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여행 11일 차_산타클라라
아침에 눈을 뜨니 창문이 환하게 빛이 들어온다. 발코니로 나서니 호텔 바로 옆이 바다이다. 멀리 바다에는 흰색 보트가 몇 대 떠 있다. 물 위에서 밤을 지새웠는지 미동도 하지 않고 아직 졸고 있는 듯이 바다에 떠서 정박해 있다. 조금 있으니 조정 경기 연습을 하는 듯 조정배가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멀리는 유조선으로 보이는 배가 떠 있는 것도 보인다. 그 너머에 있는 것이 물안개인지 아니면 낮게 떠 있는 구름 같은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파란 바다와 하늘이 마치 바탕색에 흰색의 물감으로 작은 보트와 옅은 물안개를 흩뿌려 놓은 것 같은 아침 풍경이다.
오늘은 중요한 인물열전의 날이다. 중요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쫓아가는 날이기도 하다. 쿠바 혁명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70-80년대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자리 잡고 ‘혁명’이란 단어로 상징되는 체 게바라를 만나러 간다. 오후에는 약 100년 전에 쿠바에 어렵게 자리 잡고 쿠바에서 살면서도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고 한시도 잊지 않았던 한국인과 그 후손들이 생활했던 곳을 방문한다.
이동 경로는 시엔푸에고스에서 동북쪽으로 120km 떨어진 산타클라라로 먼저 이동한다. 트리니다드와 시엔푸에고스를 연결하면 산타클라라는 꼭짓점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다. 오후에는 아바나를 향해 서쪽으로 226km 정도를 약 3.5시간 이동한다. 그 후에는 저녁에 아바나로 입성하게 된다.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만 약 6.5시간 정도로 강행군을 한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머릿속으로 어제 1시간 정도 공부한 내용을 다시 한번 점검한다. 오늘은 산타클라라로 이동하는 동안에 체 게바라에 대해서 5분 정도 설명하기로 되어 있다. 로이스가 며칠 전에 내게 부탁을 했던 내용이다. 실제로 체 게바라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했던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는 것이 내게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실제 체 게바라에 대해서 알고 공부한 것은 아마도 작년이었을 것이다. 서점에 나와 있는 빨간 표지의 체 게바라의 평전을 누군가 늘 가지고 다닌 모습이 좋아서 그 책이 무엇인가를 알고서 나도 한번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책을 사놓고 고이 모셔 놓고 있었다. 그 후 TV나 매스컴에서 쿠바에 대한 내용이 나올 때마다 언급되었기에 한 번은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쿠바 여행을 결정한 후 가장 먼저 읽은 책이 장 코르미에의 ‘체 게바라 평전’이다. 책의 크기는 작지만 두께가 4cm 정도로 700페이지로 읽기가 쉽지 않은 책이다. 두 번 정도를 펼쳤다고 초반부만 있다가 만 책을 완독해 낸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쿠바에 관한 책을 읽을 때마다 체 게바라에 대한 것은 어느 책이든 기술되어 있다. 그런 체 게바라에 대해서 5분간 설명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읽고 느낀 대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쉬울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름대로 체 게바라의 출생부터 따라가면서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우리가 이동하는 산타클라라는 비야 끌라라 주의 주도이다. 산타클라라는 체 게바라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관광도시라기보다는 체 게바라가 활동하고 이 지역에서 승리를 함으로 쿠바 혁명의 마침표를 찍는 전투에서 승리를 했기에 산타클라라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실제 여기에는 체 게바라를 위한 도시라고 할 만하다. 산타클라라 전투를 벌였던 무장 열차와 체 게바라 기념관이 이 도시에 있고 반드시 보고 들려야 할 곳이다.
무장 열차 기념관에 도착하기 전에 나에게 마이크가 넘겨졌다. 약 5분에 걸쳐서 내 머릿속에 있는 것을 쏟아냈다. 실제 그가 어떤 사람이었고 나는 이 사람을 책에서 이렇게 배웠다는 것을 말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활동했던 쿠바와 산타클라라에 와서 내 눈으로 그가 남긴 것을 보러 왔다고 말이다. 체 게바라의 도시에 들어섰기에 여기서는 체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는 입어야 할 것 같은 괜한 의무감(?)이 들었다. 어제까지 티셔츠를 사지 못해 도착하자마자 무장 열차 기념관 반대편에 있는 체 게바라의 모든 것을 파는 상점에 들어갔다. 거기서 가장 마음에 드는 티셔츠를 사서 입었다. 이제 체 게바라를 만날 준비를 모두 마쳤다.
