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에게 바치는 커피 한 잔

- 토리노 Torino ①

by 황지원

'기품'이라는 단어로 정의할 수 있는 도시였다. 그것도 착 가라앉은 품위 있는 벨벳과도 같은.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시대극 영화와 비슷하다고 해도 좋겠다. 촘촘히 짜인 크림색종이 위에 천천히 한 글자씩 잉크펜으로 써 내려간 것 같은 도시. 나는 지금 이탈리아 서북부 피에몬테주의 토리노(Torino)에 와 있다.


조식을 먹기 위해 지층으로 내려갔다. 프랑스풍과 이탈리아 스타일이 묘하게 뒤섞인 호텔 식당은 진하고 부드러운 커피 향으로 가득했다. 테이블 한편 나무 도마 위에는 어떤 검붉은 덩어리들이 흐드러지게 놓여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초콜릿이다. 토리노가 자랑하는 수제 초콜릿 공방 귀도 고비노(Guido Gobino)의 다크 초콜릿과 잔두야 초콜릿들. '세계 초콜릿의 수도' 토리노다운 조식이었다!

(호텔 조식으로 제공된 귀도 고비노의 초콜릿)


사보이 왕가의 궁전을 방문하고 니체가 살았던 건물도 둘러봤다. 중간중간 카페인 충전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곳은 이탈리아 내에서도 커피 문화가 특별히 발달한 곳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이탈리아 No.1 커피'를 자부하는 라바짜가 바로 이곳 토리노에서 태어났다. 사보이 왕가에 식료품을 조달하는, 우리 조선시대로 치자면 '어전상인'이었던 루이지 라바짜는 왕실 귀공자들의 까다로운 입맛에 골머리를 앓는다. 왕자들은 커피 한잔도 허투루 넘어가지 않았다. 바디감, 단맛, 산미, 씁쓸한 후미와 산뜻한 꽃향기 등이 완벽하게 밸런스를 이룬 커피를 요구했다. 라바짜는 남미와 아프리카에서 조달한 커피를 이리저리 섞으며 세계 최초로 원두를 블렌딩 하는 시도를 했고, 결국 그들의 노력은 지금의 거대 커피기업 라바짜로 이어졌다. 토리노 산 톰마소 10번지(Via S. Tommaso 10)가 원래 라바짜의 왕실 식료품점이 있던 자리였다. 몇 년 전까지도 라바짜가 운영하는 카페가 자리해 있었으나, 지금은 모던 이탈리안 요리를 내놓은 고급 레스토랑으로 변해있다.


(지금은 사라진, 라바짜 식료품점 자리의 카페 라바짜)


움베르코 에코가 특별히 사랑했던 커피도 토리노에서 맛볼 수 있다. 기호학자이자 미학자, 언어학자이며 철학자, 종교학자, 역사학자, 중세 전문가 혹은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로 불리던 에코는 2016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고 있는 듯한 그런 이미지의 남자였다. 뼈와 살이 실재하는 인간이었지만, 사실은 우리에게 일종의 경이에 가까운 판타지 속 존재처럼 비쳐줬던 세기의 천재였다.


에코는 엄청난 장서가로도 유명하다. 밀라노 자택에 3만 권, 우르비노에 있는 별장에도 2만 권이 넘는 책이 있었다고 한다. 지식욕으로 똘똘 뭉친 그는 기호학과 중세철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권위자였지만 동시에 역사소설 등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저변을 대중적으로도 쉽게 풀어낼 줄 아는 그런 남자였다. 덕분에 우리는 <장미의 이름>, <전날의 섬> 같은 멋진 작품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에코의 책은 몇 번을 반복해서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입문이 정 두려우면 그냥 그의 책을 한 권 사서 침실 머리맡에만 놔두면 된다. 낯설고 복잡한 어휘, 침목향이 감기듯 풍겨오는 특유의 온기 넘치는 의고체 어투, 온갖 사물과 사건에 대한 장황하고도 정확한 설명 등이 페이지마다 가득하다. 덕분에 한 두 장만 넘겨도 스르륵 잠이 쏟아진다. 어쨌거나 ‘에코를 읽다 잠들었다’는 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에코는 중부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 교수였지만, 고향은 북이탈리아 피에몬테 주의 알렉산드리아였으며, 토리노 대학에서 중세철학을 공부했다. 소설이나 저작물을 통해 딱히 고향 피에몬테에 대한 이야기나 지역색을 드러낸 적은 거의 없지만, 몇 년 전 국내에도 출간된 소설 <프라하의 묘지>에서 유독 토리노의 한 전통 음료에 대한 묘사가 두드러졌다. 그건 비체린(Bicerin)이다.


