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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은 나의 선택만 이 정답일까?

연민은 파괴력이 강한 감정이다.

by 아키세라믹

읽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면 다시 읽기 시작했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인 것처럼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한 권의 책이 후회스럽고 때늦은 시간을 대신할 수 있을까 싶어서 읽었다.

그때 나의 잘못을 용서해 주고 싶어서 읽었고, 나의 오만을 꾸짖고 싶어서 읽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시간을 견딜 수 없어서.


읽는 것은 쓰는 것과 생각하는 것보다 수월했지만, 나는 쓰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배우지 못해일뿐

부풀어 오르는 그 조급증과 미안함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분주하고 소리 없이 소란스러웠다.

나의 행동이 곡진한 마음과 정성을 품고 있기를 바라면서,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읽으면 쓰고 싶었다.

저자의 글 속에 내 삶이 사진처럼 남아 있었고 조금이라도 외곡 시키지 않고 솔직한 마음으로 옮겨 놓으면 될 것 같았다. 보이는 모든 현상이 글로 내려앉는다면 족할 것 같았다.

생각을 거쳐오거나 지나쳐 오거나 시각적인 것들이 입체화해서 보이거나

가라앉아 올록볼록한 상태로 가뭇없다 하여도 나에게는 내밀한 행동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나를 조급한 강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낯선 눈길로 나를 잡아끄는 책을 손에 들고,

강박에서 수줍게 벗어나는 길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작가를 만나고 책머리와 차례를 살핀다. 작가는 아주 낯선 단어와 색다른 대화의 스킬로 처음 대면을

낯설지 않게 하려고 애쓰며 다가온다.


아직도 나는 작가와 서먹하지만 그는 잡은 손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흔들고 있다.

영화관의 어둠에 익숙하지 않은 시선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나를 잡아 끈다.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또 다른 강박으로 이겨내려는 시도는 옳은 것일까?.

한 페이지도 기억에 남지 않고 행위가 주는 속삭임에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나는 읽어야 혹은 읽고 있어야 소위 쓰는 이들의 범주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고 스스로 사유하고 고민했으며,

읽는 행위는 쓰지 않아도 심한 자책에서 나를 위로했다.

하지만 나의 뇌는 내용을 기억하지 못했고 작가와 동화되지 못했으니 부질없고 조야한 행위는 서글픈 위로로 남았다.


차라리 읽는 행위에 대한 부끄러운 이유가 없었다면 그 행위 만으로 나를 위로하는 시틋함은 없었을 것이다.

통장에 지천으로 남아있던 시간에 어리석은 나는 왜 읽지 못하고 이렇게 후회하고 있을까?.

여름방학 마지막날에 일기의 맑음과 흐린 날을 기억하지 못하고 후회하고 있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분명히 있었지만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게는 아직도 다상량이 남아 있으니 이들을 별개의 인격으로 나눈다면 또 고단하고 애석할 것이다.

쓰기 시작하면서 화가 늘었으니 즐겁자고 하던 일이 고통스럽다.


붉은 형광펜으로 나를 위로하고 내가 잠시 머물다 갔음을 표식으로 남기는 반복된 우울함이 남았다.

기쁨으로 마주했던 작가의 온도는 여정이 끝으로 갈수록 힘을 잃고 내려앉아, 형광펜의 흔적이 무감해질 때

나도 지쳐간다. 손에 든 패가 없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에필로그가 끝나면 나는 위로받을 수 있을까? 그는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연민은 가장 파괴력이 강한 감정이다 그리고 내가 원할 때까지 기다려 주는 일은 얼마나 있을까?


나는 왜 쓰고 있는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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