체 게바라는 산타클라라에서 게릴라 전으로 정부군과 맞섰다. 무장 열차 전투가 있기 전에는 정부군과 싸워서 지프와 트럭과 소총들을 운 좋게 입수했다. 그리고 연이은 전투에서 정부군을 압박할 뿐만 아니라 시민과 농민들의 지원으로 정부군보다 유리하게 산타클라라를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한편 정부군은 혁명군의 본거지인 산티아고 데 쿠바를 진압하기 위해 무장 열차에 무기와 지원병을 태워 보낼 계획을 세웠다. 산타클라라는 아바나와 산티아고 데 쿠바에 중간에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여기를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피델이나 체 게바라는 산타클라라에서 정부군을 저지시키지 못하면 혁명군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산티아고를 향하는 바티스따의 지원군이 산타클라라를 향해 온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8 개량의 기차에 중무장한 정부군이 오는 것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체 게바라는 사전에 정보를 입수했다. 대학 안에 있는 불도저로 철로를 끊어 기차가 탈선하게 만든 후 화염병을 던지며 기습 공격으로 400여 명에 이르는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하게 된다.
실제 그 전투의 기차와 불도저 등을 그대로 재현하여 그 당시 상황이 어떠한지를 기차 안에 사진과 함께 잘 설명해 놓고 있다. 장갑 열차 기념관을 이 전투가 얼마나 중요했고 여기에서 지휘관으로 활약했던 체 게바라의 활약상을 잘 담아내고 있었다. 그 당시라고 하면 소총이나 무기도 정확도가 떨어지고 얼마나 잘 훈련되고 싸울 의지의 정도에 따라 전세가 바뀌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갑작스러운 체 게바라 혁명군의 습격으로 바티스타 군은 탈선된 기차 안에서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하고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까지 가지도 못하게 되었다. 결국 이 전투의 패배로 바티스타는 외국으로 망명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피델은 혁명의 승리를 선언하게 된다.
우리 말고도 다른 관광객들도 꽤 많이 보인다. 실제 여기를 방문하는 외국인 중에 체 게바라에 해서 얼마나 알며 이 장갑 열차 전투가 얼마나 중요성을 가지고 오는지 궁금할 뿐이다. 특히 산타클라라나 산티아고 데 쿠바처럼 그 도시의 상징적인 사람이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한 번쯤은 공부하고 방문하는 것이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 일행은 로이스의 자료와 사전에 공부를 해서 그런지 정말 열심히 기차 안에 전시된 자료들을 유심히 살펴본다. 특히 여기를 방문하면서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오는 열성을 보면 알 수 있다.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우리 7명의 전사는 열차 앞에서 사진을 남겼다. 저마다 다른 색의 티셔츠이지만 가슴에는 베레모를 쓴 체 게바라가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 이 사진을 찍기 위해서 드레스코드를 맞추었는지도 모른다.
무장 열차 기념관에서 인디펜데시아 거리를 약 5-6블록을 따라 걸어간다. 거리는 행인들로 가득 차있다. 시엔푸에고스처럼 도심이 깨끗하게 잘 정돈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허름하거나 오래된 옛 건물은 없는 편이다. 이제 쿠바 시내 거리를 돌아다녀도 별로 이상하지 않다. 다들 적응을 했는지 자연스럽게 쿠바 사람들 사이에서 잘 섞여서 삼삼오오 잘 걸어 다닌다. 이제는 웬만한 건물이나 사진을 찍을 것이 아니면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는다. 그만큼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한참을 걸어가니 이 도시의 중앙에 비달 공원(Parque Vida)을 만나게 된다. ‘비달’이란 이름은 짐작을 했겠지만 1896년 독립을 위한 전투에서 전사한 장군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이 도시의 중심 공원이라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공원에 모여 있다. 실제 이 공원은 많은 사람들이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고 인터넷을 서핑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다른 도시의 공원보다 벤치가 유난히 많이 있다. 그리고 광장 주변에 전문 안무가의 아름다운 춤사위나 전위 예술적인 사진을 크게 포스팅 해 놓았다. 이 도시에서 안무가인지 전위 예술가인지 모르지만 잘 연출된 사진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날씨가 더워서인지 벤치 아래 그늘에서 한 마리 강아지가 졸린 듯 낮잠을 청하고 있다.