(토리노의 소울 드링크 비체린 Bicerin)


비체린은 토리노 사람들의 ‘소울커피’라 해도 좋을 것이다. ‘토리네제’ 모두가 즐겨 마신다고 할 순 없지만, 이 지역의 격조 높은 수제 초콜릿 문화(잔두이오토)와 토리노 사람들 특유의 풍윤한 인품 등이 그대로 스며들어 있는, 하나의 무형문화재라 불러도 좋을 존재다.

소설 <프라하의 묘지 Il cimitero di Praga>의 주인공은 시모네 시모니니라 불리는 악한이다. 그는 모든 것을 위조하고 변조하는 모략꾼이며, 사람의 목숨을 뺏는 킬러이자, 온갖 정치적 음모에 가담해 세상을 더욱 어둡게 만드는 지극히 사악한 인물이다. 자신의 행동에 어떠한 열정도, 의지도, 믿음도 없고 오직 남아있는 감각이라고는 미각 하나다. 결국 혀에 착착 감기는 쾌락, 즉 식도락에만 탐닉하는 영혼 없는 괴물인데, 파리며 토리노며 프라하며 자신이 가는 곳마다 게걸스럽게 미식이라는 걸 즐긴다. 사실은 ‘탐식’이 더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 그가 예수회 수사로 변장하고는 자신의 고향 토리노에 돌아와 처음으로 간 곳은 바로 콘솔라타 광장(토리노 구시가지에서도 약간은 외진 곳이다)에 있는 카페 알 비체린(Caffe al Bicerin)이다. 이름 그대로 비체린의 원조로 알려진 곳이다. 여기서 시모니니는 문제의 그 음료, 비체린 한 잔을 시켜 느긋하게 마시게 된다.


비체린은 우선 볼록한 유리잔에 에스프레소 커피를 붓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때 그 커피는 아라비카 100프로 혹은 아라비카와 로부스타를 9:1 정도의 비율로 섞은 것을 사용해야 한다. 그 위에는 반드시 토리노 지역에서 생산된 진한 수제 초콜릿을 녹여 만든 액상 형태의 뜨거운 초콜릿이 올려지고, 마지막은 부드럽게 데운 스팀밀크로 장식한다. 이렇게 세 종류의 서로 다른 음료를 층층이 쌓아 만드는데, 마실 때도 스푼으로 휘젓는 게 아니라 3층 구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아주 천천히 마시는 게 정석이다.


처음에는 부드러운 우유 맛이 거품과 함께 조심스레 입 안을 간질인다. 은은한 바닐라 향이 뒤섞인 초콜릿의 묵직한 달콤함과 강렬한 에스프레소 커피의 쓰디쓴 맛이 동시에 입가로 섞여서 밀려오는데, 그건 참 달고도 쓰고, 부드럽고도 묵직하며, 단호하면서도 여유로운 묘한 느낌이다.


(Caffé Al Bicerin)

비체린의 원조 카페인 알 비체린 1763년에 문을 열었다. 지금은 특이하게도 나이 지긋한 할머니들과 중년 여성들이 운영하는 카페다. 연유는 잘 모르겠다. 이탈리아에서 카페란 대개 마초성을 드러내는 사회적 공간이며, 바리스타는 그 힘든 노동 강도 때문에라도 주로 남자들이 맡는다. 그러나 여기는 너무도 푸근한 어머니의 커피, 마치 카페 마드레(Cafe Madre)를 연상시키는 그런 분위기다.


남은 비체린을 목으로 넘긴다. 아, 부드럽고 또한 달콤하다. 덩어리째 목을 타고 흐르는 초콜릿의 먹먹하면서도 씁쓸한 감동이 참으로 토리노답다. 격조와 윤후함이 흐르는 이 고요한 분위기를 에코도 사랑했으리라. 마침 카페가 있는 곳도 '위안의 광장'(Piazza della Consolata) 5번지다. 비체린을 통해 조용한 위안을 얻고, 다시 길을 나선다.

keyword
이전 05화포도원 너머의 그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