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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6시간전

 수행 시간

백수인데도 뭔가 매일매일 할 일이 있다. 동작도 많이 느려지고, 이해력도 떨어지고, 나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한 가지 생각하면 그 생각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며 동시에 다른 일은 할 수도 없다. 요즘 자신에 대해 느끼고 있는 점이다. 예전에는 기상 후 출근하는데 30분이면 모든 준비가 끝났다. 하지만 요즘은 외출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한 시간 이상 소요된다. 동작이 많이 느려지고, 생각은 많아지고, 행동은 나의 뜻처럼 따르지 못해 일어난 일이다. 백수긴 하지만 주 하루나 이틀 정도 외부 업무를 보러 나가기도 하고, 주 이틀은 딸네 가서 기사 노릇을 한다. 주말에는 걷기 모임을 이끌고, 가끔 시간이 날 때는 답사를 다녀오기도 한다. 아내와 얼굴 마주 보고 식사할 시간도 거의 없다. 지금 아내는 친구 모임에 나갔고, 나는 이 일기를 쓰고 있다. 오전에 앞으로 진행할 길 답사를 다녀왔고, 아내는 장 보러 나갔다 왔다. 할 일이 없는 백수는 맞는데, 할 일이 제법 있고, 그 일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점점 더 길어진다.     

 

동안거 입제 전 하루 경행과 좌선을 각각 30분씩 하기로 결정했다. 괜히 시간을 늘렸다가 하지 못하면 많이 후회할 것 같아서이다. 해파랑길 2박 3일 다녀온 날 외에는 최소한의 수행 시간은 지키고 있다. 오늘 같은 아무 일도 없는 날은 진득하니 수행 시간을 늘려서 해도 되는데, 다음 주와 그다음 주 일정을 보니 오늘 다녀오지 않으면 답사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 같아 답사를 다녀왔다. 수행하는 것 외에 동안거 일기도 써야 하고, 위빠사나 수행 법문도 들어야 한다. 스트레칭과 근력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 ‘마음챙김 걷기’ 책 작업은 아직 손대지도 못한 상태다. 안거 입제 전 주변 정리를 한다고 했지만, 개인적인 모임 외에도 할 일이 있다 보니 자꾸 시간만 흘러가고 수행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 한 구석이 편하지 않다. 하지만 그냥 받아들이고 불편한 마음을 흘려보내려 한다.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집중해서 하고 공부에 대한 욕심도 부리지 않으려 한다.      


아침에 30분간 경행을 한다. 발등과 발가락 사이에 바람이 느껴진다. 안쪽 베란다 문을 열고 경행을 해서 그런지 바람이 강하게 느껴지고 발이 조금 시릴 정도다. 어제처럼 가려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얼굴 부위의 실핏줄이 빨리 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가렵지는 않지만 얼굴 피부 아래서 뭔가가 활동하는 느낌이다. 경행의 세 번째 단계인 발을 들어 올릴 때 허벅지 앞 근육에서 저항감이 느껴진다. 발을 들기 위해 허벅지를 올리는데 위에서 허벅지를 누르는 느낌이다. 중력에 반하는 행동이 걷기라고 한다. 중력은 아래도 당기고, 허벅지는 발을 올리기 위로 올린다. 반가부좌 자세로 좌선을 하며 손은 발 위에 편안하게 올려놓는다. 배의 부풂과 꺼짐을 관찰하는데 손이 팽창하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손이 많이 팽창하며 붕 뜬 느낌도 든다. 손이 사라진 것처럼 손과 발이 닿는 부위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는다. 30분의 좌선 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간다. 오늘 경행과 좌선 시 느낀 점이다.      