공원 주변에는 여러 건물들이 있다. 특히 녹색 건물 빌딩과 연한 베이지 색이 건물이 눈길을 끈다. 녹색건물은 산타클라라 리브레 호텔이다. 호텔 건물 치고는 촌스럽기도 한 녹색, 아마도 그것은 벌써 60년이 넘게 그 시대의 색을 유지하고 있다. 벽에는 아바나를 향해 진격하는 혁명군과 바티스타 정부군 사이에서 전투로 인해 총탄이 흔적이 외벽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때의 흔적을 지금도 쿠바의 국민들이나 관광객이 볼 수 있도록 보존하고 있다. 그 이유가 그때의 일을 잊지 말라는 정부의 생각인지 모르지만 산티아고의 병영의 외벽과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왼쪽에는 호텔 건물과 정반대의 이미지로 까리다드 극장이 우아한 자태를 보이고 있다.
산타클라라의 부자였던 마르따 아브레우 부인에 의해서 기증된 건물이라고 한다. 1800년대 세워진 건물로 아직까지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날씨가 좋은 날 공원에서 쉬고 있는 쿠바인들은 다양하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낮 시간인데도 보이는 가 하면 나이 든 어르신들이 벤치에 앉아서 졸기도 하고 혼자서 멍을 때리는 모습도 보인다. 어쩌면 공원 한 복판에서 시간이 멈춰 선 것 같은 분위기가 든다.
우리는 이제 체 게바라를 가장 추모하는 곳으로 향했다. 체 게바라의 기념관은 쿠바를 떠나서 다른 나라의 독립을 돕다가 결국은 볼리비아에서 CIA와 정부군에 붙잡혀 조용하게 처형당한다. 실제로 체 게바라가 쿠바 혁명 후로 쿠바뿐만 아니라 아프리카나 제3세계에서는 유명한 인물이었고 국제적으로도 알려진 인물이었다. 체 게바라에게 순교의 의미나 또는 그의 죽음이 불러올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살해 후에 유해도 찾을 수 없도록 매장을 시켰다.
CIA가 체 게바라를 잡기 위하여 많은 현상금을 걸고 최첨단 장비와 인력을 동원하여 체포하려고 했다. 물론 체 게바라는 자신이 잡히더라도 군사 재판이나 포로로 잡히면 함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CIA와 볼리비아 정부는 이를 간파하고 그 파장을 줄이기 위해 비밀리에 처형을 한 것이다. 볼리비아 정부는 체 게바라의 손목을 잘라 피델 카스트로에게 보낸 것이다. 결국 30년이 지나서야 볼리비아/쿠바 합동 조사단에 의해서 폐쇄된 활주로에 묻혀있던 그의 유골은 발굴되었다.
산타클라라에 있는 기념관은 체의 사망의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7년에 세워져 있다. 아직 한 낮인데도 여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줄을 한참 서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체 게바라를 기리기 위하여 기념관에 들어가려고 한다. 실제 기념관은 모자나 사진기나 가방은 들어가지고 들어갈 수가 없다. 실제 입구에 다가갈수록 이를 제지하는 군인 복장의 직원들이 모든 것을 체크한다.
여기에는 체 게바라와 혁명을 같이 했던 동지 17명의 유골이 안치된 곳이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혁명의 불꽃을 이어가기 위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거기가 아마도 체 게바라의 유골이 안장된 곳 같다. 기념관 안에는 체 게바라의 어렸을 때의 사진과 청년 시절의 사진, 그리고 그가 사용했던 모든 것이 보관되어 있다. 그는 혁명가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의사였다. 그가 의과대학 친구와 남미를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을 한 후에 혁명가로 뛰어들 수 있었지만 그는 의과대학을 마치고 먼저 의사가 되었다. 혁명 중에는 처음에는 군의관의 역할로 참전했다. 그가 지휘관을 시작한 것이 아니고 군의관으로 혁명을 시작했다. 그가 쿠바에서 혁명군을 이끌면서 신경을 쓴 것은 의사와 또한 자원한 어린 청년들에게는 글을 가르치고 교육하는 선생님의 역할도 겸했다.
