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나를 위해 다르게 살기로 했다_2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가 익어가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도 익어가네
익어가는 날들은 행복하여라
말이 필요 없는 조용한 기도
가을엔 너도 나도 익어서 사랑이 되네
- 이해인 시 <익어가는 가을> 중에서 –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며칠 전에 약속이 있어 막히는 퇴근시간의 고속도로를 운전하고 있을 때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가사의 한 소절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일이 있었어. 평상 시라면 아니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고 하면 이 노래를 들을 일이 없을 텐데. 평일 퇴근길에서 이 노래를 듣게 될 줄이야. 아마도 이 노래는 내가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면서 또한 당신에게도 듣고자 하는 말이었어. 나의 마음을 온전 담은 한 소절이었어. 어느 때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늙어가는 것이라는 말에 익숙해져 있었고 우리 또한 그렇게 생각을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더군.
노래가 끝난 후에 누구의 노래인지를 DJ의 멘트로 알게 되었어. 그것은 노사연 님의 ‘바램’이라는 노래였더군.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 가사와 노래를 확인한 후에 노래를 다운로드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마도 스무 번 이상은 들었던 것 같아. 아마도 이 노래에 동감하는 사람은 다들 우리 또래가 아닐까 해.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별로 유행가나 노래에 별로 감동하지 않는 사람인데, 이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목소리와 가사가 너무나도 그 날 저녁 내내 마음을 잔잔하게 적셨던 것 같아.
특히 가사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 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 자기의 마음을 그대로 전해주는 것이라고 하면 아마도 우리와 같은 40대를 맞이한 사람들부터가 아닐까 해. 지금까지 삶을 살아오면서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것을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내 손에 더욱 힘을 주고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어. 오직 내 손을 펴기보다는 움켜쥐느라 힘줄이 서고 손끝에 더욱 많은 힘이 들어간 것은 사실일 거야. 특히 마흔에 들어선 후에는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모든 힘을 주었던 나의 모습이 하나씩 스쳐가는 것 같아. 그리고 내 등에 얹힌 삶의 책임과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 오직 버티고 온 내 삶도 떠오르네. 태양이 작열하는 그늘 한 점 없는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가 보이네. 등에는 너무 많은 짐을 지고서 쉴 줄 모르고 오직 앞만 보고 따라가는 낙타 한 마리의 모습이 왠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남자, 그중에 나의 모습이 오버랩이 되는 것은 왜일까? 그건 억울해서가 아닌 무언가 가슴이 헛헛한 감정인 것 같아.
가끔씩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가슴속이 아파올 때가 있어. 나만 그럴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의 이런 마음을 당신이 조금이나마 알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 이러다가도 괜히 울적해지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하는데 이런 것이 감정 사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 그러다가도 곧바로 일에 정신을 쏟아붓곤 하지. 매일 해결하는 일로 인해 어느덧 하루가 훌쩍 지나가고 일주일이 가다가 보면 한 두 달이 너무나 빨리 지나가는 것을 느끼곤 하지. 이럴 때마다 가끔 나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줄 친구를 찾는 것이 아닐까 해. 그러다 보면 남자들은 생활의 탈출구, 숨구멍을 만들기 위해서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리는 계기를 계속 찾는 것 같아. 때로는 골프와 같은 운동이나 또는 친구를 만나서 술 한잔을 하지. 이런 마음을 나누는 것으로 방향을 트는 것이 중년 남자들의 생활의 일부이기도 하고 숨구멍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여보, 난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해. 사람은 살다가 힘들고 지칠 때 누군가에게 자신의 속에 있는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어 해. 남자들도 여자들 못지않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수다 떠는 것을 무척 좋아하지.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동병상련이라 할까? 이런 마음을 서로 털어놓고 공감하기만 해도 왠지 후련한 것은 누군가가 나를 이해해준다는 마음이 들어서 일지도 모르지. 그런 상대가 같이 살아가는 부부라면 더욱 좋을 거야. 그치!
힘든 세상을 살아가더라도 세상 한 복판에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나의 마음을 이해해 주고 알아주는 그 누군가와 있다고 하면 이 세상이 외롭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것도 나를 사랑해주는 당신과 함께라면 말이야. 나도 언제부터 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노래를 듣거나 무슨 생각에 빠지게 되면 우울해지거나 괜히 술 한잔이 생각나는 것이 사실이야. 이것도 나이가 한 살씩 먹어가면서 인생을 알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해.
