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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카이워커 Mar 12. 2023

분갈이를 하기로 했다

어쩌다 시작하세요. 그리고 놓지 마세요.

자취방을 꾸리면서 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플랜테리어였다. 햇살이 쏟아지는 드넓은 창아래 목재 테이블, 그 위에 초록 잎이 무성한 식물들 몇 개. 그런데 막상 이사하니 필요한 가전, 가구들을 사느라 식물은 자꾸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다. '일단 침대부터 사고, 일단 세탁기부터 사고.' 그렇게 플랜테리어 로망은 슬슬 잊혀졌다. 식물을 들이기에는 빛이 충분히 들어오는 집도 아니었고 배치할 만한 공간도 없었기에 딱히 간절하지도 않았다.


실천을 망설인 데에는 제대로 된 식물을 들이겠다는 고집도 있었는데, 적당히 흔하지 않으면서 키우기 쉬운, 그리고 감성을 채워줄 예쁜 식물을 사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슨 식물을 어떻게 고를지, 어디서 살지, 화분은 어떤 것을 해야 할지 모든 단계가 고민이었고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식물은 가구 하나에 맞먹을 정도로 비쌀게 뻔했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다음 집에서 제대로 사자.


식물에 대한 마음을 접었을 때쯤, 폐업에 들어가 전품목 50% 할인이라는 현수막이 걸린 식물가게를 발견했다. '가봐야지', '가봐야지'하고 몇 번 지나치기만 하다가 가게 정리 하루 전에 매장에 들어가 보았다. 거의 모든 식물이 다 팔려 텅텅 빈 매장 가운데 눈에 띄는 푸른 잎의 식물이 하나 있었는데, 동글동글한 초록 잎은 수분은 머금은 듯 통통했으며, 반질반질 윤이 났고, 곧게 뻗은 줄기는 단단해 보였다. 건강해 보였지만 외관은 그렇게 예쁘지는 않았다. 평소에 원하던 잎 모양이 특이하여 고풍스러운 무드를 자아내는 느낌의 식물은 결코 아니었다. 물어보니 '금전수'란다. 금전수는 아무 데서나 키울 수 있는 생명력이 질긴 흔하디 흔한 식물로, 긴 줄기에 동전만 한 크기의 둥근 잎이 줄줄이 달려있는 것이 엽전을 꿰어놓은 것 같다고 하여 '금전수'로 지어졌다. 돈이 들어오는 나무라고 하여 '돈나무'라고도 불리며, 개업식 선물로도 많이 주고받는 나무란다. 돈이 들어온다는 의미가 재밌기도 했고, 무엇보다 빛이 안 들어오는 곳에서도 잘 자란다고 하여 사 보기로 했다. 가격도 만 오천 원 밖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아니면 이 집에서는 절대 식물을 안 살 것 같았다.


여기까지가 어쩌다가 내 방 한켠에 들어온 '왕숙이'에 대한 얘기다. (이름을 왕숙이로 지은 것에는 그 무렵 왕숙 신도시 청약에 대한 관심과, 돈나무가 왕숙 입주의 꿈을 실현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왕숙이에 대한 관심도는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분갈이를 해줘야 하는데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어떻게 하는지 찾아봐야 하고 적당한 화분도 골라야 했다.


대충 집에 있는 스테인리스 접시 위에 플라스틱 화분 그대로 얹어놓고 거실에 방치해 놓길 몇 주, 그래도 화분에는 옮겨줘야지 하는 마음에 이케아에서 아무 화분이나 주문했다. 지름 17cm의 콘크리트가 생각나는 밝은 회색의 플라스틱 화분이었다. 그러나 사고 보니 웬걸, 화분 바닥에 숨구멍이 없는 그냥 관상용 화분이었다. 물이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식물을 죽일 수도 있는 화분이었다. 그렇다고 환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제대로 된 화분을 마련할 때까지 '잠깐만' 두자는 생각으로 왕숙이의 거처를 옮겨주기로 했다. 잠깐만 머무를 곳이니 당연히 삽이나 흙 따위는 살 생각을 하지 않고 숟가락으로 대충 파서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플라스틱 화분 깊이 뿌리내린 왕숙이의 의지는 대단했다. 딱딱한 흙에 숟가락은 1cm 도 들어가지 않았고 힘으로 빼자니 왕숙이를 감싸고 있는 흙과 화분이 물아일체가 된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지금 생각하면 경악스럽지만 나름 기발하다고 여긴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는데, 주방 가위로 플라스틱 화분을 자르는 것이다. 흙과 화분의 경계에 가위 날을 억지로 끼워 넣고 나선형을 그리며 화분을 잘라냈다. 생각보다 잘 잘리지 않아서 나중에는 거의 난도질하다시피 화분을 해체했다. 그렇게 왕숙이를 감싸고 있던 플라스틱 화분을 벗겨낸 순간, 내가 얼마나 잔인한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흙과 뒤엉켜 화분 가장자리에 맞닿아 있던 뿌리들이 중간중간 화분과 함께 잘려나갔다. 서로 연결되어있어야 할 굵직한 뿌리들 마저도 가위질을 당해 끊겨있던 것이다.