그의 모든 것이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었고 추모관에는 그와 혁명을 같이 한 동지들과의 기록이 담겨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파란 하늘을 향해 앞으로 나가려는 체 게바라의 동상이 서있다. 베레모를 쓴 얼굴에 오른손에는 소총을 들고 왼손을 탄띠를 잡고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도 저 먼 곳으로 혁명을 하기 위해서 지금도 전진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동상 왼쪽에는 혁명을 같이 했던 전우와 그를 따르던 평범한 농민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체 게바라의 동상 밑에는 그 유명한 글귀가 적혀 있다.
“HASTA LA VICTORIA SIEMPRE” – 승리의 그 날까지! 조국 아니면 죽음을!
동상의 오른쪽에는 체 게바라가 피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를 조각으로 남겨 놓았다. 쿠바 혁명이 끝났기에 더 이상 쿠바에서 자신의 역할이 다 했음을 알았기에 새로운 혁명, 아직 끝나지 않은 혁명을 향해 쿠바와 피델을 떠났다. 거기에는 친구로서, 동지로서 피델을 향한 체 게바라의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같이 혁명을 이끌고 완성한 후에 쿠바의 시민권자가 되고 중앙은행 총재와 산업부 장관을 역임한 후에 체 게바라는 미련 없이 기득권을 포기하고 쿠바를 떠났던 것이다. 요즘의 정치인이나 가진 자들이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하고 구차하게 살아가는 모습과는 많은 비교가 되기도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체 게바라가 피델 카스트로에게 남긴 편지
피델, 지금 이 시각 여러 가지 일이 떠오릅니다. 마리아 아토니아 집에서 당신으 처음 만났을 때, 나에게
합류를 권했을 때 그리고 준비과정의 살얼음판 같은 긴장감이 생각압니다. 어느 날인가 사망통지서를
받을 사람의 이름을 대라고 했을 때,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우리 모두를 엄습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혁명에서는, 진정한 혁명에서는, 승리 아닌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수많은 동지들이 혁명 도정에서 스러졌습니다.
지금은 그런 일도 예전만큼 심각하게 보이지 않는데, 이유는 우리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뿐, 사실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제 쿠바 땅에서 혁명과 관련된 내 과업을 완수했다고 생각하므로, 당신과
동지들과 당신의 국민과(이제 내 국민이기도 합니다) 작별하려고 합니다.
나는 공식적으로 당지도부의 직책과 장관직과 사령관직에서 사임하며, 쿠바인 신분을 포기합니다.
이제 법적으로 나아 쿠바는 무관합니다. 다만, 공적임명과는 달리 쉽게 단절할 수 없는 관계는 남아 있습니다. 내가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건대, 혁명의 성공을 위해 지금껏 매우 정직하고 또 헌신적으로
일했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중대한 과실이 하나 있다면, 시에라 마에스트라 시절 초창기부터 당신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고, 또 혁명가로서. 지도자로서 당신의 자질을 좀 더 일찍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내 지나온 나날은 장려했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카리브위기 때는 당신 곁에 있는 나 또한 '우리
국민'의 한사람이라는 사실에 긍지를 느꼈습니다. 그런 위기 앞에서 당신보다 명민하게 대처하는 지도자는 없기 때문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당신의 사고방식, 위험과 원칙을 인지하고 평가하는 당신의 방식을 따랐는데, 이 역시 자랑스럽습니다.
지금 지구의 다른 곳에서는 미력하나마 내 도움을 바라고 았습니다. 당신은 쿠바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못하는 일을 나는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작별할 때가 되었습니다. 막상 떠나려고 하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건설자로서 가장 순수한 희망과 그 어떤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마저도 여기에 두고 갑니다.