내가 정말로 큰 것, 좋은 것만을 추구했던 것은 아마도 20-30대의 혈기가 왕성할 때였던 것 같아. 하지만 그런 기회는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그다지 많이 오지 않는 것을 알게 되면서 현실에 적응하게 되더군. 그래서인지 그보다 작은 것에 만족하게 되는 것이 세월이 주는 선물 중에 하나인 것 같아. 당신과 아이들과 생활하면서 느껴지는 사소한 재미, 말 한마디가 더욱 좋아지는 것도 그런 이유겠지. 반대로 말 한마디에 상처를 주고받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 이제는 큰 것보다 작은 것, 비싼 선물보다는 비 오는 퇴근길에 장미 한 송이, 혹은 당신이 좋아하는 노란색의 프리지어 꽃 한 다발을 사들고 무심코 내미는 것이 생활의 위로이자 재미인 것 같아. 그런 행동이 우리를 서로 기분 좋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지.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날이 오르막길이 아니라 내리막길인 경우가 많을 거야. 산을 오르다 보면 너무 힘들어 주위에 핀 아름다운 꽃이나 등 뒤의 풍경을 감상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면 이제는 올라올 때 보지 못한 예쁜 꽃을 발견하고 기뻐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여유를 갖도록 하자. 이제는 우리가 나이를 한 살 먹을 때 늙어간다고 생각하지 말고 조금씩 익어간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멋진 생각의 전환일까
오래될수록 좋은 것이 많이 있잖아.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오래된 포도주와 좋은 술, 그리고 튼튼하면서도 사람의 손길이 닿아 헤진 가구나 고택들을 보면 참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얼마 전 일본에 가서 본 노부부가 운영하는 가정 문고, 도서관을 볼 기회가 있었지. 집안이 도서관으로 된 것을 보면서 참 오래되어서 좋구나, 시골 냄새가 나는 것이 너무 좋은 것 같았어. 내가 기억하는 옛날 외할머니 책의 기억과 너무 흡사했지. 누가, 언제 가더라도 늘 포근하고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포근하게 맞아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나고 거친 부분들이 부딪치고 깨지면서 상처를 주지 않도록 많이 닳아서 둥글게 변해가는 것이 너무나 좋다. 이것이 오래됨의 맛이 아닐까.
아마도 당신과 내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지향하는 점이 조금씩, 조금씩 익어갔으면 해. 한두 해가 아니고 오래 두면 둘수록 그 맛과 향이 깊어지는 그 무엇처럼 말이야. 입 맛을 끌어당기는 맛보다는 입안에 머금고 있다가 목 넘김을 하면 입안에 퍼지는 향기와 혀에 남아 계속 그 기분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처럼 우리도 잘 숙성되어가자. 우리가 그 무엇이 되어 남들에게 그러한 맛을 남길 수만 있다면 인생이 참 풍요로울 것 같지 않아?
가깝게는 우리 자식들에게 그런 부모로 기억되도록 해보자. 자신들을 낳아서 키워준 부모보다는 인생을 먼저 살면서 인생의 그윽한 맛을 보여주고 삶으로 본을 보여주는 인생의 선배로써 말이야. 그리고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에게 우리의 깊은, 잘 익은 인생을 조금씩 담아서 나누어주다 보면 인생이 참 여유롭고 아름다워질 것 같아. 잘 익은 된장이나 간장이 음식에서 깊은 맛을 내는 것처럼 우리가 잘 익어서 살아가는 삶을 조금이나마 나누어 준다면 그들에게도 색다른 깊은 맛을 선사하고 가는 것도 참 좋은 일 일거야. 세상에서 내가 태어나기 전보다 더 살기 좋은 세상으로 기억되게 하고 맛난 기억과 잘 익은 추억을 나누어 주고 살아간다면 이처럼 더욱 좋은 삶은 없겠지. 그것은 오직 당신과 나에게 달려있는 것 같아.
그리고 우리가 걸어온 길, 앞으로 걸어가야 하는 길이 황량한 사막이라고 하더라도 그 길에 꽃씨를 뿌리면서 걸어 가자. 우리가 걸어갈 때는 그 길이 꽃 길은 아니지만 우리가 간 길을 누군가가 따라올 때면 그 길에 아주 작은 들꽃이 피어서 꽃 길이 되어 있을 수도 있잖아.
그 길을 같이 가는 길동무, 당신이 있어서 좋다. 우리 그렇게 조금씩 익어가자.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이번 달보다는 다음 달이, 올해보다는 내년에 조금씩 맛있게 익어가자. 너무도 빨리도 말고, 그냥 그렇게 조금씩 익어가자. 그리고 우리의 사랑도 더욱 조금씩 익혀가자.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