얼굴의 감각, 손의 감각, 느낌 등은 내가 의도적으로 만든 것도 아니다. 다만 몸이 있기에 몸이 어떤 자극이나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감각과 느낌은 단 한순간도 머물지 않게 계속해서 이동하고 변한다. 그리고 그 감각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다. 감각이 변함에 따라 마음도 변한다. 어제 일기에도 썼지만, ‘나’라는 사람은, 또 모든 사람은 신체와 정신의 작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근데 신체와 정신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 반응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있다. 여기서 과연 ‘나’라는 존재는 어떤 것일까? 나의 몸이고 나의 정신이지만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도 없고, 그냥 몸과 감정, 생각, 정신만 있을 뿐이다. ‘나’라는 존재를 찾을 수는 없다. 과연 ‘나’는 실상일까? 아니면 신체와 정신이 만들어낸 허상일까? 마음은 가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쓸데없는 상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거나 상상만으로 가능한 불가능한 상황을 설정하며 그 안에서 헤매기도 한다. 망상이다. 생각은 할 일이나. 또는 복잡한 상황을 정리한다는 측면에서 사회생활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망상은 개인과 사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망상이나 공상에 빠져 살고 있는 사람이 많다. 나 역시 그런 시절도 있었고, 지금도 가끔은 상상 속 세상을 살아가기도 한다.      


오늘 한강변 답사를 다녀왔다. 광나루역에서 한남역까지 걸었다. 오랜만에 홀로 걸으니 홀가분하고 좋지만, 늘 함께 걸어서 그런지 조금 심심함도 느껴진다. 안거, 경행, 수행 등등의 이름도 모두 내려놓고 새로 산 등산화를 신고 발과 잘 맞는지 검증하는 시간도 갖는다. 처음이라 약간 딱딱한 느낌은 드는데, 걷기 마칠 때쯤 되니 발에 금방 익숙해진다. 전체 구간의 반 정도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걷기만 했다. 발의 감각은 주로 신발과 발과의 궁합에 두었다. 그 이후에는 발의 감각에 집중하기도 하고, 왼발 오른발이라는 명칭을 붙이며 걷기도 한다. 가끔 생각들이 올라온다. 걷기학교 생각, 어디를 걸을까? 인제 천리길은 잘 되겠지? 한강 걷기 마친 후 어디를 걷지? 등등 주로 걷기 생각에 많이 빠진다. 그 외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걷기 끝날 즈음해서 올라오는 생각을 빨리 알아차리고 ‘생각’이라는 명칭을 붙이며 흘려보내는 연습을 해본다. 다행스럽게 생각에 끌려다니거나 생각이 다른 생각을 불러오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생각은 에고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잠시 해 본다.      


홀로 걷는 시간은 저절로 침묵 걷기가 된다.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마음과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그 대화가 무의미한 에고의 작용임을 알아차리고 흘려보낸다.  집에 돌아와 법문 강의를 듣는다. 경행과 명칭 붙이기에 대한 말씀이다. 늘 궁금했었다. 과연 명칭을 붙이는 것이 어떤 효과가 있을까? 오늘 법문을 들으며 의문이 조금 풀렸다. 명칭 붙이는 개념에 빠지기도 하고, 명칭과 행동이 분리될 경우도 있었다. 이 둘을 밀착시키는 작업 때문에 초심자는 이런 방식으로 연습을 하게끔 마하시센터에서는 지도한다. 경험을 통해 왼발, 오른발 하고 명칭을 붙이며 걸을 때와 왼발, 오른발로 걷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한 명칭을 붙이는 것이 잡념이 들어올 틈을 거의 만들지 않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법문을 통해 다시 한번 이해를 조금 더 깊게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이번 안거 기간 동안에는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법을 따라 수행하기로 마음먹었고, 지금 그 방법대로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오늘 법문 마지막 부분에 한 시간 경행 후 한 시간 좌선 또는 그 이상 좌선을 하라고 한다. 경행은 정진 요소를 증진시키고, 좌선은 삼매 요소를 강하게 만든다. 경행과 좌선의 균형, 즉 정진과 삼매의 균형적인 발전이 지혜를 증장시킨다고 한다. 이 법문을 들으며 ‘한 시간’이 마음에 걸린다. 30분 밖에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시간을 늘려 나갈 방법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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