이렇게 나는 또 식물을 죽이는 것인가? 학창 시절 할머니에게 받으면 한 달도 채 가지 않아 시들었던 관상용 고추처럼 왕숙이의 운명도 여기까지가 끝인 걸까?


뭐든 대충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나를 자책했지만, 그렇다고 멀쩡히 살아있는 왕숙이를 버리기에는 미안해서 일단 새로 산 화분에 옮겨주었다. 샤워기로 잎까지 촉촉하게 물을 듬뿍 주고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다행히 뿌리가 잘렸다고 해서 왕숙이가 죽지는 않았다. 찾아보니 분갈이 과정에서 뿌리를 일부러 잘라내어 정리하기도 한다고 한다. 게다가 금전수는 뿌리의 가장 깊숙한 곳에 감자만 한 알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잔뿌리는 건드려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진짜 문제는 구멍이 없는 화분이었다. 물을 너무 듬뿍 주기도 했지만, 바닥에 구멍이 없기 때문에 그 많은 물이 빠져나갈 통로가 없었다. 통풍이 잘 되는 방도 아니었기에 왕숙이의 고생길은 그때가 시작이었다. 몇 주가 지나자 흙 표면에는 하얀 곰팡이가 생기기 시작했고, 한 달이 지나도 흙이 축축해서 물을 줄 수도 없었다. 곰팡이와 사투하는 왕숙이를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그렇게 겨울을 났고 생각보다 잘 버티는 왕숙이를 지켜보며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전과는 다른 뭔가를 발견했다. 무성한 잎 사이로 못 보던 줄기가 우뚝 자라나 있었다. 피어나지 않은 잎이 줄기를 겹겹이 감싸 연두색 봉오리가 되어있었다. 저게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을까?


날이 풀리고 봄이 올 무렵 줄기를 감싸고 있는 잎들이 하나둘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따뜻해지면 다른 잎들처럼 활짝 만개할 것 같았다. 생명의 탄생 순간이 이런 것일까? 공기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습한 땅에서 왕숙이는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새 줄기를 키워내고 있었다! 주인도 돌봄을 포기한 그곳에서 혼자 힘으로 묵묵히. 그때 나는 깊은 반성을 했다. 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끝이 아니었다. 일을 그르칠 것 같으면 항상 으레 단정 짓고 중도 포기하는 편이었는데, 포기하는 그 순간에도 희망은 있던 것이다.


새 싹을 틔우는 중인 왕숙이(금전수)


새로 피어나는 줄기를 보고서야 제대로 된 분갈이를 하기로 결심했다. 유튜브에서 분갈이하는 방법을 찾아보니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구멍이 뚫린 화분에 깔망을 덧대고 그 위에 마사토 또는 난석을 깐 뒤, 상토와 배양토를 적당히 섞어서 2~3cm 깔아주고, 식물을 옮겨 심은 뒤 가장자리 빈 공간을 새 흙으로 덮어주면 끝이다. 화분이나 흙도 특별한 거 없이 대충 사면된다.


이 쉬운 것을 몇 개월을 미뤘던 것인가. 귀찮아서, 제대로 된 화분을 해주겠노라고 핑계 대면서 몇 개월을 미뤘던 것인가.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해 놓고 조금만 어긋나면 내팽개치고 도망갔던 지난날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항상 '제대로 된 준비'라는 환상 속에 빠졌던 것 같다. '000이 갖춰있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어, 000을 사려면 적어도 000은 되어야지.'라는 기준을 잡고 그 기준에 조금만 미달해도 시작하지 않았다. 왕숙이도 그렇다. '특별한 식물을 들이고 싶어', '상태 좋은 식물을 사고 싶어' 하면서 미루고 미루다 어쩌다 집에 들이게 된 식물에게 정성과 애정을 쏟지 않았고, 뿌리가 잘려나가고 곰팡이가 피어도 외면했다. 하지만 결국 새 줄기를 피워낸 왕숙이처럼 내가 포기한 많은 순간에도 희망은 있었을 것이다. 조금의 노력만 했더라도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을 하기에 완벽한 상태'는 이 세상에 없다. 우연히 처분하는 가게에서 식물을 들인 것처럼, 어떤 일을 하는 데는 큰 결심이나 비장한 각오 따위는 필요 없다. 가볍게 시작하고, 계속하면 된다. 중간에 일을 그르쳤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거기서부터 다시 하면 된다.


주말에 바닥에 구멍이 난 화분을 주문하고 근처 잡화상점에서 삽을 샀다. 난석과 배양토는 근처 꽃집에서 사야겠다. 숨 쉴 수 있는 예쁜 화분에 왕숙이를 옮겨 담고 바람 잘 통하는 곳에 둬야지. 비단 왕숙이 뿐이겠나. 곰팡이를 뚫고 피어날 수 있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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