 평원에서 이른 시간부터 엽총 소리가 울리고 치리노가 이랑 사이로 달아나는 산토끼를 보았다고 이야기하는 계절이 왔다. 포도를 수확하고, 잎사귀를 따주고, 포도를 압착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이제는 덥지도 춥지도 않고, 또렷한 구름 몇 점이 하늘 위에 떠다니고, 사람들이 폴렌타와 산토끼 고기를 먹으면서 버섯을 따러 다니는 계절이 되었다. 한 해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였다(Sono i giorni piu belli dell'an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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