무엇보다도, 나를 자식처럼 받아준 국민들을 두고 가려니 가슴 한 구석이 찢어집니다. 새로운 전장에서도 당신이 심어준 신념, 우리 국민들의 혁명정신을 간직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국주의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투쟁을 하는 것이 가장 고결한 의무의 이행임을 명심하겠습니다. 반제투쟁은 힘을 북돋아주고, 제아무리 큰 상처라도 치유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로 인해 쿠바가 책임질 일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쿠바의 예를 따른 데서 나오는 책임은 예외일 것입니다. 만약 내가 다른 하늘 아래서 최후를 맞는다면 마지막 순간에 쿠바인들, 특히 당신을 생각할 것입니다. 당신의 가르침과 오범에 감사드립니다. 내 행동이 미칠 파장까지 고려하여, 충실히 따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항상 내가 곧 우리 혁명의 대외정책이라고 생각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어디에 머물든 쿠바 혁명가로서 책임감을 느낄 것이며, 또 그렇게 행동하겠습니다.
아이들과 아내에게는 아무런 재산도 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든든합니다. 생활과 교육에 필요한 것은 국가가 충분히 제공할 것이므로, 내 가족을 위해 특별히 부탁할 일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당신과 우리 국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부질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로는 내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는데, 몇 자 더 적는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
조국 아니면 죽음을!
혁명의 열기로 안부를 전합니다.
체
쿠바 혁명 이후 바티스타 정권의 하수인의 색출과 재판을 담당했다. 피델이 국내 정치에 힘을 쏟았다고 하면 체는 동유럽과 소련 및 아프리카를 포함한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경제적 측면의 외교를 펼쳤다. 보통 사람이라면 어렵게 성공한 쿠바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싶었겠으나 체는 달랐다. 아마도 우리나라로 말하면 조선시대의 선조와 이순신과의 같은 관계가 아니었을까? 체는 쿠바 태생도 아닌 아르헨티나 사람으로 피델과 같은 명성과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에 대해서도 아마 고민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같은 하늘 아래 피델과 같이 있기보다는 자신의 할 일, 새로운 혁명을 위해서 떠났을 것이다.
그런 체 게바라를 피델은 정말로 정중히 잘 대해주는 모습이 보인다. 자신을 위해서는 우상화를 금지하기 위하여 산티아고에 둥근돌에 자신의 이름만을 적어 묘비로 대신한 반면에 혁명동지인 체 게바라를 위해서는 산타클라라에 추모관과 기념관을 세워 주었다. 뿐만 아니라 늘 쿠바의 젊은이들에게 ‘체 게바라’를 닮아야 하고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그는 쿠바에서는 이방인이지만 이방인이 아닌 사람으로 대우받고 있다.
동상 앞에는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다. 아바나의 혁명광장과 같이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다. 넓은 광장 위로는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었다. 여기 이 광장도 어떤 특별한 날이 있으면 많은 국민들이 모여서 행사를 했을법한 장소이다.
그렇게 오전 시간을 체 게바라가 싸운 전쟁터에서, 그리고 그를 기념하고 추모하는 공간에서 체를 온전히 만났다. 오늘 입고 다니기 위해 한 티셔츠를 보고 지나가는 외국인이 좋다고 엄지 척을 세운다. 내가 입은 모습이 잘 어울리던가 아니면 체 게바라의 티셔츠가 눈에 뜨여서이지 모른다. 점심은 근처에 위치한 호텔의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점심을 오래간만에 뷔페식당에서 먹게 된다. 우리뿐만 아니라 많은 관광객들이 와서 식사를 하는 것 같다. 우리처럼 이곳에 숙박을 하지 않는데도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나름대로 음식이 괜찮다는 것이다. 보통 뷔페식당이지만 점심을 4가지 메뉴 중에서 선택하지 않고 여러 가지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식당도 좋지만 식당 밖에 있는 호텔의 정원이라고 해야 하는 곳이 더욱 마음에 든다. 작은 풀장도 있고 야자수 잎으로 만든 그늘막도 있고 예쁜 꽃들로 잘 정리되어 있다. 농가의 오두막이나 작은 집처럼 여러 건물을 만들어 놓아 아기자기한 맛도 있다. 오전의 강행군을 여기서 식사를 하고 잠시 쉬어가는 것도 처음 가는 곳에서 가끔씩 만날 수 있는 재미가 아닐까 한다.
산타클라라 오후 일정은 다음 편에....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